소설리스트

복수하는 회귀자를 사랑하는 법-37화 (37/193)

#037

“후….”

사영은 향을 풀어 제 몸을 휘감고 있는 한재우의 페로몬을 털어 내고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두 다리에 제대로 힘이 들어가지 않았으나 더 시간을 지체할 수는 없었다. 행여나 누군가 와서 이 꼴을 보기라도 하면 괜한 오해를 살 수도 있었다.

몸을 일으켜 흐트러진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재우가 사라진 곳에서 안정을 찾는 건 그다지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애초에 사영은 페로몬이 매우 안정적인데다 조절에 능숙한 사람이다. 아무리 알파가 강압적으로 페로몬을 흘렸다고 해도 평범한 상대였다면 이렇게까지 무너지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사영이 이렇게 속수무책으로 무너진 건 상대가 한재우이기 때문이었다. 오랜 시간 그의 강압적인 페로몬에 조련당해 왔던 사영인지라 육체적으로 길들여져 있다는 게 문제였다.

이마에 옅게 맺힌 식은땀을 닦고, 사영은 몇 번이나 심호흡했다.

새삼 재우가 자신에게 남겨 놓은 흔적들이 너무 많다는 게 느껴졌다. 정신적으로는 말할 것도 없고 육체적인 부분도 상당했다.

아무리 죽음으로 극적인 깨달음을 얻었다고 해도 하루아침에 이 모든 것을 완전히 벗어나는 건 불가능한 게 당연했다.

조바심을 내선 안 된다. 서두른다고 될 일도 아니었다. 미래가 보이지 않는 깜깜한 날들 속에서도 7년을 버텼던 사영이다.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아니, 조금 전 자신이 재우에게 했던 말을 떠올려 보면 오히려 오늘 일은 사영에게 꽤 통쾌한 순간이기까지 했다.

‘잘나가는 배우한테 접근해서 팔자 편 거… 그거 되게 익숙한 얘기인데.’

비록 말을 제대로 끝마치진 못했지만 그래도 이런 말을 그 앞에서 꺼냈다는 거 자체가 사영에게는 기적이나 다름없었다.

그토록 오랜 시간 동안 사영으로서는 상상조차 하지 못한 말들로 모욕할 땐 언제고 고작 저 한마디 말에 욱하는 꼴이라니.

사영은 절로 새어 나오는 웃음을 꾹 참고 다시 두 다리에 힘을 주고선 천천히 유준이 기다리고 있을 병원 주차장으로 걸음을 옮겼다.

적지 않은 위험을 무릅쓰면서까지 유준을 끌어들인 건 정말로 잘한 선택이었다.

그것이 설령 자신에게는 또 다른 비참함을 안겨 줄 수밖에 없는 선택지였다고 하더라도 사영에게 있어 비참함이란 이미 숨 쉬듯 자연스러운 감정이었으므로 괜찮았다. 아무렇지도 않았다.

***

살면서 이렇게 초조한 적이 언제 또 있었나 싶었다. 유준은 매해 열리는 영화제나 각종 시상식에서도 긴장해 본 적이 없는 사람이었다.

시상식 후보에 들 때면 유준은 언제나 자신이 상을 탈 게 분명하다고 확신하는 편이었고, 상을 못 받는다고 한들 그걸로 가치가 떨어질 위치도 아니었으니 긴장할 이유가 없었다.

그런 김유준이 지금 웬 병원 주차장에서 핸들을 쥔 채 초조함에 어쩔 줄을 모르고 있었다. 다시 가 봐야 하나 싶어 몇 번이나 엉덩이를 들썩였는지 모른다.

내가 굳이 왜. 어차피 나랑은 상관없는 둘의 일인데 내가 왜. 이 정도 해 주었으면 됐지 여기서 더 관여해 봤자 나한테 이득 되는 것도 없어.

유준은 끊임없이 그런 말들로 자신을 설득하며 버텼다. 애초에 설득이 필요하다는 것부터가 이상한 일이었지만 굳이 깊이 생각하고 싶진 않았다.

동정이든 호기심이든 댈 수 있는 핑계는 많았다.

하지만 꽤 시간이 지난 것 같은데도 사영이 돌아오지 않자 참는 게 힘들어졌다. 유준이 기다리는 걸 뻔히 알고 있는 재우가 사영에게 무슨 짓을 하지는 않겠지만 마음이 불안하고 자꾸만 정체를 알 수 없는 화가 치밀었다.

결국 더 참지 못한 유준이 사영을 찾으러 가기 위해 차에서 막 내렸을 때. 저만치에서 희게 질린 얼굴로 걸어오는 사영의 모습이 보였다.

“윤사영 씨.”

이름을 부르며 거의 달려가다시피 사영에게 다가간 유준이 갑자기 걸음을 멈추어 선 건 바로 그 순간이었다. 사영과 거리가 좁아질수록 느껴지는 거슬리고 이질적인 향 때문이었다.

유준은 곧 그 향이 타인의 페로몬이며 그것이 사영에게서 느껴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뭐… 무슨….”

예상치 못한 상황에 머릿속이 멍해졌다가 이내 빠른 속도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사영은 재우에게 복수하기 위해 자신에게 미친 사람 취급을 받으면서도 도움을 요청하길 마다하지 않았다. 그런 사람이 이제 와 자발적으로 한재우와 페로몬을 나눌 만한 행위를 했을 리가 없었다.

유준은 윤사영이라는 사람을 안 지 얼마 되지 않았다. 그래서 그에 대해 아는 게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그러나 그가 자신이 기다리고 있는 걸 뻔히 알면서 한재우와 페로몬을 섞고 스킨십을 했을 거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그렇게 믿고 싶었다. 그렇다면 남은 가능성은 하나였다.

씨발. 입 속으로 낮게 욕설을 뇌까린 유준이 멈췄던 걸음을 다시 성큼성큼 걸어 단숨에 사영의 코앞까지 다가가서는 그의 손목을 낚아채 당기며 입을 열었다.

“한재우가 이랬어요?”

“유준 씨…?”

“그 새끼가 이 역겨운 향 뿌려 대면서 어떻게 하려고 했어? 그래요?”

손목을 틀어쥐는 악력에 사영이 미간을 찌푸렸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당황한 사영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유준을 올려다봤다.

“이 씨발 새끼를 진짜….”

사영은 유준이 뭐 때문에 갑자기 이렇게 화를 내는지 파악이 안 돼서 대답을 내놓지 못했던 건데 그 침묵을 긍정이라고 해석한 유준이 그대로 손을 놓고 사영을 지나쳐 걸어가기 시작했다.

“유, 유준 씨! 잠깐만요!”

여전히 뭐가 어떻게 된 건지 알 수 없었어도 본능적으로 유준이 가게 놓아두면 안 될 것 같단 예감이 든 사영이 본능적으로 유준의 팔을 붙들었다. 하지만 힘 하나 없는 사영의 몸은 막무가내로 걸어가는 유준을 막을 수가 없었다.

종이 인형처럼 유준에게 끌려가던 사영은 급기야 다쳤던 다리의 발목을 살짝 접질리며 외마디 신음을 터트리곤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사영 씨?”

다행히 유준은 사영의 신음에 반응했다. 그제야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본 유준은 발목을 붙들고 넘어진 사영을 발견하곤 놀라 그의 앞에 덩달아 몸을 굽히고 앉았다.

유준이 차마 사영의 발목을 건들지도 못하고 손을 어쩔 줄 모른 채로 말했다.

“왜 그래요. 다쳤던 곳이 다시 아파요? 사영 씨.”

“아니, 아니에요. 그냥 살짝… 살짝 발목을 삐끗해서….”

“다시 병원 올라가죠.”

“자, 잠깐만요!”

사영은 더 볼 것도 없다는 듯 곧장 사영을 안아 올리려는 유준을 다급하게 제지했다. 갑자기 너무 폭풍 같은 상황이 연달아 벌어지자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병동에서 내려올 때까지만 해도 뭔가 슬픔 엇비슷한 감정을 느꼈던 것도 같은데 지금은 그냥 당황스럽고 숨이 찼다.

사영은 일단 오해를 하나씩 풀어 가기로 했다. 두 손으로 유준의 팔을 붙들고 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사영이 말했다.

“저 괜찮아요. 그냥 잠깐 삐끗한 거라 이제 안 아파요. 일으켜 주시면, 혼자서 걸을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정말입니까?”

“네. 우선 걸어 보고 만약에 아프면. 그러면 다시 가서 진찰받을게요.”

“조금이라도 아프면 가는 겁니다.”

유준은 의심스러운 눈으로 사영을 훑어보며 조심스럽게 그의 몸을 일으켜 주었다. 사영은 똑바로 일어서서 오른쪽 발목을 살살 돌려 보고 바닥을 힘주어 디디기도 하며 상태를 살펴보았다.

유준은 여전히 사영을 잡아먹기라도 할 것 같은 표정으로 그를 지켜보고 있었다.

“아프진 않아서 다시 올라가진 않아도 될 것 같아요.”

“정말입니까? 괜찮은 척하는 거 아니고?”

“…네. 정말이에요.”

사영은 짧게 대답을 머뭇거렸다. 유준의 물음이 지나치게 생소했던 탓이다.

사영의 남편이었던 한재우는 사영이 식은땀을 흘리며 몸을 웅크린 채 앓아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던 사람이었다.

그러다가 병원에 가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병이 깊어지면 그제야 사영을 데리고 병원에 가 울 것 같은 얼굴로 세상에서 제일 다정한 남편 흉내를 냈다.

그러면 사영은 그 짧은 순간이 좋아서. 자신을 따뜻하게 안아 주고, 걱정해 주고, 다정하게 바라봐 주는 그 거짓된 순간들마저도 행복해서.

그래서 어느 날은 차라리 심하게 아프기를 바라며 한겨울에 집안 창문을 모두 활짝 열고 오도카니 앉아 있었던 기억이 어지럽게 떠올랐다 사라지길 반복했다.

지금 생각하면 정말이지 미친 짓이라는 말 외에는 달리 설명할 길이 없다.

그때에는 그것이 너무나도 간절한 사랑이라고 생각했는데. 사영은 이제 어쩌면 그것이 단지 치료가 필요한 병이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한재우의 오랜 정서적 학대가 사영을 그토록 병들게 만들었다고.

“그럼, 한재우와는 어떻게 된 겁니까.”

더 깊어지려는 사영의 상념을 막은 건 불쑥 찌르고 들어온 유준의 질문이었다. 사영은 눈을 빠르게 깜빡이며 과거에 흘러가던 정신을 현재로 다시 이끌었다.

흐릿해졌다 선명해진 시야로 잔뜩 일그러진 김유준의 얼굴이 보였다.

고작 발목을 삐끗한 일로 난리를 피워 댄 당사자가 이번에는 한재우와 무슨 일이 있었느냐고 자신을 추궁하고 있다.

조금 전 한재우와 있었던 일이 그 물음을 타고 떠올랐다. 그러자 유준이 왜 이렇게까지 격렬하게 반응하고 있는지 그 이유를 조금 알 것도 같았다.

대답이 나오기까지의 짧은 틈을 더 기다리지 못하고 유준이 다시 물었다.

“도대체 무슨 짓을 했길래 페로몬이 그렇게 엉켜서는….”

유준은 말끝을 흐리며 입술을 깨물었다. 아까 느꼈던 더러운 기분이 다시 선명하게 떠오른 탓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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