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8
그는 한재우의 페로몬은 말할 것도 없고 사영의 것도 알지 못했다. 하지만 알파로서 같은 알파의 향과 오메가의 향은 당연히 구분해 낼 수 있었다.
재우와 대화를 나누고 온 사영의 몸에서는 분명 알파와 오메가의 향이 동시에 느껴졌고 심지어 그중 알파의 것은 무척이나 적대적이기까지 했다. 유준이 그토록 과격하게 반응했던 이유가 있었다는 말이다.
거기까지 차분히 유준의 이야기를 들은 사영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유준의 입장에서는 가만히 있다가 갑자기 어지럽게 섞인 알파와 오메가의 향에 노출된 격이었으니 확실히 불쾌했을 것이다.
어느새 차분해진 목소리로 사영이 입을 열었다.
“먼저 죄송해요. 나름대로 정리하고 온다고 하긴 했는데… 당황하기도 했고 한재우의… 향이… 아직 저한테는… 영향이 커서….”
“…….”
“죄송해요. 기분 나쁘게 해 드려서….”
사영은 최대한 유준이 덜 민망하도록 말을 고르느라 애썼다. 하지만 어떻게 돌려 말해도 결국 그 뜻은 자신이 여전히 한재우의 페로몬에 휘둘린다는 소리밖에 되지 못했다.
난데없이 타인의 페로몬에 노출된 것도 불쾌한데 복수하겠다는 인간이 이런 한심한 상황이기까지 하니 유준의 입장에서는 기가 막힐 법도 했다. 사영은 유준의 침묵을 이해했다.
하지만 한참 만에 입을 연 유준은 사영이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질문을 했다.
“그래서 그 새끼가… 윤사영 씨에게 억지로 무슨 짓을 했습니까?”
“…네?”
“사영 씨를 탓하려고 하는 말이 아니에요. 내 말은… 강제적인, 부당한 일을 겪었냐고… 그걸 묻고 싶은 거예요.”
유준은 아주 명백하게 화가 난 사람처럼 보였지만 사영을 향해 묻는 목소리만큼은 어딘지 모르게 섬세했다. 유준이 화를 내는 대상은 사영이 아니었다.
사영은 그걸 느낄 수 있었고, 그래서 잘 이해가 가지 않았다.
“저는 괜찮은….”
“사영 씨가 괜찮은 거 알겠어요. 근데… 한재우가 사영 씨한테 하면 안 되는 짓을 했습니까?”
“…….”
“두 사람은 이혼했고, 이혼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그 새끼한테는 사영 씨가 거부하는 행동을 억지로 할 권리가 없어요. 내가 뭘 묻고 있는지 알겠어요?”
사영은 유준이 무엇을 묻는지 깨달았다. 하지만 동시에 유준이 왜 자신에게 이런 걸 묻는지 이해할 수 없기도 했다.
한재우가 자신에게 무슨 짓을 했든, 그렇지 않든 그건 유준에게 중요한 일이 아니다. 심지어 사영 그 자신에게도 별로 중요한 일이 아니었다.
사영의 목표는 최후에 한재우를 비참하게 만드는 거고 그걸 위해서라면 지금 겪는 일들 따위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어차피 죽기 전에는 일상처럼 겪어 왔던 일을 이제 와 한두 번 더 겪는다고 달라질 것도 없다. 그래도 자신이 어떻게든 그에게 저항하려 애썼다는 사실 자체가 신기했고, 일견 스스로가 대견스럽기까지 해서 다른 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또다시 낯선 감각이 명치를 따끔하게 찌르고 들어왔다. 자신에게 혹시 부당한 상황을 겪은 건 아닌지, 겪고 있는 건 아닌지 묻는 사람을 처음 마주한 듯한 기분이었다.
어쩌면 실제로 처음이었는지도 모른다. 전생에 사영이 처한 상황을 어렴풋이나마 알고 있던 사람들은 전부 한재우의 사람들이었고 그들 중 그 누구도 사영이 괜찮은지, 당신이 지금 어려운 일을 겪고 있지 않은지 묻지 않았다.
그게 너무 낯설고, 신기하고, 두렵기까지 해서 사영은 멍한 얼굴로 저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그냥… 그냥 특별히 뭘 한 건 아니었어요. 그냥… 조금… 조금 강압적으로 제게 페로몬을 사용했을 뿐이에요.”
“그래선 안 된다는 거, 알고 있죠.”
“…….”
“그것만으로도 이미 그 새끼가 쓰레기 같은 짓을 한 겁니다. 윤사영 씨한테.”
이따금 한재우는 마치 은혜를 베풀듯 페로몬을 쏟아 내며 사영을 안기도 했다.
관계에 대한 결정은 오롯이 재우 한 사람에게만 있어서, 그럴 때면 사영은 자신의 기분이나 몸 상태는 물론이고 잠자리를 가지고 싶은지 아닌지를 따져 볼 의지도 없이 재우를 받아들였다.
너 같은 애랑 자 주는 걸 감사하게 생각하라는 말을 들으면서. 그래도 네가 내 남편이니까 억지로라도 너를 품어 주는 거라는 말을 들으면서.
사영은 몸과 마음이 아파 도저히 그의 품에 안기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는 날에도 이런 자신을 안아 주는 그에게 고마워하며 몸을 열었다.
사영이 갇힌 세상에서는 그게 아무런 잘못도, 죄도 되지 않았다.
“하….”
딱 봐도 어떤 취급을 받으며 살아왔을지 뻔히 보이는 사영의 얼굴을 보던 유준의 입에서 깊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속에서 불길이 치솟는데 이미 달려가 한재우의 턱주가리를 날려 줄 타이밍은 지나 버렸다.
유준은 같잖은 남자 친구 행세를 하려던 것을 그만두고 대신 사영을 조심스럽게 차로 이끌었다.
“죄송해요.”
차에 타고 나서야 사영이 겨우 꺼낸 한마디는 결국 또 사과였다. 유준은 다시 날것의 욕설을 내뱉지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입술을 깨물며 참았다.
말마따나 자신과 사영은 그야말로 비즈니스 관계나 다름이 없는데 여기서 더 화를 내는 건 확실히 과잉 반응이었다. 참아야만 했다.
사영은 고개를 살짝 숙이며 말을 이었다.
“대처를 더 잘해야 했는데… 그럴 수 있을 줄 알았어요….”
“…….”
“드라마 같은 데서 보면 다들 복수도 똑똑하고, 능숙하고, 철저하게 잘하잖아요. 저도 그렇게 하고 싶었는데….”
이른바 ‘각성’이라는 걸 하게 된 주인공은 보는 사람들이 희열을 느끼도록 트라우마를 순식간에 극복하고 속 시원하게 할 일을 했다.
그런데 나 같은 멍청한 사람에게는 죽음으로 인한 각성조차도 충분치 않은 건지.
사영이 자조적으로 웃었다. 그런 사영을 향해 유준이 물었다.
“욕도 못 했어요?”
“네?”
“내가 저번에 욕 가르쳐 줬잖아요. 못 했어요?”
사영을 탓한다고 하기엔 지나치게 가벼운 목소리였다.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린 사영이 유준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놀랍게도 사영을 비웃는 표정은 아니었다.
“요, 욕은….”
“그 좆같은 냄새를 어디다 들이대냐고 하지.”
“어… 그게….”
갑자기 튀어나온 원색적인 단어에 사영이 입을 뻥긋거리며 말을 잇지 못했다. 유준은 지난번 욕할 줄 안다고 했던 사영의 말이 조금 의심스러워졌다. 그때, 사영이 대답했다.
“욕은 못 했지만, 한마디 해 주기는 했어요.”
“어, 정말? 뭐라고 했어요?”
“꼴에 오메가라고 유준 씨 꼬셔서 팔자 고치려는 거냐고 하길래….”
“하길래?”
재촉하듯 말꼬리를 문 유준의 목소리에는 숨길 수 없는 기대감이 서려 있었다. 사영은 다소 민망한 듯 고개를 살짝 숙이며 말을 이었다.
“그거… 한재우 씨 당신 얘기냐고….”
그와 동시에 유준의 입에서 커다란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리고 그 웃음을 고스란히 머금은 채로 유준이 물었다.
“정말? 걔한테 그렇게 말했다고? 윤사영 씨가?”
“…네.”
유준이 너무 웃어 대자 더 민망해진 사영이 허벅지 위에 모으고 있던 두 손을 꼬물거렸다. 유준이 이번에는 ‘와….’ 하고 의미를 알 수 없는 탄성을 흘렸다.
유준의 탄성에 담긴 감정은 진심 어린 감탄이었다. 차라리 사영이 욕을 했다면 이렇게까지 놀라진 않았을 것이다.
유준은 사영이 그 말을 했을 때 한재우의 표정을 보지 못한 게 천추의 한이 될 것 같았다.
이제야 정황이 제대로 보였다. 사영이 저런 말을 했으니 제아무리 자기 포장을 잘하는 사람이라도 평정심을 지키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자신에게 늘 굴종과 일방적인 애정만을 보이던 사람이 난데없이 저런 말을 퍼부었으니 얼마나 충격을 받았을까. 자존심에도 단단히 금이 갔을 테다.
그러니까 병원에서 사영에게 강압적으로 페로몬을 흘려 대는 짓까지 했겠지.
유준은 이제야 모든 것이 이해가 갔다. 그렇다고 해서 그의 반응이 옳았다는 건 절대로 아니었지만 말이다.
사영의 말을 몇 번이나 만족스럽게 곱씹던 유준이 이내 사영을 향해 물었다.
“그 말 할 때, 기분이 어땠어요?”
“네?”
“한재우한테 한 방 날려 줬을 때. 어땠냐고요.”
유준의 질문에 사영은 잠시 입을 다물고 생각에 잠겼다가 다시 말했다.
“솔직히 내가 무슨 말을 한 건지 잘 실감이 안 나기도 했고… 신기하기도 했고….”
“네.”
“그리고… 음, 조금 통쾌하기도 했던 것 같아요.”
사영은 그렇게 차근차근 자신이 느꼈던 감정을 곱씹어 보았다. 그러자 새삼 자신이 얼마나 대단한 한 걸음을 내디딘 건지 실감이 들었다. 막연하기만 했던 기분이 비로소 선명해졌다.
그리고 사영에게 그 감정을 곱씹을 시간을 주며 차에 시동을 건 유준이 출발하기 전 아주 작은 목소리로 혼잣말을 하듯 말을 뱉었다.
“…잘했어요.”
사영이 놀라 유준을 쳐다봤다. 유준은 아무 말도 한 적이 없다는 듯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
“이해가 안 가….”
운전하던 은성은 등 뒤에서 들린 서늘한 음성에 어깨를 크게 움찔하며 ‘네?’하고 대답했다. 재우는 은성의 반응에 아랑곳하지 않고 여전히 혼자만의 생각에 잠겨 있었다.
애초에 은성에게 진짜로 답을 물은 건 아닌 모양이었다.
은성은 혹시나 거슬리는 소리를 낼까 봐 숨조차 조심스럽게 내쉬었다. 병원에서 사영과 무슨 대화를 나누었는지는 모르겠지만 한재우는 지금 머리끝까지 화가 올라 있었다.
소리를 지르거나 욕을 하지 않는 지금과 같은 상태가 오히려 더 위험한 상태라는 걸 은성은 오랜 경험으로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제발 불똥이 제게 튀는 일이 없길 바라며 은성은 운전에 집중했다. 혹시나 급정거라도 하면 큰일이었다.
“말이 안 되는데….”
은성에게는 다행스럽게도, 재우에게 지금 최은성의 존재는 안중에도 없었다. 재우는 아까부터 오로지 윤사영 하나만을 생각하는 중이었다.
오늘 사영이 제게 보인, 기가 막힐 정도로 낯설고 짜증 나는 태도에 대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