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2
서단우.
유준은 대본에 적힌 그 이름 석 자를 노려보고 있었다. 대본 분석을 하고 있는데 저 이름이 자꾸만 눈에 걸려 진도가 나가질 않았다.
「저하, 정국을 냉정하게 보시옵소서. 저는 중요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러려고 한 것도 아닌데, 지금 유준의 앞에서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담담하게 말하는 서단우는 사영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정말로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인 건 윤사영의 외형을 한 서단우가 막연한 이미지만 잡혀 있을 때보다 훨씬 더 임팩트 있고 매력적으로 느껴진다는 사실이었다.
유준은 대본을 넘기며 서단우의 대사만 집중적으로 읽어 내려갔다. 그를 떠올리려 별다른 노력을 하지 않아도 모든 대사는 어느새 사영이 읽고 있었다.
「그대가 중요하지 않으면 무엇을 중히 여겨야 하지?」
「나라와 백성과 종묘와 사직 전부를. 저보다 귀하고 중하게 여기셔야 합니다.」
강직하고 고고하면서 아름다운 사내로 소개되는 서단우에 사영의 외모를 입히자 완벽하게 어우러졌다. 화룡점정이 따로 없었다.
대본을 든 손끝에서 열기가 이는 것 같았다. 명백한 흥분이었다. 유준은 어렵지 않게 그것이 배역과 딱 맞는 배우를 만났을 때 느낄 수 있는 희열이라는 걸 알아챘다.
유준은 캐스팅 과정에서 이미 감독과 여러 차례 시나리오와 캐릭터에 관한 심도 있는 대화를 나눴다. 그렇기에 지금 감독이 가진 서단우에 대한 이미지와 유준이 가진 이미지는 그다지 차이가 없었다.
다시 말해, 유준이 이렇게까지 윤사영의 서단우가 마음에 든다면 감독의 눈에도 크게 다르지 않을 거란 말이었다.
문제는 사영이 여전히 전성기 때의 연기력을 유지하고 있을 것인가 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감독에게 윤사영의 이름에 따라올 수많은 추문을 비롯한 연기 외적인 문제를 감당할 의지가 있을 것인가였다. 이것까지는 유준이 짐작할 수 없는 영역이다.
사영이 처음 서단우 역을 노린다는 걸 알았을 때 유준이 좋은 작품에 오점이 되지 않을까 못마땅해했던 것처럼 감독 역시 똑같은 판단을 내릴 수 있었다.
그렇기에 사영의 연기가 더더욱 중요했다. 그의 연기력이 다른 지원자들과 비교해 압도적으로 월등해야만 승산이 있었다.
유준은 심각한 표정을 한 채로 이어지는 서단우의 대사를 한참 동안 훑어보았다.
사영이 과연 그만한 연기력을 보여 줄 수 있을까. 사영은 과연 연기에 얼마만큼 진심이었고, 일을 쉬면서도 얼마만큼의 노력을 기울였을까.
자꾸만 서단우 역에 사영의 모습을 끼워 넣던 유준은 이내 고개를 저으며 기대를 털어 내려 애썼다. 솔직히 말해서 그깟 사랑 때문에 연기를 그만두었던 사영이 지금껏 노력해 왔을 리가 없질 않은가.
조용한 거실에 유준이 혀 차는 소리가 흘렀다. 이래서 유준은 윤사영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
서단우 역 캐스팅 오디션을 앞두고 연예계가 온통 들썩였다. 영화 <하지>에 김유준과 한재우가 함께 출연할 거라는 소식이 공개된 것이다.
정명철 감독이 오랜만에 메가폰을 잡은 영화라는 것만으로도 모두의 이목을 단번에 끌었는데 거기에 대한민국 연예계를 쥐고 흔든다고 봐도 무방한 김유준이 주인공이다. 이보다 더 완벽한 조합은 있을 수가 없었다.
그뿐만 아니라 비중 높은 라이벌 역에는 아직 김유준에게 비할 정도는 되지 못하지만 전 연령대에 걸쳐 광범위하게 탄탄한 지지와 호감을 획득했을 뿐만 아니라 강력한 팬덤까지 보유한 한재우가 캐스팅되었다니.
기사가 뜨자마자 온갖 커뮤니티와 SNS가 전부 뒤집혀 난리가 났다.
그 관심이 서단우 역 캐스팅 오디션으로 향하게 된 건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오디션 신청 마감일까지는 아직 시간이 있었다.
정명철 감독의 이름만으로도 그의 영화에 출연하고 싶어 줄을 서는 배우들이 한 트럭이다. 꼭 신인에 국한되지도 않았다.
심지어 서단우는 주인공인 김유준과 대놓고 질척하게 엮이는 역이다. 서단우 역을 향한 배우들의 열망이 얼마나 뜨거워졌을지는 굳이 말로 표현할 필요도 없을 정도였다.
대놓고 오디션을 보라고 하면 자존심 상해 할 배우들도 이번만큼은 나서서 오디션에 참여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하루가 멀다 하고 영화 <하지> 소식이 전해졌다. 별다르게 새로울 것도 없이, 알려진 이야기에서 조금씩 문장들만 바꾼 내용이어도 대중의 관심을 반영하듯 조회수는 매번 어마어마하게 높아졌다.
과연 서단우 역을 누가 차지할 것인지를 예측하는 기사들도 넘쳐났다.
커뮤니티에서는 공개된 서단우의 캐릭터 설명을 이용하여 자신이 좋아하는 배우가 얼마나 잘 어울리는지를 알리려는 배우 팬들의 노력이 이어졌다.
기세를 잡기 위해 소속 배우가 오디션에 참가한다는 둥, 벌써 대중들의 높은 기대와 지지를 받고 있다는 둥 언론 플레이를 하는 회사도 적지 않았다.
유준은 소속사를 통해 서단우 역으로 <하지>에서 함께하게 될 배우를 마찬가지로 몹시 기대하고 있으며 어떤 배우가 함께하더라도 최선을 다해 좋은 작품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겠다, 정도의 공식 의견을 끝으로 그와 관련한 어떠한 이야기도 하지 않았다.
그 와중에 한재우는 자신이 꼭 함께하고 싶었던 배우는 김유준이고 그 꿈이 이루어진 이상 더 바라는 건 없다고 인터뷰를 해 두 사람의 조합에 더욱 관심이 쏠리도록 유도했다.
유준은 그 인터뷰에 신경 쓰지 않았지만 이슈가 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렇게 소란스러운 날들이 폭풍처럼 지나고, 어느새 많은 이들의 귀추가 주목되는 오디션 날이 밝았다.
***
정 감독의 명성에 맞게 그의 팀은 전부 최고의 스태프들로 채워졌다. 조연출을 비롯해 카메라 감독은 물론이고 현장에서 발로 뛸 막내까지 경험이 부족한 사람이 없었다.
연예인 실물을 보았다고 속으로라도 호들갑을 떨 사람은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는 말이었다.
하지만 유준이 오디션 장소에 등장했을 때 현장에는 아주 미미한 공기의 울림이 있었다. 다들 프로답게 겉으로 내색하진 않았지만 짧게 멈칫거리는 손과 흔들리는 눈동자는 베테랑인 그들에게는 최고의 동요였다.
대한민국 최고의 배우니 가장 높은 몸값을 가진 연예인이니 뭐니 하는 수식어도 분명 영향을 주었겠지만 그보다는 사람 자체가 가진, 흔히들 ‘아우라’라고 표현하는 독보적인 기운 탓이 더 컸다.
유준은 존재 그 자체만으로도 현장을 압도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배우였다.
“안녕하세요, 유준 씨. 오셨어요?”
“안녕하세요. 김유준입니다. 고생 많으시네요.”
현장을 통솔하던 조연출이 유준이 왔다는 소리를 듣고는 한달음에 달려왔다가 유준의 정중한 인사에 활짝 미소를 지었다.
갑자기 오디션 현장에 유준이 온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는 부담스럽기도 하고, 대배우랍시고 억지 부리며 문제를 일으키는 건 아닌가 걱정이 앞섰는데 첫인상이 제법 좋았다.
그간 영화판에서 구르며 별별 인간 군상들을 보아 온 조연출은 사람에 대한 감이 꽤 정확한 편이었다.
대중적으로 좋은 이미지를 가지고 있어도 현장에서는 완전 정반대의 모습을 보여 주는 배우들 역시 수도 없이 봤다.
조연출은 이제 첫인사만으로도 어느 정도 그런 배우들을 감별해 낼 수 있었다. 백 퍼센트 정확하게 맞는 건 아니었어도 열에 여덟은 맞출 정도였다.
그런 의미에서 정중하면서도 담백한 유준의 첫인사는 조연출을 아주 조금 안심하게 했다.
조연출은 안쪽으로 몸을 살짝 틀고선 유준을 안내했다.
“이쪽으로 오시겠어요? 감독님은 먼저 와 계세요.”
“네.”
유준은 짧게 대답 후 그를 따라 걸었다. 스치는 사람마다 눈동자를 반짝이며 자신을 바라보는 일은 이미 익숙했다.
그때, 슬쩍 걸음을 멈춰 유준과의 거리를 좁힌 조연출이 작은 목소리로 말을 건네 왔다.
“그런데 혹시… 오늘 오디션에 누구누구 들어오는지 들으셨어요?”
유준은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네?’하고 되물었다. 조연출의 목소리는 어딘지 모르게 의뭉스러운 데가 있었다. 십중팔구 뭔가 사건이 벌어지고 있을 때 들을 수 있는 톤이었다.
조연출은 가볍게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했다.
“아니, 유준 씨도 갑자기 오디션 참관한다고 하고 그래서… 뭔가 따로 말을 맞추신 건가 했죠.”
그와 동시에 유준의 등줄기를 타고 소름이 돋았다. 조연출이 왜 이런 말을 하는지 그 이유를 짐작했기 때문이다.
“우선 가서 보시죠. 모르셨으면 가서 인사하면 되니까….”
“…네.”
유준은 자신의 불안한 예감을 굳이 확인받지 않고 우선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팔 할 정도의 확신은 가지고 있었다.
준비된 오디션장으로 걸음을 마저 옮기며 유준은 괜히 제 옷자락을 만지작거렸다.
캐주얼한 스타일이긴 했지만 그래도 슈트 풍의 옷을 입고 온 게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디서부터 기인한 것인지 알 수 없는 애매한 경쟁심이 서서히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한재우가 아무리 날고 긴들 김유준에게는 비비지도 못하리라는 건 누구나 아는 사실이었다.
한때 어디서 여론몰이라도 하듯이 ‘김유준 독주 체제 막는 한재우’ 따위의 기사가 쏟아져 나오던 때가 있었으나 거세게 역풍을 맞은 후론 시도도 하지 않는 실정이었다.
모르긴 몰라도 그런 경쟁 구도 노선이 지속됐다면 한재우가 지금처럼 대중적인 호감을 사지는 못했을 것이다.
김유준과 한재우의 차이는 그 정도였다. 유준은 단 한 번도 그에게 경쟁심은커녕 위기감도 느껴 본 일이 없었다.
그런데 지금. 다른 사람도 아닌 김유준이. 어쩌면 이 오디션장에 한재우가 와 있을지도 모른다는 추측만으로도 제 옷매무새를 신경 쓰는 것이다.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