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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수하는 회귀자를 사랑하는 법-50화 (50/193)

#050

사영은 갑자기 들리는 휴대폰 진동 소리에 깜짝 놀라 잠에서 깬 것처럼 몸을 크게 들썩였다. 잠이 들었던 건 아니다. 다만 아주 깊은 생각에 빠져 있었을 뿐이었다.

오디션을 마치고 곧장 집으로 돌아온 사영은 욕조에 뜨거운 물을 받아 놓고 한참을 그 안에 들어가 있었다. 잔뜩 긴장해 딱딱하게 굳은 몸을 풀어 주는 데에는 그만한 게 없었다.

하지만 안 그래도 지친 몸으로 너무 오랫동안 물속에 들어가 있었더니 욕실 밖으로 나왔을 때에는 온몸에 힘이 하나도 없었다.

밥을 먹어야 했지만 도통 입맛이 없었다. 고체로 된 음식을 목으로 넘기면 그대로 다 토해 낼 것만 같았다. 결국 사영은 우유를 따뜻하게 데워 억지로 몇 모금 마신 뒤 습관처럼 페로몬 안정제를 먹고 소파에 앉았다.

이제는 굳이 약을 먹을 필요가 없다는 걸 알았지만 오랫동안 사영을 지배했던 강박은 하루아침에 벗어 버릴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재우의 앞에 서면 여전히 몸이 굳고 심장이 뛰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때가 되면 약을 입에 털어 넣어야 안정이 되고 머리가 제대로 굴러갔다.

그런 뒤에는 소파에 앉아 깊어지는 창밖의 어둠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다지 늦은 시간인 것도 아닌데 겨울 해는 하루하루 짧아져만 갔다.

복잡하고 요란한 도심으로부터 떨어진 공간에서 본 세상은 한없이 고요했다. 사영은 자신이 조금 전까지 그토록 치열한 세상의 한가운데에 있었다는 걸 믿을 수가 없었다.

겨울밤의 이 정적이 좋기도 했고, 슬프기도 했다.

사영은 적막에 지나치게 익숙한 사람이었다. 재우가 사영을 홀로 내버려 둔 시간 동안 사영이 벗으로 삼을 만한 건 오로지 적막함뿐이었고, 그렇기에 사영은 지금의 정적에서 느끼는 익숙함과 안정감이 슬펐다.

그렇게 깊어지는 감정 속에서 얼마나 있었을까. 사영은 무거운 공기를 요란하게 찢는 진동 소리에 이제야 정신을 차린 것이다.

잠깐은 갑자기 늪 밖으로 끌려 나온 사람처럼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휴대폰이 울리는 일 자체도 워낙에 익숙하지 않다 보니 소음의 근원이 어딘지 알아차리는 것도 늦었다.

한참 만에 사영이 휴대폰을 찾아 손에 쥐었을 때는 이미 진동이 멈춘 상태였다.

화면에 찍힌 부재중 전화의 주인은 유준이었다. 사영은 아직 다 마르지 않은 머리카락을 손으로 쓸어 넘기곤 고민에 빠졌다.

먼저 전화해야 하나. 아니면 다시 전화가 올 때까지 기다려야 하나. 결정을 내리기가 어려웠다.

유준이 부담스럽거나 어려워서가 아니라 타인과 개인적으로 연락을 주고받은 게 너무 오래전이라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르는 데에 가까웠다.

고작 전화 한 통이 이렇게 대처하기 어려울 일인가 싶어 자조적인 웃음이 났다. 연락처 빼곡히 친구들의 이름이 채워져 있던 어린 시절의 윤사영과 지금의 윤사영은 이제 다른 사람이었다.

「왜 전화 안 받아요?」

그때, 손에 들린 휴대폰이 다시 한번 짧게 진동했다. 메시지였고, 이번에도 상대는 유준이다. 사영은 답을 하기 위해 두 손으로 휴대폰을 쥐었다. 그새 메시지가 또 하나 도착했다.

「전화 좀 잘 받지?」

창을 보고 있었기에 사영이 메시지를 읽었다는 건 금방 표가 났다. 사영은 서둘러 텍스트 창을 열어 답을 적기 시작했다. 하지만 휴대폰은 또다시 진동했다. 전화였고, 여전히 김유준이었다.

사영이 서둘러 통화 버튼을 누르고 휴대폰을 귀에 가져가 댔다.

“여보세….”

- 전화 왜 피합니까?

유준은 인사도 없이 다짜고짜 따져 물었다. 당황한 사영은 소파에 다시 앉지도 못하고 어정쩡하게 서서 대답했다.

“피한 게 아니라….”

- 휴대폰 보고 있으면서 안 받았잖아요.

“그게 아니라 제가 다른….”

- 내가 전화하면 무조건 놓치지 말고 받아요. 내가 윤사영 씨를 도와주는데 내 연락 무시하면 됩니까?

“아니, 유준 씨. 무시한 게 아니….”

- 됐고, 일단 문 좀 열어요.

통화의 시작부터 내내 제 할 말만 해 댄 유준은 끝끝내 사영의 말 한마디를 제대로 듣지 않았다. 사영은 계속 해명하려 했지만 마지막 말 때문에 그마저도 막혔다.

사영은 반사적으로 현관 쪽을 돌아보며 되물었다.

“문이요…?”

- 네. 문이요.

“문은 왜….”

- 왜겠습니까?

유준의 질문에 사영이 설마, 하는 심정으로 천천히 현관을 향해 다가갔다. 통화 내용으로 유추하자면 유준은 지금 사영의 집 앞에 와 있는 게 분명했다. 하지만 유준은 사영을 찾아올 이유가 없었다.

추론의 간극에 혼란스러워하며, 사영이 조심스럽게 현관문을 열었다.

“유준 씨…?”

열린 문 앞에는 유준이 있었다.

***

“유준 씨가 여긴 왜….”

놀란 사영은 휴대폰을 여전히 귀에 댄 채로 말했다. 유준 역시 통화를 끊지 않은 채 대답했다.

“내가 못 올 곳 왔어요?”

엉킨 목소리가 잡음처럼 윙윙거리며 두 사람 사이를 울렸다. 사영이 멍한 얼굴로 웅얼거렸다.

“아니, 그게….”

“그래서, 전화 왜 안 받았어요?”

유준이 먼저 통화를 종료하며 물었다. 그러면서 그는 자연스럽게 사영을 지나쳐 집 안으로 들어왔다.

사영은 그제야 마찬가지로 귀에 댔던 휴대폰을 내리고 유준의 뒤를 따라 걸으며 대답했다.

“안 받은 게 아니고 잠깐 딴생각하다가… 받으려니까 끊어진 거예요.”

“그래요? 일부러 안 받은 건 진짜 아니고?”

“네. 진짜 아니에요.”

거듭 사영의 대답을 듣고 나서야 유준은 마음속으로 정체를 알 수 없는 안도감을 느끼며 뒤를 돌아 저를 졸졸 쫓아오는 중이던 사영을 쳐다보았다.

유준이 모든 말과 행동이 멈춘 건 바로 그 순간이었다. 유준의 시선만이 유일하게 움직이며 사영의 머리끝부터 아래로 서서히 내려갔다.

방금 샤워했는지 아직 다 마르지 않은 촉촉한 머리카락이나 새하얀 뺨도 그렇지만 그보다 더 큰 문제는 사영이 입은 샤워 가운이었다.

집에서 편하게 있던 탓에 가운을 제대로 여미지도 않아 도드라진 쇄골이 그대로 보였다. 거기에 시선이 닿음과 동시에 명치 안쪽에서부터 거대한 불덩이가 거세게 일었다. 그 감각에 경악할 정도로 당황한 건 바로 유준 그 자신이었다.

“유준 씨?”

반사적으로 한 걸음 물러서자 사영이 의아한 표정으로 유준을 불렀다. 사영은 정말로 유준이 왜 이러는지 짐작조차 하지 못한 눈빛을 하고 있었는데 그 점이 유준을 더더욱 수치스럽게 만들었다.

사영은 지금 자신이 샤워 가운을 입는 게 유준에게 특별한 영향을 끼칠 거란 생각을 아예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야말로 유준 혼자 유난을 떨고 있는 중이다.

유준은 혹시나 해 그가 페로몬을 흘리고 있진 않은지 신경을 곤두세웠지만 사영에게서는 은은한 비누 향만 날 뿐 그 외의 어떠한 향도 느낄 수 없었다.

“괜찮으세요?”

“손님을 대하는 꼴이 그게 뭐예요?”

유준이 말이 없자 좀 더 진지하게 걱정스러운 얼굴로 한 걸음 다가서던 사영에게 유준이 짜증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사영은 그제야 고개를 숙여 제 모습을 확인하곤 ‘아….’ 하고 짧은 탄성을 흘렸다. 하지만 제 꼴을 보고서도 사영은 당황한 기색 하나 없이 담담하게 말했다.

“막 목욕하고 나온 터라… 죄송해요. 얼른 갈아입고 올게요.”

“빨리 가요.”

유준은 사영의 속살을 보는 일 따위 딱 질색이라는 듯 손을 휘휘 저으며 대답했다. 곧 사영이 옷을 갈아입기 위해 방으로 들어갔다.

“하아….”

혼자가 된 거실에 유준의 깊은 한숨이 내려앉았다. 도대체 사영 앞에만 있으면 왜 이렇게 자꾸 뜻대로 흘러가는 게 없고 일이 꼬이는지 모를 일이다.

자꾸만 멍청하게 구는 자신만큼이나 사영의 태도도 못마땅하긴 매한가지였다. 그는 제 모습이 타인에게 어떻게 비치는지 전혀 모르는 것 같았다.

그가 스스로 자신을 보잘것없는, 하찮은, 매력적이지 못한 존재로 여긴다는 걸 몰랐던 건 아니지만 오메가가 알파 앞에서 가운 차림을 하고서도 저토록 무방비하게 구는 꼴을 보니 부아가 치밀지 않을 수 없었다.

“한재우 개쓰레기 새끼 진짜….”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오늘 그 자리에서 면상에 주먹을 날려 주지 못한 게 한스러웠다. 심지어 앞으로 그 꼴을 마주하며 연기를 해야 하는 것도 모자라 한재우를 ‘유혹’까지 해야 할 판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사영과 한 계약은 제게는 이득일 게 하나도 없었다.

언제든 내키지 않으면 그만둘 수 있다는 전제를 두었다고 해도 이렇게까지 말도 안 되는 도움을 주겠다고 한 게 이해가 가질 않았다. 도대체 과거의 자신은 무슨 생각이었던 걸까.

“기다리게 해서 죄송해요.”

그때, 옷을 갈아입은 사영이 거실로 나왔다. 가벼운 면 소재의 티는 목 부분이 넓은 라운드로 패여 사영의 가느다란 목과 도드라진 쇄골을 돋보이게 했다. 그게 잘 어울려서 유준은 또 짜증이 났다.

“마실 거라도 드릴까요?”

남의 속도 모르고 사영은 참으로 태연하고도 평범하게 물었다.

유준은 머릿속에 폭풍이 몰아치고 있는데. 한재우한테 화가 나고 윤사영에게는 짜증이 나고 저 자신은 한심하기만 해서 정말이지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인데.

정작 이 모든 일의 원인인 그는 한다는 말이 ‘마실 거라도 드릴까요.’라니 어이가 없었다.

“윤사영 씨.”

그래서 유준은 위협적으로 사영에게 한 걸음 다가가며 날카로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유준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은 걸 느낀 사영이 대답 없이 시선을 들어 유준과 눈을 마주쳤다. 유준이 말했다.

“윤사영 씨는 뭘 믿고 서단우 역을 따겠다고 한 겁니까?”

“…네?”

“서단우 역은 성격도 매력적이지만 첫눈에 보기에도 시선을 사로잡는 미인이라는 설정이죠. 아닙니까?”

“네. 맞아요.”

“그런데 윤사영 씨는 윤사영 씨를 매력적인 사람이라고 생각 안 하잖아요.”

이어진 유준의 말에 사영이 눈을 한번 깜빡였다. 유준은 기다랗고 풍성하게 뻗어 내린 사영의 속눈썹이 떨리는 모양을 집요하게 내려다보았다.

태연한 표정과 떨리는 눈매, 둘 중 하나는 진실이고 하나는 거짓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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