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복수하는 회귀자를 사랑하는 법-56화 (56/193)

#056

침대에 엎드린 채로 한참을 널브러져 있던 유준이 이번에는 몸을 뒤집어 똑바로 누워서 천장을 바라보았다.

통화를 했으면 한 거지 왜 이렇게까지 심신이 지치는지 모를 일이었다. 길게 이야기를 나눈 것도 아닌데 말이다.

한참 멍하니 누워 있던 유준은 손을 들어 심장께를 손바닥으로 가만히 눌러 보았다. 쿵, 쿵 하고 심장을 밀어 올리는 박동이 확실히 평소와는 달랐다.

“참나. 이거 스톡홀름 신드롬 뭐 그런 거 아니야?”

그 박동에 대단한 의미를 부여하고 싶지 않아서 유준은 애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중얼거렸다.

아마도 자신은 생각보다 타인에게 연민을 깊이 느끼는 가슴 따뜻한 남자였던 모양이다. 유준은 거기에서 생각을 멈추며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약속 시간까지는 아직 시간이 한참 남았지만 무얼 입고 나가면 좋을지 미리 골라 놓고 싶었다. 딱히 그 시간을 기다린다거나 하는 건 아니고, 유준은 원래 뭐든지 미리미리 준비하는 스타일이었다.

***

“감사합니다.”

사영은 와인을 따라 주는 종업원에게 인사를 건넸다. 종업원은 그런 사영에게 미소와 함께 말했다.

“더 필요한 게 있으시면 언제든 말씀해 주십시오.”

“네.”

사영의 대답에 종업원은 여전히 부드러운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숙였다. 속에서야 도대체 두 사람이 어째서 여기 같이 있는 건지 궁금증이 일었어도 티를 낼 순 없었다.

유준은 단골이라 얼굴을 보는 게 제법 익숙해졌지만 윤사영의 경우에는 그렇지 않았다. 처음 유준과 함께 안으로 들어오는 사영을 보았을 때는 너무 놀라 심장이 다 두근거렸다.

하지만 아무리 그들의 대화가 궁금해도 옆에서 괜히 시간을 끌 수는 없었기에 종업원은 깔끔한 몸짓으로 테이블에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다시 두 사람만 남은 공간에서 사영은 다소 긴장한 것처럼 두 손을 무릎 위에 모은 채 주변을 둘러보았다.

완벽히 밀폐된 공간은 아니었지만 다른 테이블과 멀찍이 떨어진 데다가 파티션으로 사방이 막혀 있어서 다른 손님들은 보이지 않았다.

외따로 떨어진 공간의 느낌 때문인지 왠지 모를 긴장감이 들었다.

“술 잘 마셔요?”

그때, 사영의 주의를 환기하며 유준이 물었다. 사영은 고개를 돌려 유준과 다시 시선을 맞추며 대답했다.

“한두 잔 정도는 괜찮아요.”

“마시는 거 좋아해요?”

“음… 전에는 웬만하면 잘 안 마시려고 했어요.”

“왜?”

유준의 물음에 대답하면서도 사영은 어색한 느낌에 자꾸만 눈동자를 굴렸다. 누군가가 자신의 사적인 이야기를 들어 주는 건 사영에겐 익숙하지 않은 일이었다. 사영은 침착하게 말을 이었다.

“그냥… 술에 의지하면 안 될 것 같았거든요.”

“…잘 생각했네요.”

사영의 대답에 순간 울컥한 유준은 침을 한 번 삼키는 걸로 감정을 억누르고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 사영의 과거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고작 사랑이라는 감정 하나 때문에 자기 인생을 그토록 망쳐 버린 게 이해가 가지 않고 한심하게 보이기까지 했다.

하지만 사영과 함께하는 시간이 쌓이면 쌓일수록, 지금과 같은 이야기를 들으면 들을수록 어쩌면 그 또한 나름대로 제 삶을 지키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해 왔던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유준이 저도 모르게 깊은 상념으로 빠져들려 할 때쯤, 이번에는 사영이 먼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무슨 일로 저녁을 먹자고 하신 건지….”

사영은 유준이 집으로 자신을 데리러 왔을 때부터, 아니 사실은 유준의 전화를 받았을 때부터 내도록 이유가 궁금해 견디기가 힘들었다.

차를 타고 오면서도 계속 물어 보고 싶었지만 혹시나 안 좋은 소식일까 봐 걱정돼 쉽게 입이 떨어지질 않았다.

“우선 한잔 마셔요.”

유준은 답을 하는 대신 잔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사실 유준은 차를 가져왔기 때문에 술을 마실 생각이 없었지만 축하하는 자리였으니 와인이 있었으면 했다.

쓸데없는 구색이라고 할 수도 있겠으나 여기까지 온 이상 조금 더 극적인 연출을 하고 싶었다.

사영은 와인이고 뭐고 대답부터 듣고 싶은 얼굴이었지만 유준은 모른 척 싱긋 웃기만 했다.

결국 사영이 어쩔 수 없이 잔을 들었을 때, 유준은 사영의 잔에 제 것을 살짝 부딪치며 벼르고 벼르던 말을 뱉었다.

“축하합니다, 윤사영 씨.”

“……?”

“서단우, 윤사영 씨가 하게 됐어요.”

말을 마친 유준은 사영의 표정을 단 하나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 뚫어져라 그를 응시했다.

사영은 잔을 든 그대로 눈만 깜빡였다. 자신이 무슨 말을 들은 건지 확신하지 못하는 얼굴이었다. 바로 그런 반응이 좋아서, 유준은 느긋하게 사영을 감상했다.

“뭐, 무슨….”

“다시 말해 줘요? 윤사영 씨가 서단우 역 따냈다고요. 결국 같이 일하게 됐네요.”

“아… 그… 저는 연락 받은 게 없는데….”

사영은 건배까지 한 잔을 그대로 내려놓더니 허둥지둥하며 품에서 휴대폰을 찾아 꺼냈다.

유준은 마찬가지로 잔을 그대로 내려놓은 채 사영의 행동을 그냥 지켜봤다. 아직 사영이 기뻐하는 모습을 보여 준 것도 아닌데 막연히 상상했던 것보다 더 기분이 좋았다.

혹시 확인하지 못한 메시지나 받지 못한 전화가 있었던 건 아닌가 꼼꼼히 휴대폰을 살펴본 사영은 결국 아무 흔적도 발견하지 못하고 다시 의문 가득한 눈동자로 유준을 보았다.

유준이 자연스럽게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

“내가 제일 중요한 배우라서 그런가? 감독님이 나한테 먼저 연락을 주셨더라고요.”

“…….”

“윤사영을 캐스팅하고 싶은데, 괜찮겠냐고.”

사영이 눈을 빠르게 깜빡이기 시작했다. 조금씩 이 상황을 실감하는 모양이다. 유준이 말을 이었다.

“뭐… 어쨌든 도와주기로 한 거 뭐 어쩌겠어. 나는 상관없다고 했죠.”

“진짜… 그럼 정말….”

“네. 그래서 결국, 윤사영 씨가 합류하기로 했어요. 굳이 일을 더 늘릴 필요가 있나 싶어서 내가 직접 전해 주겠다고 한 거고요.”

“아… 아….”

유준은 굳이 캐스팅이 확정되기 전부터 감독에게 제게 먼저 알려 달라고 부탁했던 사실이나, 그 이유에 대해서는 떠들지 않았다. 어차피 중요한 부분도 아니니 사영이 다 알 필요는 없었다.

꼭 어디가 아픈 사람처럼 애매한 탄성을 내던 사영은 허벅지 위에 올려 두었던 냅킨을 두 손으로 꽉 쥐었다.

심장이 너무 빠르게 뛰어서 순간적으로 앞이 흐려지기까지 했다. 속이 메스꺼운 것 같기도 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사영은 반사적으로 유준에게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꺼냈다. 사영의 캐스팅을 결정한 사람은 감독일지라도 만약 유준이 적극적으로 반대했다면 이루어지기 어려웠을 일이었다.

심지어 감독이 그의 의견을 묻기까지 했다질 않나. 사영은 감독의 의견에 반대하지 않은 유준에게 진심으로 고마웠다.

“고마워요, 정말… 정말 제가 잘… 잘할게요.”

이 성과는 사영의 복수에 있어 가장 중요한 단계였다. 기쁜 게 당연했다. 하지만 사영은 지금 자신이 느끼는 기쁨이 그것보다 조금 더 근본적인 이유를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한재우에게 제대로 복수할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보다 지금 사영을 더 행복하게 하는 건 드디어 연기를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사실이었다.

이 순간이 되고 나서야 사영은 자신이 스스로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연기를 많이 그리워하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사영은 사실 재우에게 복수하고 싶은 마음만큼이나 연기를 다시 하고 싶었던 모양이었다.

그리고 코앞에서 사영의 반응을 지켜보던 유준은 어느새 ‘느긋하게’ 감상하자던 마음가짐을 잃고 말았다.

눈물까지 글썽이며 사실은 크게 도와준 것도 없는 자신에게 연신 고맙다고 고개를 숙이는 사영을 보자 더 이상 혼자 여유를 부릴 수가 없었다.

“사영 씨.”

뭐에 홀린 사람처럼, 불현듯 유준이 입을 열었다. 사영은 대답도 못 하고 촉촉해진 눈동자로 유준을 바라보기만 했다. 유준이 말을 이었다.

“그날 오디션에서… 서단우 역을 가장 잘 연기해 낸 건 단연코 윤사영 씨였습니다.”

“…….”

“이번 작품은 내가 정말로 애정을 품고 있고 또 기대하는 작품이에요. 아무리 돕기로 했다고 하더라도 사영 씨가 내 영화에 적합한 능력을 보여 주지 못했다면 나는 절대로 이 캐스팅을 환영하지 못했을 거예요.”

냅킨을 꽉 쥔 채로 테이블 위에 올라온 사영의 두 손이 덜덜 떨리는 게 눈으로도 보일 정도였다.

잡아 주고 싶었다. 손뿐만이 아니라 떨리는 어깨를 감싸 안고 다독여 주고 싶었다. 유준은 그 감정을 모른 척한 채로 말을 이었다.

“그랬다면 애초에 감독님이 사영 씨를 선택하지도 않았을 거고요.”

“아….”

“사영 씨가 합류하면 필연적으로 따라올 소문이나 소란들을 감수할 가치가 있을 정도로 사영 씨가 잘했다는 뜻이에요. 감독님뿐만 아니라 나도 그렇게 생각했어요. 오디션이 끝나자마자, 이 역은 윤사영 씨가 아니면 안 되겠다고.”

결국 사영의 눈에서 눈물 한 방울이 톡, 하고 떨어졌다.

유준이 당황하기도 전에 사영이 오히려 더 화들짝 놀라며 손을 들어 눈가를 훔쳤다. 이렇게 눈물을 터트릴 거라고는 자기도 예상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유준의 가슴 안에서 더없이 만족스러운 감정이 피어올랐다. 사영은 명백하게 기쁘고 행복해 보였다. 유준은 아주 정확히 이런 장면을 상상하며 이 자리를 마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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