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2
윤사영의 이유는 여전히 한재우다. 한재우의 사랑을 얻고 싶어서. 지난 모든 날에 그랬던 것처럼 사영은 지금도 그깟 사랑 때문에 이토록 절박했다.
어울리지도 않게 김유준에게 접근하고, 어울리지도 않는 도전을 하며 결국 영화에까지 참여한 이유가 전부, 처음부터 끝까지 오롯이 자신 때문이었다.
와인을 한 모금 마신 재우의 입꼬리가 부드럽게 호선을 그리며 올라갔다. 윤사영으로부터 비롯된 짜릿함이 아직도 남아 있었다.
사영이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었을 때는 화가 나긴커녕 왜 그렇게까지 사영을 지겨워했는지 순간적으로 기억나지도 않았다.
만약 사영이 결혼생활을 이어 가는 동안 제게 순종하지 않고 지금처럼 눈에 뻔히 보이는 발악이라도 했었더라면 그에 대한 감정이 조금이라도 달라졌을까.
알 수 없는 일이지만 재우는 굳이 그 가정을 깊이 파고들지 않았다. 어차피 그 시절의 사영에겐 허락할 수 없었던 태도였다.
“앞으로 잘 즐기면 되지.”
재우는 코끝에 맴도는 와인 향을 음미하며 중얼거렸다.
애초에 재우는 유준과 함께 연기하는 걸 기대하며 이 영화에 참여했다. 그러나 지금은 사영이 과연 제 앞에서 어떤 모습을 더 보여 줄지가 새로운 기대로 다가왔다.
입가에 미소가 끊이질 않았다. 빨리 촬영장으로 달려가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며 재우는 하루를 마무리했다.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만족스러운 하루였다.
***
“하, 씨발….”
유준은 거의 머리를 쥐어뜯다시피 하며 욕설을 내뱉었다. 아닌 밤중에 홍두깨라더니 이게 다 무슨 일인가 싶다.
처음 시작은 분명 이해가 갈 만한 수준이었는데 왜 이렇게까지 일이 커진 건지 아무리 머리를 굴려 보아도 이해가 가지 않았다.
촬영장에서 고사를 지내고, 짧은 잡지 인터뷰를 하나 하고 오니 한밤이었다.
별로 빡빡한 스케줄도 아니었건만 피로가 몰려왔다. 촬영장에서 이것저것 신경 썼던 게 은근히 피곤했던 모양이다.
별로 한 일도 없이 지친 몸으로 침대에 쓰러지듯 눕자 자연스럽게 오늘 촬영장을 가득 채웠던 애매하고도 복잡한, 모두를 긴장시킨 분위기가 떠올랐다.
평소 유준은 촬영할 때 다른 배우들의 사적인 부분을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연기에 도움이 되지도 않을뿐더러 그런 것에 귀를 기울일 만큼 타인에게 관심이 없었다.
출연자가 대형 사고를 쳐서 작품에서 하차한다든가, 작품 불매 운동이 벌어진다든가, 현장 분위기를 망치는 행동을 하는 게 아니고서야 그가 어떤 삶을 살든 유준이 알 바는 아니었다.
하지만 오늘은 달랐다. 다를 수밖에 없었다. 유준은 윤사영을 신경 썼고, 한재우에게 촉각을 곤두세웠으며, 사영과 재우가 스치기라도 하면 발을 동동 구르지 않기 위해 애써야 했다.
이 터무니없는 복수 계획이 실패로 돌아가더라도 유준에게는 티끌만큼의 영향도 없을 터였다. 실패할까 봐 초조해해야 하는 사람은 윤사영이었다.
그런데 정작 사영은 아무래도 좋은 사람처럼 담담하고 태연하게 행동했고 오로지 유준만이 내도록 애를 태웠다. 우스운 일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사영이 정말로 아무렇지 않았을 리는 없다.
한재우를 코앞에서 대하는 것도 보통 일이 아닐 텐데 거기다가 오랫동안 손을 놨던 연기에 대한 부담감까지 지고 있을 테니 말이다.
바로 그런, 매우 타당한 이유로 유준은 사영에게 전화를 걸고 싶었다. 앞으로 함께 일하게 될 동료이자 비밀스러운 파트너 사이에 그 정도 걱정은 할 수 있는 거 아닌가.
정신은 잘 차리고 있는지. 또 혼자 패닉에 빠진 건 아닌지. 그래서 쓸데없는 짓을 하려고 하지는 않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었다.
막말로 그가 갑자기 감성에 젖어 한재우에게 ‘자니…?’ 같은 연락이라도 해 버리면 말 그대로 유준만 중간에서 우스운 사람이 되어 버리는 꼴이다.
유준은 중간에 제 의지로 이 짓을 그만둘 수 있고, 그가 열심히 돕더라도 사영의 복수는 끝끝내 실패로 마무리될 수도 있다. 그러나 그 결과가 중간에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듯 혼자만 꼴사나워지는 건 사양이었다.
그래서 유준은 사영에게 전화를 걸기 위해 휴대폰을 찾았다.
분명 그랬다.
“하….”
차 안에 유준의 한숨이 다시 한번 울려 퍼졌다. 분명 그랬는데 왜 자신이 지금 여기에 있는 걸까.
왜 이 밤에 차를 타고 윤사영의 집 앞까지 달려와서 내리지도, 돌아가지도 못하고 욕과 한숨만 내뱉고 있는 걸까.
물론 휴대폰을 쥔 채 걱정을 좀 하긴 했다.
혹시 안 괜찮으면서 괜찮은 척을 하면 어쩌나. 사실은 벌써 멘탈이 다 깨져서 엉망진창으로 무너지고 있는데 간신히 목소리 하나만 멀쩡한 척 꾸며 내며 괜찮은 척한다면 어떻게 그 사실을 꿰뚫어 볼 수 있을까.
이 긴긴밤에, 유준의 전화를 끊고 대뜸 한재우에게 연락을 하거나, 그를 생각하거나, 그를 생각하면서 밤새 울기라도 하면. 그러면.
그러면 어쩌나.
그런 생각을 조금, 아주 짧게 하기는 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당장 옷을 걸쳐 입고 차를 몰아 이곳으로 달려올 마음은 없었다. 정말이었다.
유준은 창문을 내리고 낮은 담장 너머로 솟은 사영의 집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블라인드가 드리워진 창문 틈으로 미세한 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아직 잠들지 않은 모양이다.
말없이 눈을 깜빡이며 불빛을 멍하니 쳐다보던 유준이 천천히 휴대폰을 손에 쥐었다. 그리고 사영의 이름을 찾아 집에서는 그렇게도 누르기 힘들었던 통화 버튼을 꾹 눌렀다.
귓가에 통화 연결음이 들리자 심장이 쿵쾅대기 시작했다.
- 유준 씨?
너머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는 갑작스러운 전화에 조금 놀랐을 뿐, 울먹거리고 있거나 혼란스러워하는 것처럼 들리지는 않았다.
유준은 다행과 아쉬움 사이 어딘가의 모호한 감정을 느끼며 입을 열었다.
“네. 김유준입니다.”
- 무슨 일 있어요?
이어진 목소리는 무슨 일이 벌어졌다고 확신하는 것 같았다. 하기야, 그렇지 않고서야 유준이 이 늦은 시간에 전화할 일이 뭐가 있겠냔 말이다.
“…….”
유준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여기에서 어떤 대답을 내어놓아야 할지 쉽게 결정할 수 없었다.
용건이 없으면 전화할 일이 없는 게 당연한 관계인데 괜한 말을 꺼내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집 앞이라고 말하고 싶었다. 아무 일도, 아무 용건도 없이 그냥 왔다고 떠들어 대고 싶었다. 기이한 열망이었다. 입술이 소리 없이 움직였다. 유준은 망설이고 있었다.
“그냥… 나는….”
차라리 정말 이유가 없다면 오히려 더 나을 상황이다. 그러나 유준은 자신이 너무나도 분명한 이유 하나를 가지고 이 자리에 와 있는 걸 알고 있었다.
거짓말을 하거나 대답을 회피할 순 있지만 그 자신으로부터 진실을 감출 수는 없었다.
유준은 그가 걱정됐다. 그래서 왔다. 사영이 전화로 거짓말을 할까 봐. 혼자 울고 자해했으면서도 아니라고, 괜찮다고 둘러댈까 봐.
아니 사실은, 그냥 윤사영을 제 눈으로 직접 보고 싶어서.
그래서 유준은 지금 여기에 있었다. 그게 이유다.
“…괜찮습니까?”
하지만 결국 유준이 뱉은 말은 진실과는 완전히 동떨어진 조각이었다. 유준은 제집 거실과 소파에 앉아 전화를 건 것처럼 말을 이어 갔다.
“오늘… 어땠나 해서요. 경험해 보니까 후회돼서 포기하고 싶어졌다거나, 막상 한재우를 보니 마음이 흔들렸다거나 뭐, 그러지는 않았나 해서.”
주절주절 덧붙이는 입을 한 대 치고 싶었다. 자신이 말을 곱게 하는 타입이 아니라는 건 원래도 알고 있었지만 어째서인지 윤사영 앞에서는 더욱 아무렇게나 움직이는 혓바닥이 유독 거슬리게 느껴졌다.
휴대폰 너머에서는 말이 없었다. 사영의 침묵이 꼭 수만 개의 화살이 되어 살갗을 뚫고 들어오는 것 같았다.
이 와중에 더욱 자괴감이 드는 건, 가식으로든 뭐든 한재우와 다정하게 대화를 하고 보니 사영의 마음이 흔들리진 않았을까 하는 불안함을 정말로 자신이 느끼고 있다는 점 때문이었다.
혼자 우스운 꼴이 되고 싶진 않아서, 라고 덧댄 건 사실 진짜 이유가 아니었다. 유준은 그걸 알았다.
짧은 침묵을 뒤로 하고 사영이 대답했다.
- 걱정 안 하셔도 돼요. 그런 마음은 전혀 들지 않았어요.
그의 목소리는 여전히 흔들림이 없었다. 유준의 말이 무례하다는 생각조차 하지 않는 기색이었다.
유준은 휴대폰을 쥐고 있지 않은 손을 들어 제 머리카락을 격하게 흐트러트렸다. 뭐 하나 마음에 드는 게 없다.
이 밤중에 여기까지 온 것도, 그런 주제에 하고 싶은 말 한마디 제대로 전하지 못하는 것도, 정말로 하고 싶은 말은 섣불리 입 밖으로 꺼내기가 어려운 것도 전부, 전부 다 짜증만 났다.
그냥 잠이나 잘걸.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 …유준 씨.
그런 유준에게 사영이 먼저 말을 건넨 건 결국 제 감정을 제대로 갈무리하지 못한 유준이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전화를 끊으려 하던 순간이었다.
“…네.”
그가 무슨 말을 하려는 지 짐작 가는 바도 없으면서 유준은 잔뜩 긴장한 채 대답했다. 사영은 예의 그 담담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 한재우한테 전화가 왔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