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복수하는 회귀자를 사랑하는 법-63화 (63/193)

#063

“뭐?!”

이어진 사영의 말은 정말로 조금도 예상치 못한 종류의 것이라, 유준은 저도 모르게 큰 소리로 따지듯 대꾸했다가 서둘러 입을 다물었다. 이 와중에 그가 놀랐을까 봐 걱정이 되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사영은 태연하게 말했다.

- 조금 전에… 전화가 왔었어요. 한재우한테.

거듭 들어도 쉽게 이해가 가지 않는 말이었다. 도대체 그 새끼는 무슨 낯짝으로 이 시간에 뻔뻔하게 사영에게 연락을 해 댄단 말인가. 유준에게는 이토록 쉽지 않았던 일인데 말이다.

“그래서. 받았어요?”

- 네.

“그걸 왜 받아?”

예상치 못하게 부풀어 오른 감정이 제멋대로 날뛰기 시작했다.

사영의 잘못이 아니라고 머릿속으로는 생각하면서도 한재우가 아직도 멋대로 본인의 삶에 드나들 수 있도록 내버려 두는 윤사영에게 화가 났다.

“그 새끼랑 무슨 할 말이 더 남아 있다고? 윤사영 씨. 솔직히 말해 봐요.”

- …….

“한재우랑 다시 잘해 보려고. 그러고 싶어서 나 이용하는 거 아니야?”

단순히 사영이 한재우의 전화를 받아서 화가 난 게 아니었다. 도대체 자신이 왜 이 어처구니없는 치정 싸움에 끼어들었는지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과 후회가 밀려오기 시작했다.

아직 본격적인 일은 시작도 하지 않았는데 유준은 벌써 모든 게 다 망한 것만 같았다.

“윤사영 씨.”

- 네.

막말에 가까운 언행에도 사영의 대답에는 감정이 없었다. 그게 유준을 더 화나게 한다는 걸 아마 그는 짐작도 하지 못할 것이다.

유준은 당장 차에서 내려 그의 집에 뛰어 들어가고 싶은 충동을 간신히 참아 내며 말했다.

“그 새끼한테 조금이라도 미련이 남아 있거나, 혹시라도 앞으로 흔들릴 것 같으면 지금이라도 솔직하게 말해요.”

- …….

“둘의 사랑놀이에 끼어드는 일 같은 건 관심 없으니까. 알겠습니까?”

사람의 마음은 갈대와 같고, 나쁜 습관일수록 고치기 힘든 법이다. 쓰레기 같은 연인과 힘겹게 헤어져 놓고 결국엔 다시 돌아가는 멍청한 인간들의 이야기를 유준은 살면서 수도 없이 들어왔다.

만에 하나라도. 정말 백만 분의, 천만 분의 하나의 확률로라도 이 복수의 결말이 한재우와 윤사영이 진정으로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고 재결합하는 것으로 끝날 가능성이 있다면 유준은 지금이라도 이 일에서 손을 떼고 싶었다.

유준이 아주 조금이라도 진정하고 자신의 행동을 되돌아봤다면 고작 전화 한 통 받았다는 사영의 말에 이렇게까지 급발진한 걸 수치스러워했을 것이다.

하지만 유준은 이미 이 시간에 사영의 집을 찾아온 그 순간부터 스스로의 임계점을 넘었다. 이제 와 아닌 척 진정하기엔 이미 너무 많이 지나쳐 왔다.

조용한 차 안에 씩씩거리는 유준의 숨소리가 가득 찼다. 휴대폰 너머의 사영은 그제야 입을 열었다.

- 한재우가….

사영의 머뭇거림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짐작할 수 없어서 유준은 입술을 깨물었다.

- …그 사람도 그렇게 생각하는 것 같아요.

“그게 무슨….”

- 내가 아직 자기한테 미련이 있다고. 그래서 지금 이렇게 자기 주위를 맴돌고 있는 거라고… 한재우가 지금 그렇게 생각해요.

한재우가 그렇게 생각한다는 사영의 그 말이 찬물처럼 유준에게 끼얹어졌다. 온몸의 피가 식는 기분이었다. 유준은 그제야 자신이 사영에게 무슨 말을 지껄였는지 실감이 되었다.

하지만 사영은 유준의 말에 큰 의미를 두지 않은 것처럼 차분하게 말을 이어 갔다.

- 서단우 오디션을 본 건 말할 것도 없고, 이혼마저도 자기 관심을 끌려고 한 거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어요.

“기껏 전화해서 한다는 말이 그딴 소리였어요?”

- 네.

사영의 마지막 대답에서는 자조적인 감정이 느껴졌다. 유준은 그제야 자신이 정말로 했어야 하는 말이 무엇이었는지를 깨달았다.

한재우 그 버러지만도 못한 새끼에게 전화가 왔다고 했을 때 유준은 사영이 얼마나 역겨운 헛소리를 들었을지를 걱정했어야 했다.

왜 전화를 받았냐고 말도 안 되는 트집을 잡아 화를 낼 게 아니었다.

그가 이상한 소리를 하지는 않았느냐고, 그것 때문에 혹시 속상한 건 아니냐고, 그러한 부드럽고 다정한 태도를 보이지는 못하더라도 유준은 응당 사영을 걱정했어야 했다.

모진 말로 그를 모욕하는 게 아니라.

순간적으로 얼굴에 확 열이 올랐다. 유준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숙인 채 핸들 위에 이마를 댔다. 살다 살다 남에게 이런 추태를 보인 건 처음이었다.

사과를 해야 할 것 같은데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엄두가 안 나서 망설이는 사이 사영이 말을 이었다.

- 그냥 그렇게 생각하라고 내버려 뒀어요.

“네….”

- 긍정도 안 하고, 반박도 안 하고… 그냥 대꾸조차 거의 하지 않고 끊어 버렸어요. 꼭… 그가 맞는 말을 해서 할 말이 없는 사람처럼.

“그래요. 잘했네요.”

풀이 잔뜩 죽은 목소리로 유준이 대답했다. 사영이 왜 그랬는지 설명을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더 큰 통쾌함을 위해 기꺼이 현재의 굴욕을 감내하기로 한 것이다. 재우의 착각은 오히려 반겨야 할 일이었다.

사영은 지나치게 잘하고 있다. 정말로 유준의 걱정이 무색하도록 말이다. 이 일에서 더 감정적이고, 제멋대로이며, 일을 망칠 것처럼 굴고 있는 건 오히려 유준이었다.

- 유준 씨.

“…네.”

- 유준 씨가 불안해하는 건 충분히 이해해요. 저도… 저도 제가 미덥지 않거든요. 그 꼴을 당하면서도 죽기 직전에야 겨우 정신을 차렸는데 같은 바보짓을 또 하지 않으리란 법이 어딨겠어요.

유준은 힘없이 고개를 저었다. 사영의 말에 반박하고 싶었다. 그런데도 자존심 때문인지 아니면 스스로 인정하기 싫은 다른 감정 때문인지 쉽게 말이 나오질 않았다.

- 그래도… 저는 저를 믿어 달란 말밖에는 하지 못할 것 같아요.

“…….”

- 절대로 유준 씨를 배신하지 않아요. 아무도 없는, 이렇게 한심한 저의 미친 소리에 기꺼이 손을 내밀어 준 유준 씨의 노력을 헛되게 만들지 않을게요. 실패할 수는 있겠지만… 제 의지로 포기하거나 한재우에게 돌아가는 일은 없을 거예요. 정말이에요.

결연하게까지 들리는 목소리였다. 처음부터 지금까지 유준은 내도록 그를 비웃고, 비꼬고, 의심하고, 심지어 모욕하기까지 했는데도 사영은 여전히 유준이 마치 그의 삶의 은인인 것처럼 말했다.

문득 숨이 막혔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절망감이 목구멍을 꽉 막았다. 유준은 가까스로 말을 뱉어 냈다.

“오늘은… 오늘은 내가 심했어요.”

유준은 지금까지 늘 그랬듯 그에게 상처가 되는 말을 내뱉었던 걸 모른 척할 수 있었다.

모든 건 전부 윤사영의 탓이고 나는 아무런 잘못도 하지 않았다는 태도로 알았으니까 그만 끊고 쉬라고, 내일 촬영에 지장 없게 잘하라고 훈수나 두면서 통화를 마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렇게 말해선 안 되는 거였는데….”

- 아니에요. 정말 괜찮아요. 유준 씨 입장에서는 충분히 할 수 있는 걱정이었잖아요.

“그냥 나는… 내가 예민했어요.”

하지만 사과를 하면서도 유준의 태도는 어딘지 모르게 어정쩡했다. 왜 그랬는지. 왜 그렇게까지 예민하게 굴었는지를 설명할 수가 없어서 그랬다. 사과하는 것보다 이유를 설명하는 게 더 어려웠다.

“피곤할 텐데 어서 자요. 내일 아침 일찍부터 촬영 있잖아요.”

- 네, 그럴게요. 유준 씨도 얼른 쉬세요.

“그럴게요. 끊어요.”

- 네. 들어가세요.

유준은 사영의 인사가 끝나기가 무섭게 서둘러 전화를 끊었다. 그가 조금이라도 틈을 보이면 조금 더 대화를 이어 나가고 싶어져 붙잡게 될까 걱정이 되었다.

“하아….”

자괴감 가득한 깊은 한숨이 아래로 쏟아졌다. 자신이 여전히 차 안에, 사영의 집 앞에 있다는 걸 스스로도 믿을 수가 없었다.

이렇게 신경 쓰이는 사람을 한재우는 어떻게 그 오랜 시간 동안 철저히 무시할 수 있었던 건지 도무지 이해가 가질 않았다.

너무나도 완벽하게 사영의 마음을 가졌기에 그럴 수 있었던 걸까. 흔한 말로 정말 ‘다 잡은 고기’라서. 먹이도 뭣도 주지 않아도 제 곁을 떠날 리가 없는, 떠날 수 없는 존재라서.

그래서 재우는 그렇게까지 사영에게 무정할 수가 있었던 걸까.

고작 두어 달을 알고 지낸 것만으로도 나는 이렇게 윤사영이 신경 쓰여 미치겠는데. 돌아 버릴 것 같은데.

앞으로 사영이 제 눈앞에서 한재우와 어울릴 걸 생각하면 벌써 이렇게 화가 나고 속이 타들어 가는데.

한재우는 도대체 뭐가 그렇게 잘나고 대단해서. 고작 그 정도의 인간이. 윤사영에게.

답을 알 수 없는 물음들을 머릿속으로 되풀이하며 유준은 시동조차 끄지 않았던 차를 그대로 돌려 떠났다.

아무래도 한재우를 ‘꼬시는’ 일에 제대로 박차를 가해야 할 것 같았다. 이 모든 번뇌에서 벗어날 방법은 그놈의 복수를 최대한 빨리 끝내는 것뿐이었다.

***

“정말 고마워요.”

“아니에요. 이제부터는 이게 제 일인데요, 뭐. 돈 받고 하는 일이니까 마음 쓰지 마시고 앞으로 배우님은 촬영에만 신경 쓰시고 나머지는 다 저한테 맡겨 주세요.”

사영은 밝은 목소리로 든든하게 말하는 낯선 얼굴을 잠시 쳐다보았다. 자신을 ‘이우종’이라고 소개한 그는 사영이 이번 영화를 찍을 동안 임시로 매니저 역할을 맡아 줄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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