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5
망쳐서는 안 된다. 단순히 실수하지 않는 것뿐만 아니라, 서단우라는 캐릭터가 가진 존재감을 제대로 표현해 내야만 했다.
자신을 믿어 준 감독님과 저를 돕고 있는 유준에게 실망을 주고 싶지 않았고, 한재우의 앞에서 당당하게 자신을 증명해 보이고 싶기도 했다.
그런 부담이 쌓이고 쌓여서 사영의 숨을 막고 있었다. 5년 가까이 연기를 놓아 버렸던 자신이 과연 해낼 수 있을지 걱정되었다.
제대로 연기를 펼치지 못해 작품에 민폐를 끼치고, 그로 인해 유준에게도 거절당해 결국 아무것도 이루지 못하고 두 번째 삶 역시 실패로 남을 수도 있다는 가정이 눈앞에 선명하게 그려졌다.
바로 그때. 똑똑, 하고 대기실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사영의 정신을 일깨웠다.
놀란 사영이 뭐라고 대답을 하기도 전, 문 너머에서 낯선 목소리 하나가 들렸다.
“선배님, 저 도율입니다.”
사영은 반사적으로 몸을 일으키며 눈을 빠르게 깜빡였다. 도율이라면 지난번 오디션장에서 인사를 나누었던 배우였다. 선배님이라는 생소한 호칭이 귓가를 윙윙 울렸다.
안 그래도 긴장하고 있는데 낯선 사람이 나타나자 감정이 더 위축됐다.
게다가 사영이 알기로 이 영화 출연자 중에 도율은 없었다. 왜 갑자기 그가 자신을 찾아온 건지 도무지 짐작되지 않았다.
하지만 이유가 무엇이든 추운 날씨에 사람을 밖에 계속 세워 놓을 수는 없었다. 사영은 덜덜 떨리는 몸에 간신히 힘을 주고 일어서서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앞에 서 있는 이는 사영이 이전에 만났던 그 사람이 맞았다. 밝은 갈색이었던 머리카락이 검은색으로 변해 인상이 조금 달라지긴 했지만 얼굴을 알아보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밖에 오래 있었는지 코끝이 빨개진 도율은 사영을 보자마자 얼굴 가득 환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아, 안녕하세요, 선배님! 저 기억하세요?”
“네, 도율 씨. 안녕하세요.”
사영은 얼결에 고개를 살짝 숙이며 대답했다. 얼굴에서 시선을 조금 내리고 나서야 그의 손에 들린 커피 두 잔이 보였다.
사영의 시선이 제 손에 머무른 걸 눈치챈 도율이 금방 말을 이었다.
“다름이 아니라 제가 남는 커피가 있어서요…. 우연히 매니저 분 뵈었는데 선배님께 하나 갖다 드려도 괜찮겠냐고 여쭤보니까 괜찮을 거라고 하셔서… 따뜻한 라떼인데 꼭 받으셔야 하는 건 아니에요! 그냥 여유로 한 잔 더 사 왔던 거라….”
그는 굉장히 긴장한 것 같았다. 횡설수설하지는 않았지만 허둥대고 있는 게 빤히 보였다.
신기하게도 타인의 긴장을 눈앞에서 마주하자 사영의 마음이 오히려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호의를 베풀면서도 눈에 띄게 긴장해 있는 도율이 어딘지 모르게 안쓰러워 보여 우선은 그를 달래 주고 싶었다.
조금 전 우종이 사다 준 커피를 이미 마시긴 했지만 사영은 그 사실을 감추고 도율을 향해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손을 내밀었다.
“마침 커피가 생각나던 참인데 고마워요. 잘 마실게요. 라떼 좋아해요.”
“…아! 좋아하시는구나! 다행이에요!”
라떼를 좋아한다는 말을 들은 게 뭐 그렇게 기쁜 일이라고 도율은 금세 눈동자를 반짝이며 웃었다. 코와 양 볼이 추위로 발갛게 달아오른 그는 본래의 나이보다 더 어려 보였다.
아마도 그 탓이었을 거다. 사영은 순간적으로 몸을 살짝 비틀어 공간을 만들고 대뜸 도율에게 말을 건넸다.
“그… 날이 추운데 괜찮으면 잠깐 들어올래요…?”
헤실헤실 웃고 있던 도율의 표정이 멍하게 굳었다. 순간적으로 괜한 말을 한 건가 걱정이 되었을 정도로 급격한 표정 변화였다.
사영이 조금만 더 주의 깊게 그를 살펴보았다면 여분의 커피를 전해 주러 왔다고 하면서 한 잔이 아닌 커피 두 잔을 손에 들고 온 것에서부터 의도를 짐작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사영은 바로 직전까지 몹시 불안한 상태였고, 뜻밖의 상황을 갑자기 맞닥뜨려 당황하기도 했다.
거기다가 도율의 어리고 무해한 얼굴까지 더해지는 바람에 그의 진정한 의도를 알아채지 못했다.
“저, 정말 그래도 돼요?”
도율은 간택이라도 받은 양 감격스러운 얼굴로 되물었다. 잠깐 들어오라는 말을 들은 게 그렇게까지 좋아할 일인가 싶어질 정도였다. 사영은 문을 조금 더 활짝 열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오늘 너무 춥잖아요. 아직 휴식 시간 남았으니까 잠깐 커피 마시고 가요.”
“그럼 잠깐만 실례할게요. 감사합니다, 선배님!”
도율은 허리를 직각으로 숙이며 씩씩하게 인사하곤 대기실 안으로 성큼성큼 들어왔다.
사영은 자연스럽게 계속 이어지는 선배님이란 호칭이 여전히 낯설어서 문을 닫으면서도 괜히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사영은 과연 자신이 정말로 선배님 소리를 들을 만한 자격이 있는지 조금 의문스러웠다.
데뷔했을 때부터 현재까지의 시간을 단순하게 합해 본다면 중견 배우라고 불린대도 무리가 없을 터이지만 사영이 실제 ‘배우’로서 살아온 시간은 터무니없이 짧았다.
그저 허송세월한 기간이 긴 것뿐인데 선배 대접을 받자니 민망한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민망함보다 더 견디기 힘든 건 한재우가 있는 촬영장에서 그가 아닌 다른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야말로 한재우가 절대로 용납하지 않을 상황이었다.
사영이 완전히 연예계를 떠나기 전 두 사람은 이따금 화제의 커플로서 함께 인터뷰를 하거나 방송에 출연하곤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