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연히 재우는 사람들 앞에서는 세상에서 다시 없을 다정한 남편 역할을 완벽하게 수행했다.
하지만 촬영장에서 사영이 다른 배우나 스태프들과 친밀하게 대화를 나누기라도 하면 집에 돌아온 후 갖은 방법으로 사람을 숨 막히게 했다.
어떤 날은 이게 다 너를 너무 사랑해서 하는 질투라고 애처로운 척을 했고, 어떤 날은 너의 그런 행동이 나를 얼마나 비참하게 만드는지 아냐고 말하며 죄책감을 심었다.
날이 갈수록 사영은 촬영장에서 말이 없어졌고 사람들과 어울리지 않게 되었다.
익명의 스태프 입을 빌려 사영이 변했다느니 거만해졌고 사람을 무시한다느니 하는 등의 말을 전하는 기사가 뜨기 시작한 것도 그즈음이었다.
그 모든 행동은 전부 한재우로부터 비롯된 거란 해명은 당연히 할 수 없었다.
머릿속에 심어진 강박은 생각보다 무서웠다. 사영은 도율과 마주 앉은 이 자리에서 그걸 실감하고 있었다.
유준과 만날 때는 명백한 목적이 있었기에 덜 인식할 수 있었던 것들이 그 어떤 수단도 아닌 사람과 마주하자 송곳처럼 날카롭게 가슴을 찔러 왔다.
다른 사람과 단둘이 대화하지 말아야 해. 그를 빨리 내보내야 해. 강압적인 명령이 사영의 목소리를 빌려 목을 죄어 왔다.
그래서 사영은 차라리 도율이 사용하는 ‘선배님’이라는 호칭이 주는 어색함에 더 집중하기로 했다. 지금 사영이 붙들 수 있는 전부였다.
사영은 이 촬영장에 편안해지려고 온 게 아니다. 불편해야 했다. 이전에는 해 보지 못한 일들, 할 수 없었던 일들을 해내야만 했다.
그는 자신의 초조함을 감추기 위해 손가락 끝으로 제 뺨을 살살 문질렀다. 도율이 준 커피를 쥐고 있었던 탓에 뺨에 닿는 손끝이 따뜻했다. 그 온기에 필사적으로 매달리며, 사영은 입을 열었다.
“그런데… 도율 씨도 이 영화에 같이 출연하게 된 거예요? 미안해요. 내가 지금은 아는 사람이 별로 없고, 소식에 좀 둔해서….”
묻는 목소리는 한없이 조심스러웠다. 사영은 혹시라도 도율의 자존심이 상하진 않을까 걱정되었다.
관심이 없었던 게 결코 아니었다. 사영은 분명 최종 결정된 출연진을 꼼꼼히 살폈고 그중 도율의 이름은 없었다.
잔뜩 긴장한 것처럼 보이는 도율이 한 손을 크게 휘저으며 대답했다.
“아니에요! 촬영 시작되기 직전에 기존 배우분이 개인적인 사정으로 못하게 됐다고 하더라고요. 갑자기 캐스팅이 바뀌면서 제가 들어온 거라 모르시는 게 당연했어요!”
“그랬어요? 그럼… 어떤 역인지 알려 주실 수 있나요?”
“제, 제가 맡은 배역은 ‘정원’이에요.”
“아….”
캐릭터 이름을 들은 사영은 짧은 침음을 흘렸다. 심장이 거칠게 뛰기 시작했다.
지난 생에서 정원 역을 맡았던 사람은 도율이 아니었다. 사영이 알고 있던 미래가 바뀐 것이다.
갑작스럽게 맞닥뜨린 상황에 초조함이 밀려들었다. 손등을 긁고 싶은 걸 간신히 참으며 사영은 머릿속을 정리하려 애썼다.
지금껏 사영의 전생에 있었던 굵직한 사건들이 다르게 변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유준의 사고부터 한재우가 영화 <하지>에 참여하는 것 말고도 사영은 연예계 사건·사고는 물론이고 사회적인 사건 역시 제가 알고 있던 일들이 그대로 진행된 것을 몇 번이나 확인했다.
사영이 모르는 곳에서 다른 방향으로 진행된 일이 있을지 모르겠으나 적어도 사영이 아는 선에서는 달라진 게 없었다. 지금까지는.
나 때문인가, 하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윤사영이라는 변수가 생겼으니 결괏값이 조금씩 달라지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정확히 어떻게 된 일인지는 몰라도 사영이 나타나 틀어 버린 길이 드디어 세계에도 조금씩 영향을 주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걸 깨닫자 엄청난 부담과 함께 작은 설렘이 밀려왔다.
변할 수 있다. 변하고 있었다. 비록 도율이 갑자기 <하지>에 합류하게 된 게 사영과는 아무런 상관없는 일이라고 해도 중요한 건 ‘윤사영의 변화’ 외에도 바뀌는 게 있다는 점이었다.
사영은 울렁거리는 감정을 진정시키며 마찬가지로 긴장한 얼굴인 도율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