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복수하는 회귀자를 사랑하는 법-70화 (70/193)

#070

그때 재우는 오랜 무명 생활에 지쳐 있었다. 아무리 노력해도 길이 보이지 않았다. 배우가 아닌 삶은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는데 그 세계는 자꾸만 재우를 밀어냈다.

생계는 어려워지고 부모님을 볼 면목이 없었다. 또래의 친구들이 부모님께 용돈을 드리고 집을 바꿔 드리는 동안 재우는 손을 벌리지 않기 위해 노력해야 했다.

어디서든 저 친구 마스크도 괜찮고, 연기도 잘한다는 소리는 곧잘 들었다. 그가 조연으로 출연한 드라마나 영화를 본 이들은 이따금 근데 그 캐릭터도 좀 괜찮지 않았어? 하는 식으로 한재우를 언급하곤 했다.

그 말들은 분명 깜깜했던 재우의 삶을 밝히는 촛불이 되었지만 그뿐이었다.

그 순간이 지나면 재우는 다시 조연 역 하나를 따내기 위해 발을 동동 굴려야 하는 무명 배우로 돌아갔고 시간은 매섭게 흐르기만 했다.

그러다 사영을 만났다. 사영의 두 번째 작품이었다. 데뷔작에서 서브 남주를 맡아 단번에 인기스타 반열에 오른 사영은 곧바로 주인공 역을 꿰찼다.

그는 처음부터 한재우의 삶과는 정반대의 궤적을 그리며 그 자리에 서 있었다.

현장에서 사영의 연기를 실제로 처음 본 순간, 재우는 왜 사람들이 아직 보여 준 것도 많지 않은 그를 그렇게까지 사랑하는지 알 수 있었다.

연기를 하는 윤사영은 놀라울 정도로 빛났다. 그리고 그 빛을 보는 이들에게 온전히 전달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저도 모르게 저런 사람이어야만 배우를 하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저렇게 첫눈에 보기에도 반짝반짝 빛나서 도무지 지나칠 수가 없는 그런 존재만이 이 바닥에서 살아남고 승승장구할 수 있나.

나는 그렇지 못해서. 아무리 노력하고 노력해도. 연기를 열심히 하고 사랑해도. 이렇게 간절해도. 나는 그렇지 못해서 영영 저런 자리는 오를 수가 없는 건가.

그런 생각을 하자 그동안 애써 외면해 왔던 비참함이 거대한 해일이 되어 재우를 덮쳤다. 화가 나 누구든 원망하지 않으면 견디기 힘든 감정들이 몰아쳤다.

그렇지 않다는 걸 보여 주고 싶었다. 세상에 알리고 싶었다. 저렇게 빛나는 사람도 얼마든지 진창에 구를 수 있고, 나처럼 바닥을 구르던 사람도 저 자리까지 올라갈 수 있음을 무슨 수를 써서라도 보여 주고 싶었다.

분명 윤사영은 죄가 없다. 단지 그는 너무 아름다웠을 뿐이다. 굳이 이유를 대자면 그뿐이었다.

그간 한재우를 열등감에 휩싸이게 한 배우는 많았지만 그 누구도 윤사영만큼 그를 비참하게 만들진 않았다.

그 순간 재우는 결심했다. 저 사람을 끌어내리겠다고.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의 이름을 밟고 올라서 그 자리를 빼앗고야 말겠다고.

지금 자신이 그를 보며 영영 닿을 수 없을 것만 같다는 절망감을 느꼈듯이 그 역시, 자신을 보며 이토록 비참하고 서러운, 그러나 어떻게든 닿고 싶다는 열망을 느끼도록 만들어 주겠다고.

사영이 모르는 한재우의 악의는 바로 그 지점에서 시작되었다. 그로부터 5년, 한재우는 그날의 다짐을 기어코 전부 이뤄냈다.

그래서 재우는 지금 이 순간이 너무나도 불쾌했다. 속이 뒤틀리는 것만 같았다.

사영의 연기를 보는 순간 그날이 떠올랐다. 감히 다가설 수 없는 빛을 가진 사람을 보고 마지막 남은 마음의 무언가를 잃어버렸던 바로 그 순간을 말이다.

다시는. 두 번 다시는 윤사영을 보고 이런 감정을 느낄 일은 없을 거라 여겼는데. 그러기 위해 그토록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윤사영을 바닥으로 끌어내리고 여기까지 달려왔는데.

어째서 이제 와 사영을 상대로 이런 감정을 느끼는 걸까. 어째서 여전히 윤사영은 저런 반짝임을 가지고 있단 말인가.

믿기지 않는 상황에 몸이 다 덜덜 떨렸다. 손바닥이 패이도록 주먹을 쥐고 심호흡해 보아도 좀처럼 감정이 진정되질 않았다.

그리고 흔들리는 재우의 눈동자에 또 한 명의 사내가 보였다. 자신과 마찬가지로 벼락이라도 맞은 것처럼 얼어 버린 그 사내는 사영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그럴 리가 없다고. 김유준이 고작 지금의 윤사영 따위에게 신경 쓸 리가 없다고.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유준이 지금 느끼는 감정의 파괴력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아 속이 쓰렸다.

어지러운 감정이 한데 섞여 재우의 숨을 막았다. 분명히 질투 엇비슷한 감정이 심장을 옥죄고 있는데 둘 중 누구 때문에 그런 감정을 느끼는 건지 확신할 수 없었다.

재우는 잠시 눈을 감고 감정을 다스렸다. 어쩌면 사영의 연기를 다시 봐야 한다는 것 자체가 생각보다 큰 스트레스가 됐는지도 모른다.

그토록 오랜 시간 공들여 망가트려 놓았는데 다시 일어서려는 시도를 하는 걸 보았으니 기분이 좋을 리가 없었다. 아무리 제 마음을 되돌리기 위한 발악이라고 해도 말이다.

통하지 않을 것이다. 사영이 데뷔하였을 때의 대중과 지금의 대중은 다르다. 혹시 사영이 이런 시도를 하더라도 전부 무마시키기 위해 여론까지 신경 써 만들어 놓았던 게 아닌가.

어차피 윤사영은 영화 촬영 중에 무너질 것이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자신이 마음먹고 움직이기만 하면 사영을 흔들어 놓기란 식은 죽을 마시는 것보다 쉬웠다.

재우는 사영이 여기서 이렇게 필사적으로 노력하는 이유가 무엇인지를 다시 되새기며 마음을 진정시켰다.

다시 과거로 돌아가는 일은. 저 멀리 높은 곳에서 별처럼 빛나는 윤사영을 올려다보는 일은 절대로 없을 것이다. 그래야만 했다.

***

“형!”

유준은 갑자기 귓가를 때리는 정민의 목소리에 놀라 정신을 차렸다. 고개를 돌리자 운전석에서 백미러를 통해 자신을 살피는 정민이 보였다. 유준이 어정쩡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어어. 왜.”

“아니, 무슨 생각을 그렇게 깊이 하길래 사람이 불러도 몰라요?”

“내가?”

“네. 저 한참 떠들었는데, 하나도 못 들었죠?”

유준은 꼭 잠에서 깬 사람처럼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정민의 말대로 유준은 그가 제게 했다는 말을 하나도 듣지 못했다. 머릿속에 온통 다른 생각들이 꽉 차 있으니 당연했다.

유준은 애써 별것 아닌 것처럼 말을 이었다.

“미안. 잠깐 딴생각했나 보다.”

“괜찮아요? 어디 안 좋거나 뭐 그런 건 아니죠?”

“아니야, 그런 거. 그것보다 왜?”

“아, 별건 아니었고 그냥… 오늘 본격적으로 첫 촬영 하셨잖아요. 느낌이 어땠나 해서요.”

정민의 물음에 유준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안 그래도 유준은 내내 오늘 촬영을 곱씹던 중이었다. 조금 더 솔직히 말하자면, 오늘 촬영장에서의 윤사영을 말이다.

오늘 유준은 촬영이 끝날 때까지 사영과 개인적으로 대화할 기회를 얻지 못했다. 기껏해야 함께 등장하는 장면에서 연기에 관한 의견을 맞춰 본 게 전부였다.

사영은 첫날부터 실수하지 않으려 바짝 긴장해 있었고 한재우를 의식해서인지 무언지 애써 유준을 더 외면하기도 했다.

이해 못하는 건 아니지만 솔직히 기분이 더러웠다. 복수 때문이라는 걸 알면서도 한재우 눈치를 본다고 생각하니 더 신경질이 났다.

게다가 오늘 한재우와 나눈 대화를 떠올리면 찝찝함은 더 짙어졌다. 아무래도 그 새끼 눈치가 영 심상찮았다.

유준은 행여나 정민에게 이 심란함을 들키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입을 열었다.

“뭐 촬영이 다 그렇지. 그래도 감독님 디렉팅이 나랑 잘 맞고 연기 구멍 없는 건 마음에 드네.”

“아! 연기 구멍 하니까 생각난 건데…. 와… 윤사영 진짜 장난 아니더라고요.”

하지만 유준의 노력이 무색하게, 정민은 어딘지 모르게 흥분한 목소리로 지금 유준이 가장 듣고 싶지 않은 이름을 뱉어 냈다.

“제 의견이 중요한 건 아니지만 솔직히 전 윤사영 캐스팅 마음에 안 들었거든요. 이상하게 자꾸만 그 비호감 부부가 자꾸 형이랑 얽히니까… 안 그래도 신경 쓰이는데 하필 그 둘하고 영화를 찍는다고 하니까 아, 진짜 짜증 나는 거예요!”

“그랬냐….”

“네! 거기다가 윤사영? 그 윤사영? 꼭 한재우가 아니라도 일단 소문도 안 좋고 연기 안 한 지도 한참 됐는데… 왜 굳이? 진짜 이해가 안 가 가지고 내가… 형 속까지 시끄럽게 할까 봐 말은 안 했는데 오죽했으면 제가 이사님까지 붙들고 하소연을 했겠어요.”

한번 물꼬를 튼 정민은 쉴 새 없이 제 감정을 쏟아 냈다. 실제 캐스팅 소식이 공표됐을 때 반응도 그렇고, 아마 대다수 사람들은 영화가 개봉하는 날까지 정민과 비슷하게 생각할 게 뻔했다.

하지만 정민은 오늘 사영의 연기를 보았다. 유준은 이어질 말이 어떤 식일지 어렵지 않게 예상할 수 있었다.

“와, 근데 오늘 윤사영 연기하는 거 보니까 이야… 진짜 엄청나대….”

정민의 말투에 미묘하게 섞인 사투리 억양에 유준이 어이없이 웃음을 터트렸다.

지방에서 올라온 정민은 지금은 거의 표준어에 가깝게 말하지만 가끔 흥분하면 사투리 억양을 섞어 뱉곤 했다.

지금 정민이 그 정도로 흥분했다는 뜻이었다. 아직 극 초반이라 감정적인 신이 거의 없는데도 불구하고 오늘 사영이 연기할 때마다 현장의 분위기는 시시각각 바뀌었다.

“새삼 이래서 윤사영이 그때 그렇게 인기가 있었구나 싶기도 하면서….”

“…….”

“뭐, 그 이후 행보를 생각하면 좀 씁쓸하기도 하고 그렇더라고요.”

정민은 정말로 씁쓸한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부드럽게 핸들을 돌렸다. 덩달아 기분이 착잡해진 유준은 말없이 고개를 돌려 창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정민은 또다시 대답이 없는 유준을 룸미러로 슬쩍 살폈다. 얼굴을 보아하니 확실히 지금은 말할 기분이 아닌 모양이다.

도대체 뭐 때문에 저렇게 심란해 보이는지 걱정이 되긴 했다. 그러나 본인이 별일 없다는데 더 캐묻기도 그렇고, 캐묻는다고 한들 순순히 대답해 줄 사람도 아닌지라 정민은 가만히 입을 다물고 운전에 집중했다.

유준은 어둠이 짙게 내려앉은 도로를 쳐다보았다. 사영은 집에 도착했을까 하는 시답잖은 궁금증이 떠올랐다.

챙겨 줄 매니저가 생긴 건 다행이었지만 그 탓에 제가 굳이 챙기고 들 구석이 없어졌다는 게 좀 거슬렸다. 이제 사영에게 오지랖을 부리기 위해선 더 그럴듯한 핑계를 찾아내야만 했다.

내 도움이 필요한 건 윤사영인데.

참 짜증스러운 일이었다.

남들보다 더 큰 부담을 지고 긴장했기 때문인지 오늘 촬영이 끝날 때쯤 사영은 남들보다 몇 배는 더 지쳐 보였다. 카메라가 돌아갈 때는 그런 기색을 전혀 느낄 수 없었지만 컷 소리가 나는 순간에는 당장 쓰러질 것처럼 보였다.

그런 사람이 혼자가 된 이후엔 또 어떤 몰골을 하고 있을지.

상상하려 애쓰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지친 사영의 모습에 유준은 점점 가슴이 답답해졌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정민을 먼저 보낼걸 그랬나 싶다가도 내가 왜 그렇게까지 해 줘야 하나 싶은 반발심이 번갈아 들었다.

유준은 결국 숨을 깊이 내쉬며 눈을 감았다. 문득 이 모든 게 다 너무나 피곤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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