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복수하는 회귀자를 사랑하는 법-72화 (72/193)

#072

- 네. 그게 다예요. 뭐가 더 있겠어요.

“뭐… 좋아요. 그건 그렇고.”

그제야 유준은 굳어 있던 표정을 풀었다. 어쨌거나 도율과 단둘이 대화를 나누었다는 건 여전히 기분이 나쁘긴 했지만 그걸 사영에게 다 티 내기엔 유준의 자존심이 아직 용납하지 않았다.

- 네. 하실 말씀이라도 있으세요?

이번에는 사영이 물었다. 유준은 여전히 조심스러운 태도로 입을 열었다.

“아니, 그… 특별히 할 말이 있는 건 아니고….”

- ……?

“그냥. 괜찮은가 해서요. 오늘… 첫 촬영이었으니까.”

왜 이렇게 조심스러운지 모를 일이다. 못 물어볼 걸 묻는 것도 아니고, 잘못한 게 있는 것도 아니고. 주눅들 이유가 하나도 없는데 이상하게 유준은 전처럼 툴툴대며 제멋대로 말을 할 수가 없었다.

특별히 상황이 달라진 것도 아닌데 말이다. 고작해야 연기하는 윤사영을 처음으로 가까이에서 본 것. 그것뿐인데. 그게 뭐라고.

사영은 다시 말을 멈췄다. 유준은 그 침묵이 또 긴장돼 같이 숨을 죽였다.

사영의 첫 신에 뻔뻔하게 현장에 나와 구경하던 한재우와 얼어붙어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했던 윤사영, 그리고 굳어 있던 사영을 달래고 풀어 주었던 자신의 모습이 차례로 유준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유준은 그간 현장에서 긴장감 때문에 얼어붙은 많은 신인을 보았다. 특히나 대스타인 유준과 처음 촬영하는 이들은 대부분 그랬다.

그때마다 유준은 가벼운 말 몇 마디로 그들의 긴장을 풀어 주곤 했다. 특별히 그들에게 신경 써서가 아니라 촬영이 늘어지는 걸 막고 좋은 장면, 좋은 작품을 만들기 위해서였다.

그래서 단순하게 보면 오늘 사영과 있었던 일도 유준에게는 특별한 게 아니었다. 사영이 신인은 아니지만 오랜만에 복귀했으니 어떤 면에서는 신인보다 더 적응이 어려운 상황일 수도 있었으니 말이다.

그런데 뭐가 그렇게 특별해서. 다른 때와 뭐가 그렇게 달라서. 유준은 자꾸만 그때를 특이점을 지나오기라도 한 것처럼 마음에 담고 있는 것일까.

- 사실 저도 물어보고 싶은 게 있었어요.

짧은 침묵이 흐른 끝에 사영이 말했다. 예상치 못한 대답에 유준이 ‘네?’하고 되묻자 사영이 말을 이었다.

- 저 오늘… 괜찮았나요?

“…….”

- 열심히… 정말 열심히 하긴 했는데 잘했는지 모르겠어요. 엉망진창이었던 것 같기도 하고…. 망치지 않으려고, 폐를 끼치지 않으려고 정말, 정말 열심히 했는데… 정말 열심히 준비도 하고 연습도 하고… 정말 그랬는데….

사영의 숨이 점점 가빠지는 게 전화로도 느껴졌다. 유준은 저도 모르게 앉아 있던 몸을 일으켰다. 어떻게 스스로 제어할 수 없는 욕망이 순식간에 끓어올라 유준을 집어삼키고 있었다.

유준은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아주 무겁게 낮아진 목소리로 사영의 말을 끊었다.

“윤사영 씨, 잠깐. 잠깐 내 말 들어요.”

- …….

그 덕분에 가까스로 말을 멈춘 사영이 숨을 헐떡이며 유준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유준은 입술을 깨물었다가, 주먹을 꽉 쥐었다가, 이윽고 말했다.

“조금만 기다려요. 내가 지금 갈게요.”

- …네? 무슨… 왜….

“그냥 가만히 있어요. 금방 갈 테니까.”

- 유, 유준 씨…!

유준은 다급하게 제 이름을 부르는 사영의 목소리를 더 듣지도 않고 전화를 끊어 버렸다.

차 키를 들고 황급히 집을 나서는데 내가 왜 이럴까 하는 자괴감보다 진즉 이렇게 해야 했다는 확신이 마음을 가득 채웠다.

사영에게 직접 말해 주고 싶었다. 그게 어떤 말이든, 사영의 두 눈을 마주 보고 말하며 그의 표정을 하나하나 제 눈에 담고 싶었다.

전화로는, 목소리를 듣는 것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었다.

주차장으로 내려가 차에 올라타는 데까지 단 1초의 망설임도 없었다. 그제야 유준은 오늘 촬영이 끝난 후 지금까지 내도록 제 마음 한구석에 남아 있던 정체를 알 수 없는 아쉬움이 무엇이었는지 깨달았다.

유준은 사영을 보고 싶었다.

***

사영은 초조하게 입술을 깨물었다. 조금 전 유준과 했던 통화가 너무 비현실적이라 꿈을 꾸었던 건 아닌가 싶었다.

유준이 전화를 걸어 제게 괜찮으냐고 물어봐 준 것도 신기한 일이었는데 그것으로도 모자라 갑자기 오겠다고 하면서 전화를 끊었다.

유준이 혹시 자신을 놀린 건가 싶기도 했지만 이런 장난이 자연스러울 만큼 가까운 사이는 아니었다.

거실을 이리저리 방황하다 걸음을 잠시 멈춘 사영이 시계를 보았다. 시간은 이미 새벽이 된 지 한참인데 어째서 이 시간에 여기까지 온다는 건지 거듭 생각해도 이해가 가질 않았다.

무언가 내가 크게 잘못한 걸까. 전화로 말하기도 어려울 정도로, 그만큼 일을 망쳐 버렸나.

시간이 지날수록 그런 쪽으로만 생각이 흐르는 걸 막을 수 없었다.

어쩌면 유준이 정말로 화가 난 건지도 모른다. 어딘지 모르게 평소와 조금 다른 것 같았던 목소리는 너무 화가 났기 때문일 수도 있었다.

갑자기 도율에 대해 물어본 것도 그렇다. 연기를 그딴 식으로 하면서, 현장에서 해이하게 도율이랑 수다나 떨고 있던 자신을 질책하려는 의도일 수도 있었다.

한번 부정적인 쪽으로 생각이 기울자 다른 쪽으로 뒤집는 게 쉽지 않았다.

이따금 재우는 사영에게 크게 화내기 전에 먼저 전화로 언질을 주기도 했다. 내가 너 때문에 얼마나 곤란했고, 답답했고 화가 났는지 화를 내듯 설명을 하곤 집에 가서 보자는 말로 마무리하는 식이었다.

그러면 사영은 남은 시간 동안 적막한 집에서 홀로 앉아 두려움에 떨며 재우를 기다리곤 했다.

또다시 재우를 실망하게 한 자신을 스스로 책망하면서. 나는 왜 이렇게 한심하고 머저리 같을까. 왜 늘 사랑하는 사람을 이렇게 힘들게 만들까 자책하면서.

이번에야말로 재우가 완전히 질려 자신을 버리면 어쩌나 싶어 초조함에 물 한 모금 마시지 못했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온 한재우에게 온갖 폭언을 듣고 나면, 그래도 자신을 버리지 않고 용서해 준 재우에게 진심으로 감사해했다.

그가 원하는 날엔 폭력적인 관계를 맺었고 그조차 다행이라고 여겼다.

그때의 기억들이 순식간에 해일처럼 밀려와 사영을 휩쓸었다. 지금 오고 있는 건 한재우가 아니라 김유준이라고, 그때와 같은 일은 벌어지지 않을 거라고 아무리 마음을 다스리려고 해도 좀처럼 진정이 되질 않았다.

“후우….”

사영은 덜덜 떨리는 두 손을 꼭 마주 잡은 채로 연신 깊은숨을 내쉬었다. 지긋지긋한 이 기억들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지금은 여기 있지도 않은 한재우를 떠올리며 한심하게 구는 일은 그만하고 싶었다.

원하는 만큼 강해지지 못하는 자신이. 여전히 나약한 자신이 한심스러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이래서 자신은 누구에게도 사랑받지 못할 것이다. 누구라도 자신의 이런 본모습을 보게 된다면 정떨어져 가까이 두고 싶지 않을 게 분명했다.

그런 생각들이 막 사영을 깊이 잠식했을 때.

초인종이 울렸다.

사영은 홀린 듯 현관으로 걸어갔다. 내딛는 걸음이 과거인지 현재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

누구냐고 묻지도 않고 곧장 문을 열자 굳은 표정을 한 유준이 보였다. 하지만 사영의 눈동자는 지금 눈앞에 서 있는 유준을 똑바로 보지 못했다.

“윤사영 씨…?”

유준은 곧바로 무언가 잘못됐다는 걸 느꼈다. 자신을 보는 사영의 얼굴이 어딘가 이상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불안함을 느끼며 문을 닫고 안으로 들어온 유준이 조금 더 사영에게 가까이 다가가며 입을 열었다.

“사영 씨, 왜 그래요.”

놀란 유준이 어울리지 않게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사영은 꼭 홀린 사람처럼 멍한 얼굴이었다. 생전 처음 보는 표정에 괜히 마음이 불안해졌다.

그리고 그 불안한 마음은 사영의 다음 말을 듣는 순간 바닥으로 철렁 내려앉았다.

“…제가 잘못했어요.”

“……? 윤사영 씨, 지금 무슨 소리를….”

“제가… 제가 잘못했어요. 열심히… 더 열심히 해야 했는데 제가… 죄송해요. 그러려던 게 아니고… 미안해요….”

“자, 잠깐만요, 사영 씨.”

당황한 유준은 사영의 말을 막으려 연신 그의 이름을 불렀지만 그 목소리가 들리지도 않는 건지 사영은 여전히 멍한 표정으로 잘못했다는 말을 반복했다.

사영의 두 눈동자에는 공포에 가까운 불안함이 어려 있었다. 마른 어깨는 눈에 보일 정도로 애처롭게 떨리고 있었다. 그제야 유준은 사영이 자신을 제대로 보고 있지 않다는 걸 깨달았다.

그는 지금 과거의 어느 날에 있었다. 사과할 필요가 없는 일로 재우에게 끝도 없이 빌며 용서를 구하던 지난 생의 어느 날에.

피가 거꾸로 솟는다는 게 어떤 건지, 유준은 태어나 처음으로 그 감정을 뼈저리게 느꼈다. 단순히 화가 났다는 말 정도로는 지금 느끼는 감정을 표현할 수 없었다.

당장 한재우에게 달려가고 싶었다. 주먹을 날려 그의 턱을 부수고 무릎을 꿇려 바닥에 이마를 처박아야지만 이 분노가 조금이나마 풀릴 것 같았다.

그리고 윤사영 앞에 개처럼 끌고 와 그동안 제가 한 일들에 대해 빠짐없이 사죄하도록 만들고 싶었다.

“사영 씨, 잠깐만. 나 좀 봐요.”

하지만 지금 한재우를 조지는 것보다 더 중요한 건 눈앞의 윤사영이었다. 당장이라도 무너져 내릴 것만 같은 사영이 울지도 못하고 유준의 앞에서 떨고 있었다.

유준은 사영의 코앞까지 다가가 가녀린 그의 어깨를 조심스럽게 붙들었다. 어깨를 감싸는 제 손이 너무 큰 데에 두려움을 느낀 적은 처음이었다.

조금이라도 힘을 주면 그를 망가트릴 수도 있을 것 같아 겁이 났다. 그런 자신이 낯설어 입이 바짝 말랐다.

“사영 씨.”

“제가… 제가 더 잘했어야 했는데….”

“윤사영. 그만.”

좀처럼 자책을 멈추지 못하는 사영의 모습에 심장이 쥐어짜이는 듯한 고통을 느끼며 유준은 조금 더 단호한, 그러나 날카롭지는 않은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어느새 유준의 한 손은 사영의 뺨을 감싸고 있었다.

“그만해, 윤사영.”

“…….”

“너 잘못한 거 하나도 없으니까. 사과 안 해도 돼. 괜찮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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