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3
“하지… 하지만….”
사영은 입을 벙긋거렸다. 유준이 하는 말이 무슨 뜻인지 잘 이해가 가지 않았다. 갑자기 모든 게 다 혼란스러워졌다. 여긴 어디고, 눈앞에 있는 이는 누군지 제대로 생각할 수가 없었다.
“나를 봐.”
그때, 단단한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사영은 그 말이 참 이상한 말이라고 생각했는데 놀랍게도 그 말을 듣고 나서야 사영은 자신이 지금 앞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흐릿하고 어지럽기만 하던 세계가 서서히 선명해지며 색을 찾아갔다.
“내가 누군지 제대로 봐.”
목소리를 따라 안개가 걷혔다. 사영의 주위를 배회하던 과거의 망령들 역시 서서히 물러나기 시작했다.
사영이 또렷해진 시선으로 그제야 마주한 것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저를 보고 있는 유준의 얼굴이었다.
“김유준 씨….”
“…….”
“유준 씨….”
“그래요. 나 김유준이에요. 그러니까 이제 괜찮아요.”
유준은 엄지손가락으로 사영의 뺨을 부드럽게 매만지며 말을 이었다. 한없이 조심스러운 태도였다. 손끝에 닿는 살결이 얼음장처럼 차가워 마음이 미어지는 것 같았다.
윤사영이 뭐라고. 이게 이렇게 속상할 일인가 싶었지만 실제로 느껴지는 감정은 어찌할 수가 없었다.
사영은 여전히 실감이 나지 않는 건지 눈을 깜빡이며 유준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자기 자신을 일깨우듯 다시 한번 ‘유준 씨.’하고 이름을 부른 사영은 다리가 풀려 그대로 쓰러지듯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유준이 그를 다급히 끌어안았다. 유준의 품으로 쓰러진 사영은 몸을 떨었다. 다행히 기절한 건 아니었지만 혼자 일어나 걸을 수 있을 만한 상태가 아닌 것만큼은 분명해 보였다.
“…잠깐, 나한테 기대요.”
결국 유준은 할 수 없이. 정말 그러고 싶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이. 조심스럽게 사영의 몸을 안아 올렸다. 인형처럼 가볍게 들리는 몸에 속이 쓰렸다.
사영은 기대는 것조차 쉽지 않은지 어떻게든 혼자 버티려 했다. 유준의 귓가로 괜찮다고 웅얼거리는 목소리가 미세하게 들려왔다.
유준은 아랑곳하지 않고 사영의 몸을 그대로 안아 올렸다. 마른 몸은 유준의 힘을 거부할 수 없었다. 품에 안자 사영의 떨림이 더더욱 적나라하게 느껴졌다.
현관 앞에서 거실 소파까지 걸어가는 순간이 무척이나 길게 느껴졌지만 그게 싫진 않았다. 유준은 차라리 그 순간이 영영 끝나지 않길 바랐다.
사영을 안고 싶다는 생각은 한 번도 한 적이 없었는데 이상하게 막상 그를 끌어안고 있자니 오래전부터 오직 이것만을 원해 온 사람처럼 기묘한 만족감이 퍼졌다.
입술을 깨문 채 유준은 사영을 조심스럽게 소파에 내려놓고 그 곁에 바짝 붙어 앉았다. 사영이 ‘죄송해요….’하고 속삭이는 소리가 들렸다.
도대체 이 가련한 사람을 어찌하면 좋을까. 이렇게까지 망가진 사람이 정말로 한재우의 앞에서 괜찮을 수 있을까.
결국 윤사영만 더 다치고 더 고통스러워진 채로 이 복수를 끝내게 되는 건 아닐까.
제 것이 아닌, 유준이 끌어안을 필요가 없는 두려움이 밀려왔다. 유준은 사영에게 완전한 타인이었으므로 너무나도 손쉽게 그 두려움을 내던져 버릴 수 있었으나 이 밤만큼은 왠지 그럴 수가 없어서. 그러고 싶지 않아서.
유준은 사영이 진정될 때까지 한참 동안 그를 안은 채로 거기에 앉아 있었다.
***
재우는 벌써 몇 잔째, 독한 술을 거침없이 목구멍으로 넘겼다. 술은 속을 전부 태울 기세였지만 안타깝게도 재우는 원하는 만큼 취할 수가 없었다.
술을 마시면 마실수록 정신은 오히려 또렷해지고, 오늘 보았던 윤사영의 모습은 더더욱 선명해져만 갔다.
두 번 다시는 사영을 보고 그런 기분을 느낄 일은 없을 거라고 확신했던 만큼 오늘 있었던 일은 재우에게 정말로 큰 충격을 주었다.
그들의 관계는 누가 보아도 반박할 수 없을 만큼 완벽하게 역전되었다. 사영에게는 이제 아무것도 없었다. 그는 더 이상 빛나지도 않았고, 높은 자리에 있지도 않았으며, 전처럼 해맑고 순수하지도 않았다.
그는 한재우의 손에 철저히 망가졌다. 오랫동안 한재우의 노예였다. 재우의 앞에서 무릎을 꿇고 비는 데에 익숙해진 패배자였다.
그런데. 그런데 왜. 어째서.
잔을 쥔 재우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오늘 사영의 연기를 보며 느꼈던 감정이 도무지 사라지질 않았다.
마치 그날처럼. 사영을 처음 보았던 그날처럼 재우는 오늘 막막함을 느꼈다. 닿을 수 없는 곳에 서 있는 사람을 보기라도 한 것처럼 말이다.
그럴 리가 없는데. 윤사영은 더 이상 재우에게 그런 존재가 아닌데. 태양 같던 윤사영은 진창에 떨어져 더러워진 지 오래인데.
“징그러운 새끼….”
욕을 내뱉는 재우의 목소리 끝이 떨렸다. 정말이지 지긋지긋한 악연이었다.
“제까짓 게 그래 봤자….”
재우는 계획을 조금 수정하기로 했다. 눈치 볼 사람이 많은 촬영장이었기에 조금 더 두고 보려 했는데 오늘 윤사영이 하는 꼴을 보니 그를 더 내버려 두면 안 될 것 같았다.
사영이 괜찮은 척할 수 있는 건 오로지 재우가 아직 그를 제대로 상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동안은 유준의 앞에서 괜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아 사영을 그냥 모른 척했다.
만약 재우가 그러지 않았다면. 재우가 정말 적극적으로 사영을 흔들려고 했다면 그는 결코 오늘처럼 담담하게 제 일을 해낼 수 없었으리라.
재우는 탁, 소리가 나도록 거칠게 잔을 내려놓았다. 이어질 촬영엔 강무성과 서단우의 첫 동반 출연 신이 예정되어 있었다.
장담하건대, 사영은 결코 오늘 촬영을 평범하게 끝낼 수 없을 것이다.
***
“이제 진정이 됐습니까?”
유준은 제 품에서 벗어나려 꼬물거리는 사영의 움직임에 슬쩍 고개를 숙이며 물었다. 사영은 조금 더 적극적으로 유준을 밀어 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네…. 죄송해요. 저 이제 괜찮아요.”
이렇게까지 괜찮다고 하니 더는 그를 안고 있을 명분이 없어진 유준은 왠지 아쉬운 마음에 혀로 마른 입술을 축이며 사영은 완전히 품에서 놓아주었다.
사영은 옆으로 몸을 살짝 옮겨 유준과 거리를 두곤 고개를 푹 숙였다.
“정말… 정말 죄송했어요.”
“내가 집에 온다는 게 그렇게 무서웠어요?”
유준은 행여나 제 목소리가 너무 강압적으로 느껴지지 않게 주의하며 물었다. 괜찮아졌다고는 하나 사영의 얼굴은 여전히 파리하게 질려 있었다. 조금이라도 세게 건들면 다시 허물어질 것 같았다.
“그게 아니라….”
사영은 고개도 제대로 들지 못하고 떨었다. 목소리를 부드럽게 내는 것만으로는 부족한 모양이다.
유준은 숨을 짧게 훅, 내쉬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어깨를 움츠린 채 저를 올려다보는 사영에게 물었다.
“집에 차 있습니까?”
“…차요?”
“네. 마시는 차.”
“아… 잠시만요. 금방 타 드릴게요.”
놀란 가슴을 아직 진정시키지도 못한 주제에 사영은 반사적으로 몸을 일으켰다. 유준은 그런 사영의 어깨를 조심스럽게 붙들어 다시 자리에 앉히곤 말을 이었다.
“있긴 있다는 거죠? 어디. 찬장에?”
“네…. 위에요.”
“잠깐 기다려요. 금방 가져올 테니까.”
그리곤 사영이 뭐라고 입을 열기도 전에 몸을 돌려 주방을 향해 성큼성큼 걸었다.
내 팔자야, 하는 소리가 절로 나왔다. 유준은 태어나 다른 사람을 위해 차를 타 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대화조차 제대로 할 수 없을 정도로 사람이 저렇게 떨고 있는데.
유준은 사영의 앞에선 제대로 내쉴 수도 없었던 한숨을 그제야 슬그머니 내쉬며 남의 집 찬장을 열기 시작했다.
***
사영은 따뜻한 잔을 두 손으로 쥐곤 조심스럽게 차를 한 모금 마시며 유준의 눈치를 보았다. 찻잔을 들고 있는 사람은 사영뿐이었다. 유준은 그저 옆에 앉아서 사영이 진정하기를 가만히 기다리고 있었다.
따뜻한 차가 속을 데우자 그제야 날뛰던 감정이 조금 가라앉았다. 아니, 중요한 건 차를 마셨다는 사실이 아닐지도 몰랐다. 자신을 위해 차를 준비하는 유준의 뒷모습을 지켜보던 순간부터 사영은 이미 진정되고 있었다.
“…고마워요.”
폭풍이 지나가고 나자 남은 건 민망함과 어색함이었다. 혼자 있을 때야 패닉에 빠지든 추태를 부리든 아무 상관없으나 그 꼴을 유준에게 보인 건 큰 문제였다.
차마 유준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사영은 제 손에 있는 잔을 내려다보고만 있었다. 유준이 저를 바라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그가 어떤 말을 할까. 또 얼마나 실망했을까. 그런 생각들로 머릿속이 어지러운 찰나, 낮은 목소리로 유준이 말했다.
“좀 괜찮아졌으면 이제 말해 봐요.”
“네?”
예상치 못한 말에 사영이 동그래진 눈으로 유준을 쳐다보며 되물었다. 잔뜩 일그러져 있을 거라 예상한 사영의 추측과는 달리 유준은 차분한 표정이었다.
“뭐 때문에 그렇게 겁에 질렸던 건지 들어야겠으니까.”
“아….”
사영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유준은 정말로 이해할 수 없었다. 사영을 진정시키며 집으로 오기 전 나누었던 통화의 내용을 계속 떠올려 보았지만 도무지 짐작 가는 부분이 없었다.
전화를 다소 급하게 끊긴 했고, 집으로 가겠다는 말이 갑작스럽기야 했겠지만 그렇다고 사람이 그렇게 패닉에 빠질 정도로 엄청난 일은 아니지 않나.
설명이 부족했다고 한들 그를 무시하거나 모욕했었던 지난 대화들에 비하자면 오늘 유준은 스스로가 제법 얌전하게 행동했다고 생각했다.
화가 난 목소리를 내지도 않았고 따지듯 굴지도 않았다. 게다가 유준은 사영의 집에 오늘 처음 온 것도 아니었다.
도대체 무엇이 사영을 이렇게 겁먹게 만든 건지 알아야 했다. 그래서 다시는, 이런 상황으로 그를 내몰고 싶지 않았다.
지금까지 제 기분 내키는 대로 사영에게 서슴지 않고 막말을 퍼부었던 걸 떠올려 본다면 뜻밖의 변화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