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복수하는 회귀자를 사랑하는 법-74화 (74/193)

#074

“내가… 뭘 잘못했어요?”

대답 없는 사영을 향해 유준이 다시 물었다. 내가 당신을 무섭게 했냐고, 유준이 정말로 궁금한 건 그것이다.

차를 마시면서 숨을 고르는 사영을 지켜보며 유준은 어쩌면 그가 이렇게 된 게 꼭 오늘 있었던 일 때문만은 아닐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사영에게 폭력적이었던 건 한재우뿐만이 아니다.

재우가 훨씬 더 오래, 훨씬 더 악질적으로, 집요하게 그를 괴롭혔다는 핑계를 댈 수도 있겠지만 어쨌든 유준 역시 사영에게 처음부터 지금까지 폭언을 퍼부어 온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어디 그뿐인가. 저질스러운 말과 행동으로 그에게 모멸감을 주었다. 자존심을 뭉개고 내가 이렇게 하는 건 전부 당신 때문이라고 그의 탓을 하기까지 했다.

오늘 이 일은 유준이 지금껏 사영에게 해 온 언행의 결과인지도 몰랐다. 사영에게 유준은 결국 한재우와 하나 다를 바가 없는 사람일 수도 있었다.

그렇게 생각하자 심장이 옥죄어 오는 것 같았다. 제가 저지른 일인 걸 알면서도 속이 쓰렸다. 내가 뭘 잘못했냐는 물음은 세상에서 가장 뻔뻔한 질문되지 않겠나 싶었다.

그렇게 괴롭혀 놓고 내가 뭘 잘못했느냐니. 이렇게 기막힌 말이 또 어디 있겠느냔 말이다.

“그게….”

그때, 사영의 입이 천천히 열리기 시작했다. 유준은 숨을 참고 주먹을 꽉 쥐었다. 문득 도망가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이 자리를 벗어나 모든 걸 없던 일인 양 외면하고 싶었다.

하지만 유준은 묵묵히 사영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사영에게 여기서 더 쓰레기 같은 인간이 되고 싶진 않았다. 사영이 말을 이었다.

“유준 씨 잘못이 아니에요. 유준 씨는 하나도 잘못한 게 없어요.”

“아….”

“그냥… 제가 바보처럼 아직… 아직 과거에서 벗어나지 못해서 그래요.”

제 탓이 아니라는 사영의 대답에도 유준은 안도할 수가 없었다. 이어질 말이 얼마나 아픈 이야기일지 알아챘기 때문이다. 사영은 시선을 내린 채로 말을 이어 갔다.

“밖에서 화가 나는 일이 있으면 그 사람은 제게 전화해서 분풀이를 했어요. 다 너 때문이라고. 너 때문에 내가 이런 대우를 받고, 이런 부당한 소리를 듣는 거라고.”

“…….”

“그런 날은… 집으로 돌아온 뒤에는 저를 대하는 태도가 더 심해져서….”

사영은 자세한 설명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어지는 말이 없어도 유준은 마치 그날들을 직접 본 것처럼 상상할 수 있었다.

자신을 방어할 그 어떤 힘도 없는 이 자그마한 사람에게 한재우가 얼마나 잔인했을지를 말이다.

다시 손이 떨리기 시작하자 사영은 들고 있던 잔을 조심스럽게 내려놓고 두 손을 꽉 마주 잡았다.

“유준 씨가 실수하신 건 없어요. 그냥 전화를 받고 제가 갑자기 그 기억을 떠올리는 바람에 혼자… 죄송해요. 많이 놀라셨죠.”

유준은 아니라고 대답하고 싶었다. 만약 유준이 제대로 설명을 해 주었다면. 그렇게 막무가내로 전화를 끊지 않고 미리 말해 주었다면. 처음부터 그에게 덜 폭력적이고 덜 강압적으로 굴었다면.

그랬다면 사영이 저와의 통화에서 과거의 기억을 떠올리진 않았을 거라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유준의 입술이 미세하게 떨렸다.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그게 쉽게 입 밖으로 흘러나오질 않았다.

심장이 거칠게 뛰었다. 짜증이 났다가, 서글퍼지기도 했다가, 또 화가 났다가. 감정이 제멋대로 날뛰었다.

또다시 머릿속에서 경고음이 울렸다. 더는 안 된다고. 더는 윤사영을 연민하지 말라고. 그를 불쌍하게 보는 일을 그만두라고 정체를 알 수 없는 무언가가 끝도 없이 소리쳤다.

미련하고 한심한 윤사영. 딱 그 정도의 감정에서 더 나아가지 말라고.

“사영 씨.”

“네.”

“내가 오늘 온 이유는… 오늘 사영 씨 연기가 좋았다고 말해 주기 위해서였어요.”

그래서 유준은 정말로 하고 싶은 말을 삼켰다.

내가 미안했다는 말을. 지금껏 당신에게 해 왔던 모든 폭력적인 언사는 옳지 않았다는 말을 참았다. 나는 한재우와 다르다는 말과. 다시는 당신을 아프게 하지 않을 거라는 약속도 삼켰다.

그건 이 복수에 필요한 말들이 아니었다. 유준은 사영에게 더 다정하게 대해야 할 이유도 없고, 그에게 사과해야 할 필요도 없으며, 그에게 조심스러워야 할 의무도 없었다.;

그게 윤사영과 자신의 관계였다.

“연기에 관한 건 중요한 일인 만큼 얼굴을 보고 말하면 좋을 것 같아서요.”

“그게….”

“오늘 사영 씨 연기는 정말로 좋았습니다. 오랜 공백이 있었던 배우였던 걸 굳이 감안하지 않더라도 그 자체로 그냥 좋았어요.”

“…….”

“윤사영 씨보다 서단우를 잘 표현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 오늘처럼만 하면 돼요.”

하지만 유준은 자신의 말이 허울만 좋은 핑계라는 걸 알았다. 알고 있었다.;

고작 연기를 칭찬해 주려고 여기까지 달려온 건 선을 넘은 일이었다. 평범한 동료 사이에선 하지 않을 일이었다.

마음이 어지럽고 속이 탔다. 사영의 얼굴을 보고 있으면 답답해서 미쳐 버릴 것 같은데, 사영이 보이지 않으면 더 애가 타서 돌아가고 싶은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저, 정말이요?”

“…네. 정말이요. 연기 가지고 거짓말은 안 합니다. 거짓말을 하면서까지 윤사영 씨한테 아부할 이유도 없고.”

유준이 한마디 한마디 말을 이어 갈 때마다 사영의 얼굴이 환해지는 게 좋았다. 바로 이 얼굴을 보고 싶어서 이 새벽에 여기까지 달려왔음을 유준은 부정할 수 없었다.

사영은 속일 수 있어도 자신에게는 그럴 수 없었다.

사영은 꼭 믿기 힘든 말을 들은 사람처럼 연신 주먹을 쥐었다 펴길 반복했다. 당장 쓰러질 것처럼 보였던 표정은 한결 풀어져 있었다.

유준의 손끝이 움찔거렸다. 문득, 사영의 뺨을 쓰다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까 사영을 달래며 잠시 매만졌던 느낌이 생생하게 되살아났다.

차갑고 부드러운 살결의 감각이.

잠시 말이 없던 사영이 다시 유준을 향해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유준 씨 말은… 제가 정말로, 정말로 잘했다는 말씀이신 거죠?”

“…….”

“자꾸 물어봐서 죄송해요. 그게… 잘 믿기지가 않아서….”

사영은 유준의 눈치를 보았다. 유준의 말이 쉽게 믿기지 않는 건 사실이었지만 다시 물어본 이유는 그 때문이 아니었다. 사영은 유준이 해 준 그 말을 다시 듣고 싶었다.

좋았다는 말을. 잘했다는 말을. 그대로만 하면 된다는 칭찬을 사영은 한 번만이라도 더 듣고 싶었다. 연기를 그만두고 난 후로 칭찬을 들은 건 처음이었다.

결혼 후 지난 사영의 삶에 머물렀던 이 중 그 누구도 그런 말을 해 주지 않았다.

죽기 전까지 사영은 늘 제대로 하는 게 하나도 없는, 사람을 답답하고 짜증스럽게 만드는, 아무리 설명을 해 줘도 도무지 나아지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으로 살다 죽었다.

“아니에요. 제가 괜한 말을 했어요.”

하지만 유준의 침묵에 금세 다시 주눅이 든 사영은 서둘러 제가 한 말을 주워 담았다. 유준의 기분을 망치고 싶지 않았다.

“사영 씨.”

그때, 유준이 말했다. 여전히 유준의 손은 원하는 대로 사영의 얼굴을 감싸지 못하고 있었으나 하고 싶은 말은 참아 낼 수가 없었다. 이것만큼은 참고 싶지 않았다.

“오늘, 사영 씨 연기 정말 좋았어요.”

선명한 음성으로, 확신을 가득 담은 말투로 유준이 말을 이었다.

“나도 연기를 해야 하는 입장이 아니었다면 정말 넋을 놓고 봤을 거예요.”

“아….”

“나뿐만이 아니었어요. 사영 씨는 연기하느라 몰랐겠지만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전부 다 사영 씨를 보고 감탄했어요. 감독님을 비롯해서요.”

사영의 가슴이 크게 들썩였다. 가만히 앉아 있는데도 숨이 가빠 왔다. 유준의 말이 기쁜 만큼 이상하게 슬프기도 해서 어떻게 반응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크게 웃고 싶다가도 엉엉 울음을 터트리고 싶기도 했다. 여기에 오기까지 너무 많은 시간이 흘렀다. 너무 많은 일을 겪었다.

이제 겨우 시작이고 앞으로 해내야 할, 더 어려운 일들이 많다는 걸 알면서도 좀처럼 밀려오는 감격을 감출 수가 없었다.

“이 영화가 완성되면. 그리고 개봉하게 되면.”

“…….”

“분명 관객들도 느끼게 될 거예요. 윤사영이라는 사람을 좋아하든 싫어하든 그가 연기를 잘하는 배우라는 걸 부정할 수는 없다고. 내기해도 좋아요.”

결국 입술을 꽉 깨문 사영의 뺨으로 눈물 한 방울이 툭, 하고 떨어졌다. 순간 유준은 저도 모르게 아까부터 망설이고만 있던 손을 들었다. 사영의 눈물을 닦아 주고 싶다고 채 생각하기도 전이었다.

“아, 죄송해요. 뭘 했다고 우는지… 오늘 정말 여러모로 못난 모습만 보여서 정말로 죄송해요.”

하지만 그보다 조금 더 빠르게, 사영은 제 손으로 서둘러 눈물을 닦으며 어색하게 미소 지었다. 흰 뺨을 적신 눈물은 어느새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사영은 더 울지 않았다.

“뭐… 그렇게까지 죄송할 건 없고.”

손을 재빨리 거두어들인 유준은 행여나 제 민망함을 사영에게 들키기라도 할까 봐 대수롭지 않은 척 대답했다.

순간적으로 얼굴에 열이 올랐다. 혹시 눈에 띄게 귓불이 붉어지진 않았을지 걱정이 될 정도였다. 타인 앞에서 이렇게 어색하게 군 게 얼마 만인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결국 이 위기를 타파하기 위해 유준이 할 수 있는 건 아무렇지 않은 척, 냉정하고 이성적인 척 다른 쪽으로 말을 돌리는 것밖에 없었다.

“그래 봤자 이제 시작에 불과하다는 거 알고 있죠.”

“…네.”

“앞으로 점점 더 어려운 신이 많아질 거예요. 정신 똑바로 차려야 합니다.”

“네. 알고 있어요.”

유준은 제가 말을 뱉어 놓고도 제 입을 때리고 싶은 기분에 사로잡혔다.;

아무리 그래도 여기까지 와서, 모처럼 좋은 분위기를 타고 있었는데 꼭 이렇게 밉상스럽게 말을 해야 하나 싶었다.

같은 말이라도 조금 더 다정하게 말할 수 있었을 텐데.

이 시간에 고작 이런 말이나 하려고 여기까지 온 것도 어이가 없을 판에 다정이 웬 말인가 싶은 마음과 이 틈을 타 그에게 조금 더 다정한 사람이 되어 거리를 좁히고 싶은 마음이 격렬하게 충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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