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복수하는 회귀자를 사랑하는 법-75화 (75/193)

#075

“그나저나, 유준 씨는 괜찮으세요?”

나아가지도 못하고, 되돌아가지도 못하는 외길에서 유준이 머뭇거리고만 있을 때.

조금 전까지의 감정은 이미 다 정리해 버린 것 같은 사영이 예의 그 담담한 음성으로 물었다. 생각지 못한 질문에 당황해 의도조차 파악하지 못한 유준이 ‘뭐가요?’하고 되묻자 사영이 말을 덧붙였다.

“저 때문에 유준 씨도 그 사람 앞에서 연기하셔야 하니까… 스트레스받고 계신 건 아닌가 해서요.”

“스트레스는 당연히 받지. 그럼 안 받겠습니까? 그 재수 없는 새끼한테 웃어 줘야 하는데.”

“아….”

갑자기 한재우를 떠올리자 기분이 확 나빠진 유준이 질색하며 대답했다.

잊고 있었던, 제게 뻔뻔하게 사영이 괜찮은지를 묻는 재우에게 비꼬는 말 한마디조차 할 수 없었던 자신이 떠올라 신경질이 났다.

“…….”

문득 유준은 입을 꾹 다물고 사영은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오늘 한재우를 마주했을 때 느낀 이질감이 떠오른 탓이다.

오늘 유준에게 사영에 대해 말하던 재우는 지금까지 보아 온 한재우와는 확실히 달랐다.

그간 재우는 유준을 마주치면 어떻게든 호감을 표현하지 못해 안달이었다. 심지어 본인이 유부남이었을 때도 말이다.

남들은 눈치채지 못할 만큼 교묘하게, 그러나 시선을 마주하는 당사자는 모를 수가 없을 만큼 노골적으로 재우는 그동안 한결같이 유준의 신경을 건드려 왔다.

그런데 오늘 한재우는 달랐다. 심지어 유준이 이전과는 달리 호의적으로 대해 주는데도 그는 일말의 관심조차 보이지 않는 듯했다.

그뿐만이 아니다. 한재우는 오히려 유준을 탐색했다. 한재우는 제게 윤사영이라는 미끼를 던진 후 반응을 살폈다. 그 목적이 어디에 있는지 확신할 수 없어 계속 찝찝한 마음이 들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불안감이 다시금 날카롭게 유준을 자극했다.

사영의 이전 삶에서 <하지>를 찍기 시작한 시점의 재우는 유준에게 그다지 깊은 감정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고 했다. 그가 유준의 마음을 얻기 위해 본격적으로 움직인 건 <하지> 촬영이 끝난 이후였다고.

다시 말해 지금 이 시점의 한재우는 유준에게 그다지 진심이 아닐 수도 있다는 말이었다. 그렇기에 사영은 유준에게 그의 마음이 더 깊어질 수 있도록 도와 달라고 요구했던 것일 테다.

“사영 씨.”

경계하는 듯한 시선으로 저를 살피던 재우의 눈빛을 떠올리며 유준이 무거워진 음성으로 사영을 불렀다. 분위기가 달라진 걸 느낀 사영 역시 긴장한 얼굴로 유준을 마주 보았다.

“만약에… 만약에 말입니다.”

현재는 이미 사영이 알던 과거와 달라졌다. 사영은 집에서 온종일 재우를 기다리며 말라 가는 대신 먼저 이혼을 통보하고, 전생에서는 놓쳤던 서단우 역을 제힘으로 쟁취했다. 이것만으로도 변수는 이미 넘쳐난다는 말이었다.

이토록 많은 것이 뒤바뀌었는데. 한 사람의 인생이 정반대의 방향으로 완전히 달라졌는데.

그 사람의 생과 직접적으로 얽힌 이가 아무것도 변하지 않고 그대로 머물러 있는 게 과연 가능한 일일까.

윤사영과는 관련이 없던, 전혀 다른 삶을 살아가던 김유준도 이미 이만큼이나 달라졌는데 말이다.

“만약에….”

유준은 몇 번이나 말을 머뭇거렸다. 사영이 재우의 마음을 얻어 내려 유준을 이용하는 게 아니라는 건 알고 있었다. 그러나 유준은 묻고 싶었다.

만약에 한재우가 달라진다면. 사영이 ;사영의 의도와 상관없이 재우가 지난 삶에서와는 다르게 변한다면.

그가 사영에게 했던 제 행동들을 후회하고 반성하는 것으로도 모자라 사영의 사랑을 갈구하게 되기라도 한다면.

과연 사영은 그때도 지금처럼, 오로지 복수만을 목표로 하며 재우의 구애를 외면할 수 있을까.

“네, 유준 씨. 편하게 말씀하세요.”

제대로 된 질문을 꺼내지 못하고 계속 머뭇거리는 유준에게 사영이 말했다.

지금 제가 할 말이 무엇인지 짐작도 하지 못할 거면서 무엇이든 다 들어 주겠다는 듯한 태도로 저를 보는 사영의 눈빛이 우스웠다.

“…아닙니다. 시간이 늦었으니 이만 가 볼게요.”

하지만 사영보다 더 우습고 한심스러운 건 김유준 그 자신이었다.

한없이 유순한 얼굴로 저를 보는 사영에게 유준은 한재우가 이제라도 당신을 사랑하게 된다면 어떻게 할 거냐는 그런 말은 차마 할 수가 없었다.

사영에게 잔인하고 무례한 말인 건 둘째 치고 유준은 이 자리에서 사영의 대답을 들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사실 가장 큰 문제는 그것이었다.

어정쩡하게 일어서는 유준을 따라 사영이 함께 몸을 일으켰다. 자신이 오라 한 것도 아닌데 사영은 꼭 유준이 이 시간까지 고생한 게 제 탓이기라도 한 것처럼 미안한 표정을 했다.

“피곤하실 텐데 괜히 저 때문에….”

“됐어요. 윤사영 씨가 오라고 한 것도 아닌데.”

“하지만….”

“마음이 좀 가벼워졌으면 그걸로 됐습니다. 사영 씨가 잘해야 나도 안심할 수 있으니까.”

유준은 현관을 향해 걸음을 옮기며 이 모든 게 별것 아닌 양 주절거렸다.

사영의 눈을 보고 잘했다고 말해 주고 싶어서 여기까지 왔단 사실을 대단한 일 취급해 봤자 민망해지는 건 유준이었다.

그런 유준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 뒤를 졸졸 따라 걸으며 사영이 말했다.

“덕분에 불안하고 초조했던 마음이 많이 가벼워졌어요. 정말이에요. 정말로 너무 고맙습니다.”

“흐음. 흠.”

유준은 괜히 헛기침을 했다. 공치사를 듣는 것도, 사영이 익숙하게 저를 배웅하는 것도 전부 다 유준의 감정을 건드렸다. 뱃속이 간질거리는 기분이었다.

“내일… 아니, 오늘도 잘할게요.”

더 대답하지 않고 문을 열려던 유준을 향해 사영이 말을 덧붙였다.

“한재우 앞에서도, 잘 해낼게요. 실망시키지 않을게요.”

그제야 유준은 곧 사영이 재우와의 첫 합동 출연 신을 찍을 예정이라는 걸 떠올렸다. 제 일도 아닌데 심장이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한재우는 비겁한 사람이었다. 그가 촬영을 핑계로 삼아 사영에게 무슨 짓을 할지 벌써부터 걱정스러웠다.

정작 사영을 한재우 앞에 내어 줄 준비가 안 된 사람은 김유준인 것도 모르고 사영은 한결 단단해진 표정으로 말했다.

“오늘처럼 멍청하게 굴지 않도록 할게요.”

유준은 그저 아무렇지 않은 척, 제 얼굴을 꾸며 낼 수밖에 없었다. 모든 것이 이상한 새벽이었다.

***

영화 하지 촬영현장 스틸컷 봤냐? ㅋㅋㅋㅋ

이제 막 촬영 시작한 걸로 아는데 벌써 현장 스틸컷이 풀리네

김유준이랑 윤사영 한 화면에 서있는 거 개미쳤다 김유준이야 말해뭐해지만 윤사영 야.... 걍 조선에서 온줄? 둘 다 사극 처음이지? 존나 잘 어울린다.... 정명철이 왜 윤사영 고집했는지 너무 잘알겠다...

언제적 윤사영이냐 싶었는데 이거 보니까 넘 기대됨 존버한다...

└ ㅅㅂ 클라쓰는 영원하다더니 윤사영 얼굴 보고 하는 말인듯ㅋㅋㅋㅋㅋㅋ

└└ ㅇㄱㄹㅇ 왜 더 이뻐짐??

└ 윤4 회사에서 알바 풀었냐 스틸컷 풀리자마자 갑자기 짠듯이 얼굴 칭찬하는 글 다다다 올라오는 거 소오름,,,

└└ 얼굴이 존나 잘하니까 얼굴 칭찬이 올라오겠죠? 무슨 대애단한 음모가 있는 척.. 혼자 거대한 자본의 힘을 파악한 척....

└ 나만 김유준 한재우 케미가 더 기대되냐? 저런 얼굴로 둘이 정적이라니 벌써 밥 한그릇 뚝딱이다

└└ 야나두 걍 둘이 도망가라고 빌면서 영화볼드슈ㅠㅠㅠㅠㅠㅠ

└└ 김유준도 한재우랑 같이 있을 때 더 몰입된 표정 ㅇㅇ

└└ 내말이.. 하긴 이거 김유준이 힘주는 작품이랬는데 갑자기 40같은 거 묻으면 나같아도 빡친다 ㅋㅋㅋㅋ

└└ 2222 나였으면 못 찍는다고 다 엎었어 ㅋㅋㅋㅋ 김유준 한재우 둘 다 조낸 프로쥬?

└ 윤사영 연기 어떻게 할지 기대된다 인성은 몰라도 얘 연기하는 거 넘 좋아했는데..

└└ 나도... 공백 길었는데 연기력 괜찮을까 걱정도 되고ㅠㅠ 사극이라 더...

└└ 예전만큼만 하면 좋을 텐데 과연.... 배우 소문이고 뭐고 난 정명철 작품 워낙에 좋아해서 이왕 이렇게 된 거 잘했으면 좋겠네

***

“일찍 오느라 수고했어. 아침 못 먹었지? 이거라도 먹을래?”

우종은 조수석에 타며 제게 불쑥 샌드위치를 내미는 사영을 놀란 듯 쳐다보며 황급히 입을 열었다.

“형, 뒤에 타시는 게 편하지 않겠어요? 눈도 좀 붙이시고….”

그제야 사영은 눈을 깜빡거리며 우종과 뒷좌석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특별한 이유가 있는 게 아니고서야 매니저를 둔 연예인은 보통 뒷좌석에 탄다는 게 그제야 떠올랐다. 너무 오랫동안 일을 쉬다 보니 별게 다 어색했다.

사영은 민망한 듯 웃으며 대답했다.

“그러게. 아직 익숙하지가 않아서… 내가 앞에 있으면 너도 불편하지?”

“아니에요. 제가 불편할 게 뭐가 있겠어요.”

“일단 이거 받아. 뒤에 다시 탈게.”

사영은 우종에게 샌드위치를 건네주고는 조수석에서 내려 뒤로 자리를 옮겼다.

아직 친하지도 않은데 괜히 옆에 앉아 있으면 어색한 분위기도 신경 써야 하고 여러 가지로 우종이 불편하겠단 생각이 들었다.

“와, 저 에그마요 좋아하는 거 어떻게 아시고?”

“그래? 다행이다. 아직 시간 이르니까 먹고 출발하자.”

“그래도 돼요?”

“응. 나도 아침 안 먹었어.”

사영은 환한 얼굴로 저를 보는 우종을 향해 제 몫의 샌드위치를 살짝 흔들며 말했다.

사실 사영은 별로 먹고 싶지 않았지만 혼자 먹으라고 하면 우종이 불편해서 제대로 먹지 못하리라는 걸 알았다.

“여기 커피요. 따뜻한 라떼.”

“고마워.”

이번에는 반대로 우종이 건네는 커피를 사영이 받았다. 출근하는 길에 드라이브 스루 카페가 있다며 우종이 오는 길에 사 오겠다고 한 커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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