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6
사영은 우선 커피 한 모금을 마셨다. 따뜻한 커피를 마시자 아침 내내 긴장되어 있던 심신이 조금 풀리는 것 같았다.
아직 샌드위치의 포장도 뜯지 않은 사영과 달리 이미 크게 한입 베어 먹은 우종이 다시 사영을 향해 말했다.
“푹 주무셨어요?”
“네? 아, 아니… 어?”
아직 반말이 익숙하지 않아서 반사적으로 존댓말을 한 사영이 서둘러 말을 고쳤다. 우종이 가벼운 웃음을 터트렸다.
“너무 억지로 어렵게 고치진 마시고… 편한 대로 하시면 돼요.”
“아, 으응…. 나도 반말하는 게 좋아. 그냥 아직 조금 익숙하지 않아서 그래.”
“네. 그럼 다행이구요. 아무튼… 컨디션 괜찮으신가 해서요.”
사영은 우종이 하는 말 하나하나가 어색하기만 했다.;
당연하게 제 컨디션을 묻고 챙기는 사람이 있다는 게, 그게 업인 사람이 곁에 있다는 게 너무 낯설었다. 유준이나 도율의 존재가 어색한 것과는 또 달랐다.
사영은 고개를 끄덕이며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응. 괜찮아. 잠도 잘 잤고. 걱정해 줘서 고마워.”
“고맙기는요, 제가 할 일인데요.”
때때로 사영은 재우가 저를 막 대하는 것보다 은성에게 차갑게 대하는 데에 더 신경이 쓰이곤 했다.
자신이야 그런 대우를 받을 만한 사람이니까 그렇다 치더라도 늘 어딘지 모르게 주눅 들어 있는 은성을 볼 때면 마음이 안 좋아 무엇이라도 더 챙겨 주고 싶었다.
어떤 때는 제가 더 은성에게 미안할 때도 있었다. 자신이 재우의 기분을 상하게 만들면 은성 역시 덩달아 화풀이를 당했기 때문이다.
그럴 때면 은성은 잔뜩 원망스러운 표정으로 자신을 가만히 쳐다보곤 했다. 그 눈빛은 말로 표현하는 것 못지않게 사영의 마음에 짐을 얹었다.
은성을 더 힘들게 만드는 게 자신이라는 생각에 그를 볼 면목이 없다고 느끼기도 했다.
지금 생각하면 어처구니없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이제 와 은성을 특별히 원망하거나 그에게도 복수하고 싶은 마음을 품은 건 아니다.
그러나 그도 시키는 대로 할 뿐이었으니 어쩔 수 없었다고 이해하고 넘어가기엔 사영이 받은 상처가 너무 컸다.
사영은 은성을 이해했으나 그의 행동이 정당하거나 당연한 일이었다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다만 사영은 다짐했다. 잠시뿐이라도 내 매니저로 지낼 사람은 절대로 그런 일을 겪지도, 하지도 않게 하겠다고 말이다.
“저 다 먹었는데, 이제 출발할까요? 아니면 조금 더 기다려 드릴까요?”
우종은 순식간에 샌드위치 하나를 끝내고 물었다. 매니저로서 식사를 빨리 끝내는 건 당연히 갖춰야 할 소양이었다.
사영은 그런 우종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너 괜찮으면 출발해도 돼. 그리고….”
“……?”
“정말 시간이 촉박할 때 아니면 천천히 먹어도 돼. 알겠지?”
사영의 말에 우종은 잠시 멍한 표정을 지었다. 밥을 천천히 먹어도 된다. 그 말은 보통의 사람들에게는 정말로 아무것도 아닌 말이겠지만 매니저 일을 제법 오래 해 온 우종에게는 무게가 달랐다.
그가 아는 어떤 이는 시간이 많이 남아 있을 때조차 매니저가 뭘 느긋하게 먹는 꼴을 보지 못했다.;
매니저라면 하루 24시간을 온전히 연예인을 위해 언제든지 움직일 수 있는 상태로 대기해야 옳다고 여기는 사람들이 이 바닥에는 생각보다 많았다.
그런 연예인의 매니저는 시간이 있든 없든 늘 10분 내로 밥을 마시듯 먹고 연예인의 옆에서 수발을 들며 기다려야 했다.
순간 머릿속에 너무 많은 생각들이 차올라서, 우종은 결국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몸을 돌려 운전대를 잡았다.
“…커피 천천히 드세요. 조심해서 갈게요….”
“응. 고마워.”
사영은 우종의 속에서 어떤 감정의 폭풍이 몰아치는지 짐작도 하지 못한 채 대답했다. 커피를 홀더에 꽂아 놓고 샌드위치 포장을 절반만 벗겼다.
우종에게 한 대답과는 다르게 간밤에 잠을 거의 자지 못한 터라 입맛이 없었지만 오늘 하루 일정을 소화하려면 뭐라도 먹어 두어야 했다.
게다가 오늘은 한재우와 촬영장에서 처음 합을 맞추는 날이다. 감정의 소모가 클 게 분명했으니 속을 든든히 채워 두는 게 좋았다.
사영은 샌드위치 끝을 작게 베어 물며 대본을 펼쳤다. 강무성과의 첫 신이 적힌 종이 위에는 다른 곳보다 더 빽빽한 메모들이 가득했다.
영화를 촬영하면서 중요하지 않은 장면이 어디 있겠냐마는 사영에게 있어 이 장면만큼 큰 의미를 가지는 장면은 또 없었다.
다시 한재우의 앞에 한 사람으로, 한 명의 배우로 서기 위해 사영은 7년의 고통과 죽음을 이겨 내고 돌아왔다.
내가 과연 그의 앞에서 잘 해낼 수 있을까. 한재우에게 비웃음을 사지 않고 제대로 해낼 수 있을까. 그런 걱정이 밀려올 때마다 사영은 지난밤 유준이 제게 해 준 말들을 떠올렸다.
잘했다고. 누구라도 그렇게 생각할 거라고. 나는 결코 연기에 있어선 빈말을 하지 않는다고.
당신은, 사람들의 생각을 바꾸게 될 거라고.
그렇게 말해 주던 유준의 목소리를 머릿속으로 수도 없이 되뇌었다.
결국 강무성을 가장 비참한 파멸로 밀어낼 서단우의 모습이 눈앞에 선명히 그려졌다. 사영은 그것이 한재우와 저의 이야기가 되길 진심으로 바랐다.
***
“너 윤사영이랑 아는 사이야?”
말을 뱉어 놓고, 유준은 진심으로 자신의 뺨을 치고 싶어졌다. 놀랍게도 방금 유준이 한 말은 제게 인사를 하러 찾아 온 까마득한 후배 도율을 향한 것이었다.
아직 어린 티를 다 버리지 못한 얼굴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유준을 보며 ‘네…?’ 하고 대답했다. 얼이 빠진 얼굴이었다.
다 변명 같겠지만 유준은 정말로 이럴 생각이 없었다. 이러고 싶지 않았다.
도율이 사영의 대기실로 들어가던 장면이 머릿속에서 잊히지도 않고 계속 맴돌았더라도 한참이나 어린 후배에게 이렇게까지 노골적으로 유치한 질문을 하고 싶지는 않았다. 정말이었다.
문제는 제 의지와 상관없이 제게 인사하는 도율을 보자마자 말이 멋대로 튀어 나갔다는 점이었다.
“아니, 그냥 사영 씨랑 친분이 있나 궁금해서.”
유준은 이 상황을 수습하기 위해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척 말을 덧붙였다.
그냥 별 의미 없는 아주 단순한 질문이었다는 듯 말이다. 같은 작품을 찍는 동료들에 대한 사소한 궁금증,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는 듯이.
다행히 도율은 얼었던 표정을 풀고 웃으며 대답했다.
“아, 아니요. 그런 건 아니고… 사실 제가 서단우 역 오디션에 참가했었거든요.”
“으음, 그랬어?”
“네. 그때 대기실에서 뵈었는데… 제가 어릴 때부터 윤사영 선배님 팬이었어서 인사를 드렸었어요.”
친절한 선배인 척 대꾸하던 유준의 표정이 이어진 도율의 말에 다시 미세하게 굳었다. 오디션 날 봤다는 이야기는 사영에게도 들었지만 팬이었니 뭐니 하는 소리는 처음이었다.
도율은 마치 그때를 다시 떠올리는 것처럼 꿈을 꾸는 듯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그때 제가 갑자기 들이대는 바람에 당황스러우셨을 텐데도 선배님이 친절하게 받아 주셨어요. 사실 어제 인사드리러 가면서도 기억해 주실까 싶었는데 너무 반갑게 받아 주셔서….”
도율은 애써 차분하게 상황을 설명하고 있었지만 유준은 그의 목소리에 어린, 다 감추지 못한 설렘과 기쁨을 빠짐없이 느낄 수 있었다. 저와 대화를 나눴을 때완 완전히 다른 분위기였다.
애써 침착하게 가라앉혔던 감정이 다시금 불쾌하게 우글거렸다.
“이런 이야기 부담스러우시겠지만… 유준 선배님도 그렇고 제가 평소에 너무 좋아하고 존경하던 선배님들과 함께할 수 있어서 정말로 기쁘고 행복해요. 열심히 하겠습니다!”
그렇게 말하며 도율은 다시 한번 유준을 향해 허리를 깊이 숙여 인사했다.
그러나 유준의 표정은 좀처럼 풀어지질 않았다.
예의상 저를 끼워 넣어 말하고 있긴 하지만 도율의 안에서 유준과 사영은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유준은 그걸 느끼지 못할 만큼 눈치 없는 사람이 아니었다.
평소라면 후배 한 명의 그런 말에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았을 것이다. 어차피 이 바닥에 유준을 선망의 대상으로 삼고 흠모하는 후배는 발에 챌 만큼 차고 넘쳤고 그중 한 명이 자신보다 사영을 더 좋아한다고 자존심 상할 만큼 옹졸하진 않았다.
그런데 지금은 달랐다. 신경이 쓰여 미칠 것 같았다. 저 어리고 해맑은 얼굴로 사영의 앞에서 ‘선배님!’하며 갖은 애교를 부릴 걸 떠올리면 후배고 뭐고 속이 뒤틀렸다.
차라리 왜 내가 아닌 윤사영을 더 좋아하느냐고 자존심 상해하는 옹졸한 선배가 되는 게 낫지, 이건 뭐 어떻게 설명하는 것도 불가능한 치졸한 마음이었다.
“…그래. 여기서 배울 수 있는 게 많을 테니까 열심히 해 봐.”
그나마 다행인 건 아직까지 유준이 그 속내를 전부 드러낼 만큼 망가지진 않았다는 점이었다. 가까스로 선배다운 그럴듯한 대답을 뱉은 유준은 뒤돌아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히 이상한 점을 눈치채지 못한 도율은 이따 다시 뵙겠다는 인사를 남기고 돌아갔다. 유준은 오늘 촬영 일정을 확인 중인 정민을 향해 입을 열었다.
“정민아.”
“네, 형.”
그리고 대답을 하며 제게 다가오는 정민을 보며 잠시 망설이다가, 곧 낮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너 가서….”
“네. 뭐 필요한 거 있어요?”
“…아니다. 아니야, 됐어.”
“왜요, 뭔데요. 말만 해요!”
갑자기 말을 하다 마는 유준의 모습에 정민이 찝찝한 표정으로 연신 되물었지만 유준은 아니라는 말만 반복하며 고개를 저었다.
어제 오지랖을 부리며 찾아간 것만으로도 민망하기 짝이 없는데 오늘 또 먼저 사영에게 연락하기가 껄끄러웠다.
그래서 정민에게 사영이 도착했는지 알아보라고 할 생각이었는데 다시 생각해 보니 그랬다간 정민에게 괜한 의심을 살 수도 있었다.
그러느니 차라리 내키지 않아도 사영에게 직접 연락하는 게 나았다.
또 짜증이 났다. 어제 제가 그렇게까지 해 줬으면 고마워서라도 오늘은 먼저 연락하고 인사도 해 와야 하는 거 아니냔 말이다.
뻔뻔하고 배은망덕한 윤사영 같으니.
유준은 정작 당사자에게는 닿지도 않을 불만을 머릿속으로 혼자 투덜거렸다. 품에서 휴대폰이 짧게 진동한 건 바로 그 순간이었다.
아직 무슨 알림인지 확인하지도 않았는데 입꼬리가 씰룩거렸다. 확신할 수 없는데도, 어쩌면 사영의 연락일지도 모른다는 예감만으로도 마음이 들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