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8
사방이 뻥 뚫린 야외에서 촬영하는 것보다는 낫지만 세트장 안이라고 해서 겨울의 추위를 완전히 막아 줄 수 있는 건 아니었다.
게다가 이른 아침 촬영이었기 때문에 밤새 찬 기운을 가득 머금은 세트장은 그야말로 얼음장이었다.
“안에 핫팩 더 붙여 드릴까요?”
“아니야. 됐어.”
유준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저를 살피는 정민에게 고개를 저으며 가볍게 대답했다. 시선을 살짝 들자 마지막으로 의상과 메이크업을 정돈 중인 한재우가 보였다.
허공에서 시선이 마주치자 재우가 먼저 살짝 눈인사를 해 왔다. 유준은 고개를 살짝 끄덕이는 것으로 대충 답을 하며 슬쩍 그의 눈치를 살폈다.
확실히 평소 제게 아는 척을 해 오던 한재우와는 근본적인 분위기가 달랐다. 늘 유준을 불쾌하게 만들던 특유의 질척거림을 찾을 수가 없었다.
유준은 어제부터 떠오르던 짜증스러운 가정이 자꾸만 실체를 띠는 것 같아 기분이 상당히 좋지 않았다. 오죽하면 차라리 전처럼 자신에게 찝쩍댔으면 하는 마음이 다 들 정도였다.
아무래도 지금 그의 관심이 자신보다는 사영에게 더 향해 있는 것 같아서 신경이 곤두섰다.
당장 오디션장에서만 해도 같이 연기하길 기다렸다는 둥 기대된다는 둥 말을 했었던 재우가 정작 함께 촬영할 수 있게 된 지금 제게 일언반구도 하지 않는 것만 봐도 그 이상함은 충분히 감지할 수 있었다.
오죽했으면 정민이 은근슬쩍 다가와 혹시 나 몰래 한재우랑 싸우기라도 한 거냐고 물었겠느냔 말이다. 유준이 느낀 이질감은 단순히 기분 탓만은 아닌 게 분명했다.
유준이 그런 생각들을 하는 사이 어수선하던 공간이 하나둘 정리되기 시작했다. 그 순간, 제 자리에 앉아 화면 구도를 점검하던 감독이 누군가를 반갑게 맞이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윤 배우 어서 와요.”
대기하고 있던 유준과 재우는 물론이고, 근처에서 각자 할 일에 집중하던 스태프들의 시선이 한쪽으로 쏠렸다.
그곳에는 갑작스러운 집중에 쑥스러운 얼굴을 한 사영이 조심스럽게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사영은 먼저 제게 아는 척을 해 준 감독에게 다가가 예의 바르게 인사를 하며 말했다.
“안녕하세요, 감독님. 두 분 연기하는 걸 보면서 저도 감정을 잡고 싶어서 왔는데 괜찮을까요?”
“그럼요, 물론이죠. 우리 배우가 이렇게 자처해서 열심히 해 주면 나야 고맙지.”
“아닙니다. 그냥 제가 아직 부족해서 더 배워야 하는 것뿐이에요.”
그와 동시에 비하인드 신을 촬영 중인 카메라가 가까이 다가와 감독과 사영을 한 화면에 담았다. 감독이 다시 입을 열었다.
“여기 앉아서 볼래요?”
“아, 아니요. 저는 그냥 여기 뒤에서 서서 볼게요. 그게 편해요.”
“음, 그래도 보다가 힘들면 앉아서 봐요.”
그게 뭐 그렇게 식겁할 일이라고 양손을 거세게 저어 대는 사영의 모습에 감독이 너털웃음을 지으며 사영의 옆에 간이의자를 놔 주라고 손짓했다.
주위의 스태프들은 그런 감독과 사영의 모습을 신기하다는 듯 쳐다보고 있었다.
사실 사영은 스태프들 사이에선 가장 신비로운 배우로 꼽히고 있었다.
가장 유명하고 인기가 많은 배우는 당연히 유준이었지만 오랫동안 최고의 자리에서 열심히 일을 해 온 이인 만큼 이미 그와 안면을 튼 스태프도 적지 않았다. 재우 역시 근 몇 년간 손에 꼽게 다작을 한 배우였고 말이다.
하지만 사영은 연기를 쉬었던 건 말할 것도 없고 결혼 이후 외부 노출이 거의 없었던 사람이다. 시끄러운 소문을 들은 게 아닌, 그를 직접 마주하고 겪어 본 이들이 극도로 적었다.
<하지> 촬영도 이제 막 시작된 탓에 아직까지 현장에서도 그를 직접 대해 본 이들이 많지 않은 실정이었다. 사영에 대한 개인적인 평가나 감정은 각자 다르겠지만 그를 궁금해하는 이들이 많은 건 당연했다.
그러나 이 자리에 있는 그 누구도, 지금 유준과 재우만큼 윤사영에게 온 신경이 집중되어 있진 않았다.
창백하긴 해도 걱정했던 것보다는 나쁘지 않아 보이는 사영의 얼굴을 잠시 바라보던 유준은 황급히 시선을 돌려 한재우를 보았다. 그가 과연 어떤 눈으로 사영을 보는지, 가면을 쓰기 전 얼굴을 확인할 필요가 있었다.
재우는 진심으로 놀란 얼굴이었다. 어제도 사영이 유준과 재우의 촬영 현장을 모니터하긴 했지만 오늘도 그럴 줄은 미처 예상치 못한 모양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재우는 사영이 오늘 저와의 촬영을 앞두고 완전히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자신이 지켜보는 앞에서 연기하기도 쉽지는 않겠지만 하물며 그와 한 화면에서 서로 대사를 주고받으며 함께 연기해야 하는 어려움에는 비할 바가 못 될 터였다.
재우는 촬영 바로 직전까지 사영이 그 부담을 절대로 쉽게 떨쳐 내지 못할 거라고 장담했다.
그런데 지금 눈앞에 있는 사영은 재우가 예상했던 모습과는 전혀 달랐다. 그는 조금 긴장한 것처럼 보이긴 했지만 얼어 있지 않았다. 겁을 집어먹은 것처럼 보이지도 않았다.
한재우 앞에서는 결코 할 수 없었던 얼굴을. 재우가 절대로 허락하지 않았던 그런 얼굴을. 사영은 하고 있었다.
순간적으로 얼굴을 확 굳혔던 재우는 곧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를 깨닫고 표정을 관리했다.
사람들 앞에서는 사영을 보고 애달파할지언정 화를 내거나 거슬리는 표정을 지어서는 안 됐다. 그건 그간 자신이 만들어 온 이야기와 어울리지 않았다.
재우는 사영의 등장에 다소 긴장한 것처럼 눈을 깜빡이다가 이내 숨을 깊이 내쉬며 제 감정을 다독이는 것처럼 자신을 꾸몄다.
유준은 그의 미세한 표정 변화를 전부 다 눈에 담았다. 그것만으로 지금 재우가 사영에게 느끼는 감정이 무엇인지 전부 다 알아낼 순 없었지만 적어도 그가 사영에게 지나치게 흔들리고 있다는 것만큼은 분명했다.
정말 한재우는 윤사영에게 아무런 관심이 없을까. 사영과 이혼한 후, 정말로 마냥 홀가분하기만 했을까.
달라진 윤사영을 다시 마주한 지금, 사영의 예상대로 정말 그를 전처럼 지긋지긋하게만 여기고 있을까. 정말 그럴까.
신경 쓰지 않는 척하면서도 연신 사영을 힐끔거리는 걸 참지 못하는 재우를 보며 유준은 주먹을 꽉 쥐었다.
어쩌면 정말로 계획을 수정해야 할 수도 있다는 사실이. 어쩌면, 사영이 자발적으로 이 복수를 없던 일로 돌릴 수도 있다는 사실이 현실적인 무게를 가지고 유준의 가슴을 답답하게 만들었다.
지금 정확하게 알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는데 왠지 모르게 입맛이 썼다. 속내를 알 수 없는 사영은 무감한 표정으로 두 사람을 쳐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
“컷!”
감독의 외침과 함께 차갑게 얼어 있던 적막이 깨졌다. 은밀하지만 날카로운 기세로 맞부딪히던 두 사람의 시선이 감독에게 향했다. 심각한 표정으로 카메라 화면을 말없이 보던 감독이 입을 열었다.
“재우 씨.”
“네, 감독님.”
“좋아요. 좋은데… 지금보다 힘을 살짝 빼고 가 볼까요? 지금 본격적으로 부딪히는 신이 아닌데 너무 힘이 들어가 있어.”
“…네. 알겠습니다.”
감독의 지적에 대답한 재우는 입술을 깨물었다. 한 번에 완벽하게 끝내려고 했는데 실패했다. 더 짜증스러운 건 힘을 빼라는 감독의 말이 정확한 지적이었다는 점이었다.
재우는 평소 편안하고 자연스러운 연기를 하는 것으로 유명한 배우였다.;
오랫동안 무명 생활을 해 오면서 꼼꼼하게 다져진 연기력이다. 어떤 상황의, 어떤 배역이라도 이미 수백 번은 해 본 것처럼 자연스럽게 할 자신이 있었다.
그런 자신이 힘을 빼라는 지적을 받았다. 주연급 배우가 된 후 처음 들어 보는 말이었다.
잘 모르는 이들은 일상생활 연기와 사극 연기는 다르고, 당연히 어느 정도는 힘이 들어갈 수밖에 없다고 얘기할지도 모르지만 연기에 무게감을 더하는 것과 힘이 들어가는 건 다른 문제였다. 재우는 그 점을 알았다.
“유준 씨는 지금 좋아. 그대로 가요.”
이어진 감독의 말은 재우의 자존심을 한층 더 긁기에 충분했다.
일부러 그러는 건 아닌 것 같았지만 일부러 하였다 해도 할 말이 없었다. 직전 유준의 연기가 충분히 좋았다는 건 재우 역시 느끼고 있었으니 말이다.
재우는 후, 하고 숨을 짧게 한번 내쉬고는 고개를 돌려 근육을 이완시켰다. 윤사영 때문은 아니다. 사영은 자신에게 그만큼의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재우는 오히려 사영에게 자신이 연기하는 모습을 보여 주고 싶었다. 자신이 얼마나 빛나는지. 초라한 지금의 너 따위와 내가 얼마나 다른 자리에 서 있는지 그에게 확인시켜 주고 싶었다.
그런 재우에게 지금과 같은 상황은 오히려 즐거워야 했다.
재우의 시선이 감독의 옆쪽으로 향했다. 심각한 표정으로 촬영을 지켜보던 사영은 현재 감독과 딱 붙어 그의 말을 듣고 있었다.
모니터 화면을 보는 사영의 얼굴에서는 좀처럼 감정을 읽어 낼 수 없었다.
“괜찮아요?”
곁에서 불쑥 목소리가 들린 건 바로 그 순간이었다. 고개를 돌리자 언제 다가왔는지 가까이에 서 있는 유준의 모습이 보였다.
그는 재우가 무슨 대답을 하기도 전에 손을 들어 재우의 어깨를 툭툭 치더니 말했다.
“너무 긴장하지 말고 편하게 해요.”
그리곤 생긋 웃어 주기까진 하고 자리로 돌아가는 것이다.
“…….”
재우는 순간적으로 튀어나오려던 욕을 씹어 삼키고 유준을 쳐다보았다.
반응을 살피려는 건지 뭔지, 그의 시선은 여전히 재우에게 향해 있었다. 재우는 그 눈을 똑바로 마주 보며 마찬가지로 부드럽게 미소를 짓고 ‘고마워요.’ 하고 입 모양으로 말했다.
유준의 의도를 완벽하게 파악할 순 없었지만 그게 무엇이든 괜히 동요하는 모습을 보여 줄 필요는 없었다.
그의 손이 닿았던 어깨에는 기분 나쁜 감각이 남아 있었다. 전이었다면 분명 반겼을 만한 상황인데 자존심이 상했다.;
사람 좋은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이건 분명 유준이 먼저 도발해 온 게 틀림없었다.
경쟁심을 느끼기라도 하는 건가. 제 자리를 넘보지 못하도록 이참에 기라도 죽이겠다는 건가.
유준이 현장에서 상대 배우와 기싸움을 했다는 소리는 들어 본 적이 없었다.
당연한 일이다. 그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명실상부 대한민국 최고의 배우였다. 그런 이가 굳이 그렇게까지 신경 쓸 대상이 얼마나 있겠느냔 말이다.
재우는 머리끝까지 차오른 불쾌감을 서서히 진정시켰다. 따져 보면 지금 유준이 제게 보이는 태도는 그다지 나쁘지 않았다. 그가 자신을 경계한다는 건 그만한 경쟁 상대로 인식한다는 뜻이었다.
“선배님.”
그때 저만치에서 거슬리는 목소리 하나가 들려왔다. 낯익지도 않고, 크지도 않은 목소리였지만 선배님이라는 호칭이 귀에 꽂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