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복수하는 회귀자를 사랑하는 법-84화 (84/193)

#084

“사영 씨, 괜찮아요?”

허망하게 남겨진 제 손을 쳐다보는 재우의 귓가에 걱정과 염려를 가득 담은 유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재우는 느리게 눈을 깜빡이며 지금 제 눈앞에 펼쳐진 상황을 이해해 보려고 애썼다.

“네. 저, 저 괜찮아요. 그냥 잠깐 삐끗한 거예요. 그런데 유준 씨가 여긴 왜….”

이 상황이 당황스러운 건 사영 역시 마찬가지인 것 같았다. 그 사실이 재우의 기분을 더 껄끄럽게 만들었다. 사영이 일부러 이 상황을 만들려 의도했던 거라면 그가 이렇게까지 놀랄 이유는 없었다.

재우의 시선이 유준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혹시나 다른 꿍꿍이가 있는 건 아닌지 파악하기 위해서였다.

유준은 옆에 재우가 있다는 사실은 안중에도 없는 듯 오로지 사영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염려가 가득한 표정이었다.

“왜긴요. 사영 씨 촬영하는 거 구경하러 왔지.”

“아….”

“사영 씨는 매번 와서 보면서, 저는 안 됩니까?”

유준의 목소리는 친밀한 사람을 대하는 것처럼 지극히 자연스러웠다. 재우의 눈이 가늘어졌다.

어제 사영에 대해 물었을 때, 유준은 분명 사영이 퇴원한 후 따로 연락한 적이 없다고 대답했다. 그래서 사영의 상태도 잘 알지 못한다고 말이다.

그때 윤사영에 대해 이야기하던 유준에게서는 그 어떤 친밀함도 느낄 수 없었다. 그런데 고작 하루가 지났을 뿐인 지금은 마치 사영과 막역한 사이라도 되는 것처럼 굴고 있었다.

하루 만에 친해졌거나, 그게 아니라면 재우의 앞에서 숨긴 무언가가 있다는 말이었다.

“아니요. 안 된다는 게 아니라….”

“이제 촬영할 장면이 중요한 장면이기도 하잖아요. 그래서 보러 왔죠.”

“아, 네….”

그리고 유준은 마치 이제야 발견한 것처럼 시선을 돌려 재우를 쳐다보더니 말했다.

“재우 씨도 있었네요.”

“네. 같이 대기 중이었어요.”

유준이 말을 걸자마자 재우는 재빨리 표정 관리를 하며 부드럽게 그의 말을 받았다. 속이 어떻든 그의 앞에서 솔직하게 전부 티를 내서는 안 될 것 같았다.

아니, 유준도 유준이지만 이 자리에는 사영이 있다. 당황스러움이든 뭐든 윤사영 앞에서는 여유로운 모습 말고는 무엇도 보여 주고 싶지 않았다.

“기대하고 있어요.”

그때 유준이 몸을 살짝 돌려 재우를 똑바로 마주 보며 말했다. 수려한 선을 그리는 눈매는 분명히 웃고 있었는데 이상하게 재우는 그 시선이 꼭 저를 향한 경고처럼 느껴졌다.

지금껏 유준이 제 앞에서 호감을 표시한 일은 한 번도 없었다. 그래서 재우는 그의 경계심이 딱히 낯설지 않았다. 오히려 재우는 그가 제게 날을 세울 때마다 오히려 더 몸이 달아오르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 김유준의 시선은 어딘지 모르게 낯설었다. 이전과는 분명히 다른 느낌이었다.

무어라 명확하게 설명할 수 없는 느낌에 재우가 고민에 빠지려던 순간, 저만치서 촬영 시작을 알리는 스태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제 가 봐야겠네요.”

재우의 말에 유준은 별말 없이 슬쩍 몸을 틀어 길을 비켜 주었다. 솔직히 재우는 그들이 무슨 대화를 하는지 마지막까지 듣고 싶었지만 꼴사납게 얼쩡거리는 건 사양이었다.

“잘 부탁해, 사영아.”

재우는 유준의 시선을 흘려버리며 사영에게만 한마디 말을 더 남겼다.

김유준이 끼어들지만 않았다면 촬영에 들어가기 전 사영을 좀 더 흔들어 놓을 수 있었는데. 아쉬운 마음이 들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어쨌든 사영은 자신과 함께 카메라 앞에 서는 것만으로도 상당한 부담을 느낄 테니 일단은 여기에서 물러나야 했다.

사영은 어차피 자신의 손아귀에 있는 사람이다. 변수는 김유준이었다. 도대체 유준이 무슨 의도를 가지고 행동하는 건지 짐작하기가 쉽지 않았다.

정작 그는 의도 같은 건 없이 내키는 대로 움직이는 것일 수도 있겠지만 그의 본심이 그렇게 단순하진 않을 거란 생각이 자꾸만 들었다.

“거슬려….”

재우는 사영이 바로 따라오지 않는 것을 느끼며 작게 중얼거렸다. 시작부터 제 뜻대로 돌아가지 않는 분위기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

“어떻게 된 거예요.”

사영은 재우가 조금 멀어질 때까지 잠시 기다렸다가 뒤늦게 걸음을 옮기며 조용히 유준에게 물었다. 주변의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고 사영의 곁에 붙어 걸으며 유준이 말했다.

“윤사영 씨 도와준 거 아닙니까.”

“…….”

“또 한재우가 지랄하고 있을까 봐.”

거친 유준의 표현에 사영이 화들짝 놀라 주변을 살폈다. 그 모습을 보던 유준은 피식 웃음을 터트리며 말을 이었다.

“눈치 볼 필요 없어요. 내가 욕 좀 한다고 뭐 문제가 될 것 같아요?”

“아….”

유준의 대답에 사영이 작게 탄성을 터트렸다. 그의 말에는 틀린 점이 없었다.

설령 정말로 유준이 현장에서 욕을 했다는 사실이 공개된다고 하더라도 세상엔 그의 편에 서서 유준이 ‘그럴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찾아 줄 사람이 많을 것이다. 사영의 처지와는 달랐다.

“그리고….”

유준은 말을 이었다.

“응원도 할 겸.”

“응원이요?”

“네. 기죽지 말고 잘하라고요.”

사영은 하마터면 그대로 걸음을 멈출 뻔했다.

유준은 이미 대기실에서 제게 큰 힘을 주는 말을 해 주었다. 굳이 여기까지 와서 다시 말해 줄 필요는 없었다는 말이다. 그런데도 거듭 찾아와 자신을 챙겨 준 것이다.

재우가 한 말들에 묶여 있던 감정이 조금씩 가벼워지는 게 느껴졌다. 사영은 이미 모든 걸 감당할 준비가 되어 있었지만 유준이 와 준 덕분에 심한 말을 덜 들을 수 있었다.

유준이 끼어들지 않았다면 재우의 폭언은 절대로 거기에서 그치지 않았을 것이다.

“촬영할 때도 내가 보고 있을 거니까. 알겠어요?”

“네….”

사영은 카메라 세팅이 끝난 공간에 먼저 서 있는 재우를 보며 크게 심호흡을 했다.

연기를 하는 순간만큼은 자신이 가진 모든 약점을 내려놓아야 했다. 나약하고 쓸모없는 건 윤사영이지 서단우가 아니었다.

“내가 아까 했던 말 기억하죠?”

그리고 사영이 전쟁터나 다름없는 그곳으로 막 발을 내디디려 할 때, 유준이 말을 덧붙였다.

“한재우가 지금 나를 신경 쓰는 건 내 마음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내가 사영 씨 옆에 있어서예요.”

“…….”

“한재우 역시 이 촬영이 편하지만은 않을 거란 소리예요.”

사영은 조금 전 자신이 비틀거릴 때 유독 다정하게 저를 챙겨 주었던 유준의 손길을 기억해 냈다.

유준의 그 행동이 정말 그의 말대로 재우의 신경을 건드렸을까?

사영은 확신할 수 없었다. 그보다는 그냥 유준과 친근한 사이인 것처럼 보이는 자신을 질투할했을 가능성이 더 클 것 같았다.

“두고 봐요.”

하지만 카메라 안쪽으로 걸음을 옮기는 자신에게 말하는 유준의 목소리는 너무나도 자신만만하게 들렸다.

사영은 혼란스러운 생각들을 정리하려 애쓰며 재우가 서 있는 곳을 향해 걸었다.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주변에 어색한 적막이 흐르는 게 느껴졌다.

두 사람이 함께 있다는 건, 함께 연기를 하게 되었다는 건 그만큼 특수한 상황이었다.

사영은 제가 등장해야 하는 위치에 섰다. 그리고 저를 보는 재우의 눈빛을 피하지 않고 똑바로 마주했다.

단순히 사영이 거슬려서든, 질투하는 것이든, 유준을 가지고 싶어 안달이 나서든 그가 정말 흔들린 거라면 지금이 기회였다.

이번 생에서만큼은 절대로 그가 원하는 대로 얌전히 숨죽이고 있지는 않을 거라는 걸 한재우에게 똑똑히 보여 줄 차례였다.

***

“정녕 너는 내가… 안중에도 없는 것이냐?”

겨우 참고 참았던 감정이 폭발한 무성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하지만 처음부터 그의 앞에서 깍듯하고 정중한 모습을 보였던 단우의 태도에는 변함이 없었다.

연못에 반사된 달빛이 단우의 얼굴을 환하게 비췄다.

티 하나 없이 희고 고운 저 얼굴을 얼마나 그리워했는지, 유순한 얼굴을 하고서도 세상에서 가장 잔인하고 무정한 사내는 결코 짐작할 수 없으리라.

시선을 내린 채 무성과 눈을 마주치지 않는 단우가 입을 열었다.

“저는 그저 종묘와 사직을 생각할 뿐입니다. 어찌하여 나랏일에 사사로운 감정을 논하겠습니까.”

“그러면, 내 형님에게도 사적인 감정을 가진 적 없다 그 말이냐?”

“…….”

여태 무슨 말을 해도 망설임 없이 야속한 대답만을 늘어놓던 단우의 말문이 처음으로 막혔다. 무성은 제 심장이 천 갈래로 찢어지는 듯한 고통을 느꼈다.

그 누구보다 나라를 위하는 그가 선택한 주군이 자신이 아니라는 것도, 그의 마음속에 있을 정인의 자리조차 제가 차지할 수 없다는 것도 전부 다 비참했지만 그 무엇보다 무성을 고통스럽게 하는 건 제 마음이 그럼에도 포기가 되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그 마음이 자신은 물론이요, 대의를 망치게 될 싹이 될 수 있다는 걸 알면서도 도무지 눈앞에 있는 사내를 향한 마음을 단념할 수가 없었다.

자연스럽게 무성의 원망은 하나뿐인 제 형님이자 이 나라의 세자인 무진에게로 향했다.

어째서 자신이 원하는 건 전부 다 형님이 가져간단 말인가.

무성 역시 왕실의 피를 물려받은 어엿한 왕자이고, 누구보다도 지극히 한 사내를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어릴 때부터 영민했고, 누구보다 매사에 열심히 노력했다.

그런데 왜. 이토록 고귀한 혈통을 타고 태어나서도 진심으로 원하는 걸 단 하나도 손에 넣을 수가 없느냔 말이다.

억울했다. 불공평했다. 이대로 얌전히 물러서기엔 제 마음이 너무나도 절박했다.

“…더 하실 말씀이 없으시면 이만 물러나 보겠습니다.”

단우는 마지막 질문에 대한 대답을 회피한 채 허리를 굽히며 인사를 올렸다. 무성이 그의 손목을 다급하게 붙든 건 바로 그 순간이었다.

“대군마마.”

“아직 내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다.”

“…놓아주십시오.”

“정녕 형님을 향한 너의 마음이 오로지 충절뿐이냐고 물었다.”

“저와 함께 있으셨던 게 알려지면 마마께도 좋지 않습니다.”

“대답하라.”

무성은 단우에게 위협적으로 다가서며 재차 물었다. 설령 그 대답이 제 가슴을 찢는다고 하더라도 단우의 입으로 정확하게 답을 듣고 싶었다.

네 연정의 주인은 누구냐고. 정녕 그 마음에 내가 들어갈 틈이 조금도 없는 것이냐고. 무성은 그 답을 듣고 싶었다.

이 순간만큼은 권력이든 세자의 자리든,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았다. 지금 중요한 건 단우의 진심, 그것 하나뿐이었다.

“대답해.”

서단우 역에 몰입해 있던 사영의 눈동자가 흔들린 건 바로 그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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