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7
재우는 잠시 대답이 없었다. 침묵 역시 긴장되는 건 매한가지였지만 적어도 곧장 윽박지르진 않았다는 점에서 조금은 안심할 수 있었다.
“그 정도로 신경 쓴단 말이지….”
그리고 이어진 재우의 중얼거림에 은성은 그제야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재우의 기분이 완전히 풀린 건 당연히 아니다. 다만 조금이라도 이 그물에서 빠져나갈 수 있는 틈이 생겨 다행이었다.
재우는 더 이상 은성에게 말을 걸지 않고 혼자 생각에 잠겼다. 은성의 대답이 완벽하게 딱 맞아떨어지는 건 아니었지만 많은 가정 중에서도 그나마 이해가 가는 말이기는 했다.
유준이 이제 와 질투를 유발하려 들 정도로 제게 마음을 두었을 거라고는 생각하기 힘들었다.
한재우는 자신의 매력을 자신했지만 특별한 사건도 없이 갑자기 자신을 향한 유준의 감정이 이렇게까지 달라졌을 것 같지는 않았다.
그렇다면 남은 건 유준이 정말로 윤사영에게 관심을 두고 있단 것이거나, 단지 자신을 견제하게 되었다는 것뿐인데 전자는 더더욱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재우는 굳어져 있던 몸을 그제야 편안하게 등받이에 기댔다. 은성의 추측을 바탕으로 지금껏 있었던 일을 곱씹어 보자 차근차근 모든 게 이해가 되기 시작했다.
만약 유준이 자신을 공격하고 깎아내리기로 마음먹었다면 쓰기 가장 좋은 패는 당연히 사영이었다.
“윤사영….”
재우의 입에서 그 이름이 다시금 흘러나왔다. 그러자 자연스럽게 오늘 촬영에서 보았던 그의 모습이 떠올랐다.
제 눈을 똑바로 바라본 채로, 그는 완벽하게 서단우를 연기해 냈다.
차라리 부러질지언정 제게 굽히지는 않을 사람이기에 더 그를 가지고 싶어 했던 강무성의 감정이 순식간에 재우의 마음을 파고들었다.
바라던 역이었다. 캐스팅이 확정되기 전부터 오랫동안 목표로 삼아 왔던 캐릭터였다. 이 일의 시작에는 유준이 있었지만, 강무성이라는 캐릭터는 그 자체로 탐이 날 만큼 충분히 매력적인 역이었다.
그래서일까. 재우는 달빛처럼 그를 비추던 조명 아래에서 잠시였지만 강무성의 절절한 감정을 통하여 사영을 보았다. 그를 가지고 싶어 안달이 났다. 윤사영이 아니라 서단우를 향한 감정이었다.
아무래도 역에 너무 몰입한 모양이라고 생각하며 재우는 사영을 떠올리자마자 괜히 저려 오는 손끝을 툭툭 털었다.
김유준의 같잖은 수작은 아마도 실패할 것이다. 유준은 윤사영을 잘 모르는 게 분명했다. 그가 어째서 지금 이 자리에 있는 건지, 재우를 앞에 두고서도 유준에게 장단을 맞춰 주는 이유가 무언지.
윤사영이 얼마나 지독하게 한재우를 사랑하는지.
유준은 그것을 알 리가 없었고 그러므로, 그의 모든 시도는 결국 실패하게 될 것이다. 재우는 자신했다.
***
“…….”
사영은 제 손에 들린 약통을 가만히 보고 있었다. 새로 뜯은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통은 벌써 절반이나 비었다.
요즘 약을 너무 자주 먹고 있다는 자각 정도는 하고 있었다. 오디션을 준비할 때도 그랬고 그 직후에도 계속해서 복용량이 늘었는데 촬영이 시작된 후로는 더욱 의존도가 높아졌다.
진정제 같은 약품도 아닌 페로몬 안정제인 걸 알면서도 마음이 불안해지거나 중요한 일을 앞두고 있을 때는 자연히 약을 찾게 되었다.
마치 이 약을 먹는 것으로 모든 실수를 묶어 두려는 것처럼 말이다.
아무리 불안하고 긴장해도 이 약을 먹으면 얼결에 페로몬을 흘리거나 갑작스러운 히트사이클을 맞는 일을 예방할 수 있듯이 다른 실수도 그렇게 예방해 줄 것만 같았다. 말이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멈출 수가 없었다.
사영의 손에서 약병이 달그락 소리를 내며 이리저리 굴렀다. 걱정스러워하던 우종의 목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
함께한 지 며칠 되지도 않은 사람이 벌써 이 약을 자주 먹는다는 사실을 의식한 것도 모자라 걱정하기까지 할 정도면 자신이 정말로 지나치게 복용하고 있단 뜻이었다.
하지만 매 순간 한재우를 마주치는 것으로도 모자라 그와 연기까지 해야 하는 마당에 이런 것에라도 의지하지 못하면 어떻게 무너지지 않고 버텨낼 수 있을지 막막했다.
실제로 이 약이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해도 상관없었다. 사영에게 필요한 건 자기암시였다. 고통스러운 상황을 실수 없이 끝마칠 수 있을 거라는 믿음이 필요했다. 안정제는 그 자기암시를 할 수 있는 수단이었다.
멍한 얼굴로 잠시 고민하던 사영이 습관적으로 약 두 알을 제 손에 덜었다. 남은 일정이 없으니 약을 먹을 이유가 없는데 저도 모르게 한 행동이었다.
그리고 물을 찾으려 사영이 막 침대에서 일어났을 때, 누군가가 호텔 방 문을 두드렸다.
사영은 번뜩 정신을 차리곤 문을 바라보았다.
「촬영 끝났어요」
「호텔 도착해서 씻고 갈 테니까 기다려요」
조금 전 유준에게 받았던 메시지가 불현듯 떠올랐다. 사영은 손에 덜어냈던 약을 다시 약통에 넣어 베개 밑에 숨기고 서둘러 문으로 다가갔다.
그사이 다소 조급하게 들리는 노크 소리가 한 번 더 들렸다. 사영은 크게 숨을 내쉬고는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예상한 대로 문 앞에는 유준이 서 있었다.
***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의자에 앉은 유준은 맞은편에 있는 사영을 괜히 힐끔거렸다. 대놓고 보지 말아야 할 이유가 있는 것도 아닌데 이상하게 그를 똑바로 보는 게 어색했다.
한곳에 함께 있는 게 처음인 것도 아니다. 오히려 그들은 단둘이 있는 게 더 익숙한 사이였고, 심지어 유준이 사영의 집으로 찾아간 날도 여럿이었다. 그런데도 왜 이렇게 낯선 기분이 드는지 알 수 없었다.
유준의 시선이 사영의 등 뒤쪽에 있는 침대로 향했다. 사영의 방은 침실과 거실이 합쳐져 있는 널찍한 객실이었다.
침실이 따로 분리되어 있는, 이보다 더 좋은 방을 주겠다는 호텔의 제안을 거절한 건 사영이었다. 잠만 자고 나갈 건데 그렇게까지 넓은 곳은 필요 없었다. 사영은 지금 있는 방도 혼자 쓰기에 너무 과하다고 여겼다.
하지만 바로 그 탓에, 유준은 지금 이 상황이 불편하기 그지없었다. 아마도 저 침대 때문인 것 같았다. 침대가 왜 그렇게까지 눈에 거슬리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랬다.
머리카락에 물기가 남아 있는 사영의 모습은 유준의 불편함을 한층 더 심하게 만들었다.
“흠흠.”
유준은 괜히 헛기침을 했다. 분명 상의할 게 있어서 온 건데 머릿속이 하얗게 비어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 순간 유준의 시선이 테이블 위에 얌전히 모아져 있는 사영의 손으로 향했다. 유준이 입을 열었다.
“손목 좀 봐요.”
사영 역시 긴장하고 있었던 건지 유준의 목소리가 들리자 어깨를 흠칫 떨었다. 그는 손목을 내보이기는커녕 오히려 테이블 아래로 감추더니 대답했다.
“그냥 조금 멍들었어요. 괜찮아요.”
“알았으니까 좀 보자고요.”
“…….”
“빨리.”
물러나지 않고 계속 요구하는 유준의 말에 사영이 할 수 없이 재우에게 붙들렸던 손을 조심스럽게 내밀었다. 유준은 낚아채듯 그 손목을 붙들고 살피기 시작했다.
“씨발….”
그러려고 한 것도 아닌데 욕이 튀어나왔다. 아까 현장에서 확인할 때는 붉기만 했던 곳이 이제는 아예 시퍼렇게 변해 있었다.
“…괜찮아요. 보기에만 이렇고 별로 아프지도 않아요.”
유준의 욕을 의식한 건지 사영이 팔을 당기며 말했다. 그러나 이미 유준의 손에 잡힌 팔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유준은 잠시 제 한 손 안에 들어오는 사영의 가느다란 손목을 쳐다보기만 했다. 제대로 힘을 주면 정말로 부러트릴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이토록 연약한 팔을 있는 힘껏 붙들었던 한재우의 모습이 떠올랐다. 강무성의 의상을 입은 한재우의 모습은 유준의 상상 속에서 어느 틈엔가 전혀 다른 모습을 띠고 있었다.
유준은 본 적이 없는 과거의, 혹은 미래의 모습이었다. 사영을 그렇게 폭력적으로 통제하고 굴복시키던 한재우의 지난날들이 마치 직접 본 것처럼 선명하게 그려졌다.
“놓아주세요.”
유준이 그 상상에서 벗어난 건 사영이 조금 더 힘주어 팔을 당기며 말했을 때였다.
유준은 그제야 잡고 있던 손에 힘을 풀었다. 사영은 치부를 감추듯 서둘러 소매를 내리며 멍이 든 손목을 가렸다.
재우는 늘 사영을 함부로 휘둘렸다. 비단 정신적인 부분에만 한정되지는 않았다.
사영의 손목을 쥐거나 몸을 붙들 때 재우는 사영이 아플까 봐 힘을 조절하는 법이 없었다. 그의 손이 닿았던 부분은 언제나 시퍼런 멍이 남곤 했다.
사영에게는 정말로, 익숙한 일이었다는 말이다.
방에는 다시 어색한 적막이 흘렀다. 사영은 유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는 화가 난 걸 참고 있는 듯한 표정이었는데 무엇 때문에 그러는지 짐작하기 어려웠다.
어쩌면 자신의 태도가 또다시 그의 신경을 거슬렀는지도 몰랐다. 최근엔 좀 덜하긴 했지만 사영은 제가 유준의 기분을 자주 상하게 했던 걸 기억했다.
사과를 해야 하나. 이유도 모르면서 또 습관적인 사과를 늘어놓는 게 그를 더 화나게 하진 않을까.
사영이 그런 고민을 거듭하고 있을 때, 다행히도 유준이 먼저 말을 꺼냈다.
“아까 내 말, 생각해 봤어요?”
사영은 성급하게 무슨 말이냐고 되묻는 대신 오늘 그와 나누었던 대화를 빠르게 되새겼다.
늦은 시간까지 촬영해서 안 그래도 피곤할 텐데 멍청하게 굴어 그의 시간을 낭비하고 싶진 않았다. 사영이 대답했다.
“정말 그게 먹힐까요?”
“적어도 내가 대놓고 한재우를 꼬시는 것보다는 훨씬 승산 있는 일이라고 생각하는데.”
“…제가 김유준 씨 곁에서 알짱거리면 그 사람 신경을 건드릴 수는 있을 거라 생각하지만….”
사영은 말끝을 흐렸다. 말한 그대로였다. 재우는 자신의 모든 것을 싫어했다. 그런 자신이 유준에게 다가간다면 짜증스럽고 꼴 보기 싫기야 할 것이다.
하지만 그게 재우에게 유의미한 타격이 될 수 있을까.;
사영은 그 부분이 의심스러웠다. 사영은 단순히 그를 기분 나쁘게 만들려는 게 목적이 아니었다. 그가 절망하도록 만들고 싶었다. 비참해지길 바랐다.
자신처럼 죽음에 이르게 만들려는 것은 아니더라도 그에 준하는 고통을 느끼길 바랐다. 그래서 사영은 유준의 말대로 계획을 쉽게 수정할 수 없었다.
“저는… 그 정도로는 만족할 수가 없어요.”
“하아….”
유준의 입에서 한숨이 흘러나왔다. 사영은 죄인처럼 고개를 숙였다. 당연히 사영을 다그치기 위해 쉰 한숨은 아니었기 때문에 유준의 심정은 더더욱 복잡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