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2
“저는 그게 아니라….”
“왜 자꾸 한재우한테 여지를 줍니까? 정말 그 새끼가…!”
말을 이어 가려던 찰나, 유준의 머릿속에서 강력한 제동이 걸렸다.
제 불안함으로 인해 떠오른 억지스러운 말을, 사영을 상처 입히는 것 외에는 아무런 의미도 가질 수 없을 말을 뱉지 말라고 경고하고 있었다.
그러자 유준의 마음 안에서 일종의 방어기제가 발동하듯 반발심이 튀어 올랐다. 윤사영이 상처받는 것 따위가 뭐라고 내가 하고 싶은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한단 말인가.
정말 그 새끼가 당신한테 무슨 짓을 해 줬으면 해요? 그걸 바라고 알짱거리는 겁니까?
그래서 유준은 그 말이 부당하고, 저질스러우며, 치졸하고 폭력적인 말이라는 걸 알면서도 오로지 사영을 상처 주고자 말을 내뱉고 싶었다. 그러려고 했다.
“…….”
“…….”
하지만 유준은 결국 그 말을 뱉지 못했다. 차마 뱉을 수가 없었다. 그렇게 말해 봤자 속은 전혀 후련해지지 않는다는 걸 유준은 이미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내색하진 않더라도 한재우와 단둘이 나누었을 대화가 사영에게 좋았을 리 없다. 분명 또 온갖 헛소리를 들었을 거다.
설령 그것들이 이미 사영에게 익숙한 말들이라고 해서 그 마음까지 정말로 다 괜찮지는 않을 것이다.
그래서 유준은 이미 흉터가 너무 많아 새롭게 새겨지는 상처는 보이지도 않는 그 눈동자를 마주하자 차마 저까지 한재우처럼 말할 수는 없었다. 그건 불가능했다.
그리고 침묵이 내려앉은 두 사람 사이로 예상치 못하게 말을 던진 건 사영이었다.
“고마워요.”
유준이 미간을 확 찌푸렸다. 지금 제가 무슨 말을 하려다 만 건지 알기는 하고 인사를 하는 건가 싶었다. 유준은 사영에게 저런 말을 들을 자격이 없었다.
그러나 사영은 멈추지 않고 말을 이었다.
“일부러 여기까지 저 찾아서 와 주신 거죠.”
솔직히 사영은 그 이유까진 다 알 수 없었다. 유준이 왜 그렇게까지 해 주는지. 어째서 그렇게까지 자신을 동정해 주는 건지 이해할 수도 없었다.
그러나 유준이 혹시나 자신이 한재우에게 몹쓸 짓을 당하고 있을까 봐 다급하게 와 주었다는 것만큼은 알아채지 못할 수가 없었다. 이유가 무엇이든 간에 말이다.
내도록 짜증스럽게 일그러져 있던 유준의 표정이 순간적으로 풀어졌다.
“뭐… 일부러라기보다는 우연히 사영 씨 매니저를 만나 가지고….”
“그래도요. 우연히 알게 되신 건데도 무시하지 않고 신경 써 주신 거니까.”
“네, 뭐… 그건 그런데….”
유준은 그답지 않게 멋쩍은 말투로 웅얼거렸다.
사영이 걱정돼 여기까지 헐레벌떡 뛰어왔다고 굳이 알리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낯 뜨겁기도 하고, 그 정도로 자신이 그를 중요하게 여기고 있다고 사영이 착각하는 것도 싫었다.
그렇다고 사영이 자신이 이렇게 노력한 걸 아예 모르고 넘어가는 건 또 싫었다. 정의할 수 없는 모호한 마음들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사라지길 반복했다.
사영은 칭찬을 부끄러워하는 소년처럼 이리저리 눈동자를 굴리는 유준을 보며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나려던 걸 꾹 참았다. 이 상황에 괜히 웃었다가 유준의 기분을 상하게 만들고 싶진 않았다.
그러다 사영은 문득 아직 제 손안에 있는 녹음기의 감촉을 느끼곤 입술을 깨물었다. 한재우의 말을 녹음했다는 걸 유준에게 알려야 할까, 하는 고민이 들었다.
처음 사영을 돕기로 한 그날부터 지금까지 유준은 한결같이 사영에게 경고했다.
이 일에 자신이 엮인 이상 숨기는 것 없이 모든 걸 전부 다 공유하고 같이 대처해야 한다고. 자기만 바보 만드는 짓은 절대로 용납할 수 없다고.
사영 역시 유준의 말에 동의했다. 유준과 사영은 동등한 계약 관계가 아니다. 사영은 일방적으로 유준의 도움을 받고 있었다. 그러니 이 계획에 영향을 줄 수 있는 건 그게 무엇이든 유준에게 공유하는 게 맞았다.
다만 망설여지는 건 이 녹음에 단순히 사영만을 모욕하는 말만이 담겨 있지는 않았던 탓이었다.
유준과 잤느니 무어니 하는 말들이 그의 귀에 들어갈 걸 생각하니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괜히 자신 때문에 이런 저질스러운 말을 듣게 될 유준에게 미안해 고개를 들 수가 없을 것 같았다.
김유준을 이 일에 끌어들인 그 순간부터 예견된, 피할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그렇다고 미안한 마음이 아예 없을 수는 없었다.
걱정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재우가 전생에 그랬던 것처럼 제 루머를 퍼트릴 때 유준의 이름을 엮지는 않을지 그것도 문제였다.
이것 역시 어느 정도는 당연한 수순이긴 했다. 예상 못했던 바도 아니다. 그런데도 막상 그 일이 실제로 닥칠 수도 있다는 생각에 다다르자 심경이 복잡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자신이 부족해서. 한심해서. 혼자서는 복수조차 시작하지 못할 만큼 나약해서 아무 책임도 없는 유준이 더러운 일에 말려들었다.
사실은 다른 방법이 있지 않았을까. 내가 너무 안일한 선택을 한 건 아닐까.
홀로 매몰되어 있던 상황에서 한 걸음 벗어나고 나서야 보이기 시작하는 현실에 사영은 자꾸만 마음이 움츠러들었다.
아이러니한 건, 이조차도 유준이 처음부터 함께해 주지 않았다면 스스로 깨닫지 못했을지도 모르는 감정이라는 점이었다.
“또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합니까?”
“네?”
깊어지는 사영의 상념을 멈추게 만든 건 유준이었다. 번뜩 정신이 든 사영이 고개를 들자 못마땅한 표정으로 저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는 유준의 얼굴이 보였다.
유준이 곧바로 말을 이었다.
“혼자서 생각하지 말아요. 또 무슨 헛생각을 할지 불안하니까.”
“아….”
“한재우한테 무슨 소리를 들었길래 그래요?”
유준은 제법 정확하게 사영을 파악하고 있었다. 잠깐이었지만 사영의 안색이 분명히 어두워졌었다.
단순히 재우에게 막말을 들어 그런 건 아닐 거라는 강렬한 예감이 밀려왔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거다.
“또 뭐라고 했길래 그렇게….”
“형!”
하지만 캐물어 대답을 들으려는 유준의 말은 끝까지 이어질 수 없었다. 뒤에서 유준을 다급하게 부르는 정민의 목소리가 들렸기 때문이다.
빠르게 달려온 정민이 숨을 헐떡거리며 말했다.
“형, 얼른 가요. 감독님 기다리고 계셔요.”
유준은 입술을 깨물었다. 사영의 이야기를 듣는 것도 중요했지만 여기에서 유준이 촬영보다 더 중요하게 여겨야 할 일은 없었다. 배우가 촬영에 지장이 갈 정도로 제멋대로 구는 걸 유준은 가장 혐오했다.
“형.”
그런데도 지금 이 순간 쉽게 발이 떨어지지 않는 이 마음을 도대체 뭐라고 설명하면 좋을까.
정민이 다시 한번 유준을 재촉하자 이번에는 사영 역시 나서서 유준에게 말했다.
“일단은 촬영부터 하고 오세요. 얘기는 나중에 해도 되니까요.”
“…….”
“괜히 저 때문에 죄송해요, 정민 씨.”
그러더니 사영이 이번에는 유준이 아닌 정민에게까지 고개를 살짝 숙이며 사과를 해 왔다.
유준이 촬영장으로 돌아가는 걸 망설이자 더욱 모난 눈으로 사영을 노려보던 정민은 갑작스러운 그의 사과에 뜨끔해 얼결에 같이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했다.
순간 유준은 왜 사영이 정민에게까지 사과하는지 짜증이 확 일었다. 그렇다고 자신을 걱정하며 덩달아 고생 중인 정민에게 뭐라고 할 수도 없었다.
결국 누구에게도 뭐라 하지 못하고 그냥 혼자 짜증을 내는 사람이 된 유준은 일단 사영을 향해 입을 열었다.
“오늘도 호텔에 묵을 거예요?”
사영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럴 것 같아요.”
“알았어요. 그럼 끝나고 봅시다.”
“…네.”
“가자.”
그제야 유준은 몸을 돌려 이미 준비가 끝났을 촬영장을 향해 걸었다. 안도의 한숨을 내쉰 정민이 사영의 눈을 보지도 않고 슬쩍 다시 고개를 숙여 인사하곤 재빨리 유준을 따라 걸었다.
촬영장에서 유준이 이렇게까지 속을 썩이는 건 처음 있는 일이었다. 겹겹이 쌓이는 불안감에 정민은 걷는 동안 연신 유준을 힐끔거렸다.;
시선을 눈치챘을 게 분명한 유준은 모른 척을 할 뿐이었다.
***
“우종아, 괜찮아?”
사영은 아까부터 조용한 우종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유준을 찾으러 온 정민을 따라왔던 우종은 사영에게 괜찮냐, 어디 다친 곳은 없냐, 하는 기본적인 질문을 한 뒤로 지금까지 계속 말이 없었다.
딱히 대화가 필요한 상황인 건 아니었다. 하지만 사영은 우종의 침묵에 어린 가라앉은 감정을 느꼈다.
“네, 저는 아무 일도 없어요. 이제 곧 촬영 들어가실 시간이니까 준비하시면 될 것 같아요.”
우종의 고저 없는 목소리를 들은 사영은 그의 기분이 좋지 않다는 걸 확신했다.
난데없이 임시 매니저를 하게 되고, 심지어 대단한 배우도 아닌 자신을 맡게 된 것 자체가 그에게는 썩 내키지 않은 일이었을 거다. 사영도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냉랭한 우종의 태도를 보자 어딘지 모르게 마음 한구석이 허전했다. 안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생각보다 사영은 우종을 제법 의지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핫팩 등을 챙긴다고 부지런히 움직이는 우종을 앉은 채로 가만히 보던 사영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우종아.”
“네.”
“내가 혹시 뭐 실수했어?”
그 순간 우종은 괜히 더 부산스럽게 움직이던 걸 멈추고 사영을 돌아보았다. 의자에 앉아 말간 얼굴로 자신을 올려다보는 사영이 오늘따라 유독 작아 보였다. 그는 명백히 우종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자 마음속에서 죄책감이 일었다. 일단 제 배우가 눈치를 보게 만들었단 점에서 매니저로서 실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