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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수하는 회귀자를 사랑하는 법-93화 (93/193)

#093

심지어 사영이 잘못한 게 있는 것도 아닌데 우종의 눈치를 본다는 건 말이 되지 않았다. 우종은 재빨리 사영의 앞에 마주 앉으며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아니에요. 그럴 리가요. 실수한 건 저예요. 괜히 제가 형 불편하게 굴어서….”

“아니야. 불편한 건 아닌데 그냥… 생각이 많아 보여서.”

우종은 입술을 깨물었다.

생각이 많아 보여서.

단순한 문장이었지만 사영이 얼마나 세심하게 상대를 배려하는 사람인지를 명확하게 보여 주는 말이었다.

기분이 나빠 보여서. 불편해 보여서. 화가 난 것 같아서.

사영이 만약 우종의 상태를 이런 식으로 표현했다면 이 대화는 우종의 사과로 끝날 수밖에 없다. 매니저인 우종이 부정적인 감정을 내비쳐 배우를 신경 쓰이게 만든 것밖에 되지 않으니 말이다.

하지만 사영은 그걸 두고 ‘생각이 많이 보여서’라고 말했다. 네 행동이 나를 불편하게 만든 게 아니라, 그냥 너의 그 태도가 나를 궁금하게 했다는 뜻이다.

사영의 뜻은 명확했다. 사과받고 싶은 게 아니라 우종의 기분을, 마음을, 생각을 알고 싶은 것이다.

그의 표현은 정확하게 그 마음을 담고 있었고 우종은 그걸 모를 만큼 눈치 없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래서 우종은 ‘잘못했습니다. 다신 안 그럴게요.’라고 사과하고 대화를 끝내는 대신 조금 더 깊은 속내를 꺼내 놓을 수 있는 용기를 얻었다. 우종이 말했다.

“그… 저는 임시 매니저에 불과하고 또… 형과 일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사람이니까 믿기 힘드실 거 알고 있어요.”

“…어? 아니, 그게 무슨….”

“죄송해요. 우선 제 이야기를 조금 더 들어 주세요.”

조금도 예상치 못한 우종의 말에 당황한 사영이 다급하게 입을 열었지만 이어진 우종의 말에 우선 말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우종이 말을 이어 갔다.

“저는 형의 사생활에 깊이 관여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도 알고, 어쩌면 이번 영화 촬영을 끝으로 다시 보지 못할 사람이 될 수도 있겠죠.”

“…….”

“하지만 그래도… 아무리 임시 매니저라도… 그래도 저는 매니저로서 제 소임을 다하고 싶어요. 이건 제 일이니까요.”

사실 그게 전부는 아니었다. 우종이 근 며칠 사이 연이어 벌어진 상황에 계속 마음이 불편했던 건 매니저로서 제 일을 제대로 하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이유도 분명히 있었지만, 그게 다가 아니었다.

“제가 맡은 배우가 위협을 받거나, 불편한 상황에 부닥치거나, 혼자 어려운 일을 감당하지 않도록 돕는 게 바로 제가 해야 할 일이에요. 그런데 제가 계속 그 일들을 다하지 못하고 있으니까….”

주제넘은 마음일 수도 있다. 오만한 감정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종은 진심으로 눈앞에 있는 이 사람이 다치지 않기를 바랐다. 단순히 매니저로서 배우를 보호해야 할 의무가 있어 가지게 된 감정이 아니었다.

어쩌면 우종이 사영에게 우호적인 회사에서 일을 해 왔기 때문일 수도 있다.

우종이 사영을 직접 만난 건 이번이 처음이었지만 오며 가며 회사 측을 통해 느낀 윤사영의 이미지는 대중적으로 알려진 것과는 전혀 달랐다.

게다가 우종은 지금은 매니저 일을 그만둔, 사영이 연예계를 떠나기 전까지 함께 일했던 매니저와 친분이 있어 종종 만나 술잔을 기울이기도 했다.

그가 구구절절 사영에 대해 개인적인 이야기를 늘어놓았던 건 아니다. 그러나 당시 최고의 주가를 올리고 있던 사영이 매니저에게 얼마나 좋은 사람이었는지 정도는 들을 수 있었다.

그렇기에 사영의 추측과는 다르게 우종은 윤사영의 임시 매니저로 가라는 회사의 명령이 싫지 않았다. 오히려 이 일을 반기기까지 했다.

그리고 지금은 하루가 다르게 그의 매니저 일에 진심이 되어 가고 있었다. 머릿속을 스치는 수많은 감상을 정리하려 애쓰며 우종이 말했다.

“아직 저를 대하는 게 조심스러운 건 저도 이해해요. 이해하는데 다만… 제가 매니저로서 형을 조금씩만 더 보호할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시면 좋겠어요.”

사영을 위해 한재우의 앞을 막아서야 하는 사람이 있다면 우종은 그게 매니저인 자신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임시든 뭐든, 제가 사영의 매니저라는 이름을 달고 있는 한 그건 변함없는 의무였다.

“제가 너무 주제넘은 소리를 했다면 죄송해요….”

말을 마친 우종이 고개를 살짝 숙이며 사과를 전했다. 어떤 배우는 매니저를 단순한 심부름꾼 정도로만 여겼다. 그런 이들에게는 우종이 말이 전부 우스운 헛소리처럼 들릴 것이다.

하지만 사영은 결코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걸 우종은 이미 알았다. 이토록 뻔히 눈에 보이는 걸 믿지 않고 자극적인 소문만을 즐기는 사람들을 이해할 수 없었다.

여태 우종의 말을 조용히 듣던 사영이 그제야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내가… 그러니까 내가….”

말을 시작하긴 했는데 이상하게 뒷말이 매끄럽게 이어지질 않았다. 우종의 말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탓이다.

우종이 예의 바르고 책임감 강한 사람이라는 건 알고 있었다. 갑자기 떠안게 된 내키지 않는 일을 이토록 성의껏 해 주는 사람이니 모를 수가 없었다. 그러나 우종이 이렇게까지 생각하고 있는 줄은 정말로 몰랐다.

사영은 제 일에 괜히 우종이 엮여 곤란한 상황에 처하게 되는 걸 원치 않았다.

사영은 복수를 위해 기꺼이 한재우 앞에서 모욕당할 각오가 되어 있었지만 우종은 그래야 할 이유가 없다. 그는 이 일과 전혀 상관없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우종이 행여나 자신 때문에 덩달아 재우에게 안 좋은 소리를 듣기라도 할까 봐 더 나서서 그를 밀어내곤 했다.

그런 사영에게 우종의 말은 너무나도 뜻밖이었다. 사영은 그가 할 수만 있다면 제 일에 덜 관여하고 싶어 할 거라고 생각했다.

“미안. 나는… 나 때문에 괜히 너까지 소란에 말려들게 하기 싫었어….”

한참을 더듬던 사영이 결국 조심스럽게 대답을 내어놓았다.

정 감독, 도율, 그리고 이제는 우종까지.

서단우를 하겠다고 마음먹은 순간부터 선물처럼 제게 찾아온 인연들이 너무 신기했다. 다시는 제 인생에 누군가를 얻게 될 날은 오지 않을 거라고 여겼는데 말이다.

죽기 전과 다를 바 없을 거라 여겼던 삶이었는데. 이미 망가질 대로 망가져 다시는 회복할 수 없을 영혼인 줄 알았는데.

그런데 문득 이 자리에 서서 보니 지난 생에는 꿈조차 꾸지 못한 인연이 벌써 몇 명이나 제 곁에 있었다.

사영은 무어라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이 차오르는 걸 느끼며 입을 꾹 다물었다. 실수로라도 입을 열었다가 꼴사나운 모습을 보이게 될까 봐 두려웠다.

다행히 먼저 자리에서 일어난 우종이 예의 그 씩씩한 태도로 말했다.

“제가 형 곁에 매니저로 있는 한 형 일이 곧 제 일이에요! 그러니까 미덥지 않더라도 앞으로는 조금만 더… 저를 믿어 주세요!”

“…그래. 그럴게. 고마워.”

과연 그럴 수 있을지 확신하지도 못하면서 사영은 결국 우종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상냥한 얼굴로 저를 보며 열의를 불태우는 이에게 차마 다른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우종은 사영이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기쁜 낯을 하더니 곧 핫팩을 더 가져오겠다며 대기실을 나섰다. 너무 진지한 이야기를 해 민망한 마음이 들어 그가 도망치듯 나갔다는 걸 사영은 알아채지 못했다.

대신 사영은 한 사람을 떠올렸다. 복수의 근원이 되는 힘이자, 시작점이자, 지난 삶과 가장 달라진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바로 그, 김유준을 말이다.

과거로 돌아오면서 사영은 지난 생에는 생각조차 해 본 적 없는 복수를 꿈꿨다. 그건 새로운 삶을 꿈꾸는 것과는 달랐다.

사영은 여전히 한재우에게 얽매여 있었고, 사랑이 아닐 뿐이지 사영에게 남아 있는 감정은 여전히 한재우 하나만을 위한 것이었다. 사영은 자신이 다시는 꽃피울 수 없는 죽은 나무인 줄 알았다.

그런데 문득 정신을 차리고 보니 새롭게 뻗어 나가는 가지가 보였다. 볼품없이 초라한, 생기 하나 없는 모양새를 하고도 그 가지는 부러지지 않고 겨울을 견디고 있다.

마치, 봄을 준비하는 것처럼. 봄이 오면 새싹을 틔우기라도 하려는 것처럼.

“내가….”

습관적으로 혼잣말을 중얼거리려던 사영은 이내 말을 더 뱉지 않고 입을 다물었다.

내가 과연 잘할 수 있을까. 이런 식의 하나 도움 되지 않을 자기 연민을 굳이 입 밖으로 흘리고 싶지 않았다. 잘 해내야 했다.

지난 생에서의 사영의 실패는 오로지 그 한 사람만의 실패였으나 지금은 달랐다.

이제는 아무런 이득도 없이 자신을 돕고 있는 유준이 얽혀 있었고, 서단우라는 주요 캐릭터를 맡은 이상 사영이 무너지면 영화의 완성도에도 역시 타격이 갈 수밖에 없었다.

내가 잘할 수 있을지 의심할 시간에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열심히 해야만 했다.

“형, 준비되셨어요?”

사영은 다시 대기실 안으로 들어와 묻는 우종에게 고개를 끄덕여 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사영에게는 자기 비하보다 더 중요한 일들이 있었다.

그날, 사영은 마치 한재우에게 모욕을 당한 일 따위는 전혀 없었다는 듯 촬영장에서 자신의 몫을 완벽하게 해냈다.

한재우의 예상과는 다르게 말이다.

***

사영은 무거운 몸을 느끼며 눈을 떴다. 정신이 멍했다. 눈꺼풀을 몇 번 깜짝이고 나자 앞의 정경이 서서히 눈에 들어왔다. 호텔 방이었다.

“언제….”

저도 모르게 중얼거리는데 목소리가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목이 잠기기도 했고, 목구멍이 따끔거리는 것 같기도 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머리가 띵하고 몸에 열이 있는 것 같기도 했다.

감기라도 걸린 건가. 사영은 불안함을 느끼며 몸을 천천히 움직여 보았다. 근육통이 있는 것처럼 온몸이 뻐근했다. 어정쩡한 자세로 침대에 기대 있던 사영의 손에는 펼쳐진 대본이 들려 있었다.

그제야 멍했던 정신이 돌아오며 상황을 제대로 파악할 수 있었다. 촬영을 마치고 호텔로 돌아와 유준이 올 때까지 대본을 보고 있으려 했는데 저도 모르게 잠이 들었다.

최근엔 꼭 자야 할 때도 복잡한 생각들 때문에 쉽게 잠을 이루지 못하곤 했는데 순식간에 잠든 걸 보니 확실히 컨디션이 좋지 않긴 한 모양이었다.

사영은 무거운 얼굴로 입술을 깨물었다. 정말로 감기라도 걸린 거면 어쩌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촬영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몸 관리도 제대로 못 했다는 소리는 듣고 싶지 않았다.

약이라도 구해서 먹고 자야 하나 생각하며 사영은 시간을 확인했다. 다행히도 생각보다 늦은 시간은 아니었다. 서둘러 휴대폰을 확인해 보니 아직 유준에게 온 연락은 없었다.

촬영은 아마 이미 마무리되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곧 유준이 올 테니 그 전에 정신을 차려야 했다. 그의 앞에서는 더더욱 아픈 티를 내고 싶지 않았다. 여기서 더 그에게 실망을 주고 싶진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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