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4
“아….”
세수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으로 몸을 일으키던 사영인 외마디 신음을 흘리며 그대로 다시 침대에 주저앉았다. 순간적으로 앞이 핑 돌았다.
별로 움직이지도 않았는데 몸이 열이 확 오르며 숨이 가빠 왔다. 벌어진 입술 사이로 밭은 숨이 흩어졌다. 사영은 한 손으로 이마를 짚은 채 시선을 다잡으려 애썼다.
딱히 몸에 무리가 갈 만한 일을 한 건 아니다. 촬영 스케줄도 버겁지 않았다. 아플 이유가 전혀 없었다. 사영은 나약한 제 몸과 마음을 탓하며 입술을 아프게 깨물었다.
어쩌면 오늘 한재우를 만난 일 때문인지도 모른다. 혼자서 그를 대하는 건 사영에게는 크나큰 심력을 소모하는 일이 분명하니 말이다.
하지만 그건 변명이 될 수 없었다. 그런 개인적인 사정으로 촬영에 영향을 주어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재우와 독대 한 번 했다고 앓아눕는다면 그보다 한심한 일은 또 없을 것이다.
사영은 잠시 눈을 감고 숨을 골랐다. 지금과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심하게 몸이 안 좋았을 때도 한재우의 앞에선 아무렇지 않은 척, 멀쩡한 척 이를 악물고 버텼다.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이내 눈을 뜬 사영은 덜덜 떨리기 시작하는 두 손을 모른 척하며 심호흡을 했다.
우종이 기본적인 비상약을 준비해 두었다고 말했던 게 떠올랐다. 유준이 다녀가면 약을 먹고 곧바로 자야겠다고 생각하며 사영이 막 몸을 일으켰을 때.
똑똑, 하고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사영은 떨리는 손을 의식적으로 털어 내며 문 앞으로 다가갔다.
컨디션이 안 좋은 것을 들키고 싶지 않아 표정을 가다듬은 사영이 곧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문을 열었다. 문 앞에 있는 사람은 예상했던 대로 김유준이었다.
***
“무슨….”
예고한 대로 촬영이 모두 끝난 뒤 사영의 호텔 방으로 온 유준은 문을 열자마자 느껴지는 이질감에 반사적으로 걸음을 멈췄다.
왜 그러냐고 묻는 듯한 표정을 하고 유준을 바라보는 사영의 얼굴은 평소보다 훨씬 더 창백했고 서 있는 것조차 힘들어 보였다.
그러나 정말 큰 문제는 사영의 안색 따위가 아니었다.
“윤사영 씨, 지금….”
“왜 그러세요?”
사영이 초조한 목소리로 물었다. 유준의 반응 때문에 불안함을 느끼면서도 그가 왜 이런 반응인지 짐작하지는 못하는 것 같았다.
유준은 미간을 찌푸린 채로 그런 사영을 잠시 쳐다보기만 했다.
문을 열자마자 아주 옅은 향이 코끝을 간질였다. 꼭 풀잎의 냄새를 맡은 것 같았다.
유준은 곧바로 그게 무슨 향인지 알아차렸다. 이전에도 분명 맡아본 적이 있는 향이었다. 틀림없었다. 사영은 지금 페로몬을 흘리고 있었다.
“…혹시 지금 몸이 안 좋습니까?”
유준은 덩달아 제 향을 일으키지 않기 위해 애쓰며 입을 열었다. 흐릿하다고 할 수 있을 만큼 미미한 향이 이상하게 유준의 감각을 날카롭게 건드렸다.
의도를 전혀 알 수 없는 유준의 질문에 사영은 당황해 연신 눈만 깜빡거렸다.
계속 몸이 좋지 않았던 건 사실이지만 그의 앞에서 딱히 티를 내진 않았다고 생각했는데 유준이 어떻게 이렇게 곧장 알아차린 걸까.
“아…!”
거기까지 생각이 닿은 사영이 갑자기 화들짝 놀라며 유준에게서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설마, 하는 불안감이 밀려왔다. 순식간에 온몸의 피가 차갑게 식는 기분이었다.
“제, 제가 혹시….”
사영은 차마 제대로 묻지도 못하고 한 걸음 더 유준에게서 물러났다. 유준은 아무런 말도 더하지 않았지만 불쾌한 듯 잔뜩 찌푸려진 표정이 사영의 추측을 뒷받침해 주었다.
사영은 저도 모르게 손을 들어 제 입을 틀어막았다. 머릿속이 하얗게 질리고 온몸이 주체할 수 없을 만큼 떨리기 시작했다.
서둘러 제 상태를 체크해 보려고 해도 몸이 안 좋기 때문인지, 아니면 당황해서인지 좀처럼 집중할 수가 없었다.
이럴 때를 대비해서 꼬박꼬박 안정제를 먹었던 건데 도대체 왜 이런 일이 벌어진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대처를 할 새도 없이 숨이 차올랐다. 귀가 멍해지고 앞이 어지러웠다.
시간과 공간이 기묘하게 일그러지는 감각이 이어졌다. 여기가 어딘지, 눈앞에 있는 사람은 누구인지. 정체를 알 수 없는 감정이 복받쳤고 사영은 빠르게 무너졌다.
“죄송, 죄송해요, 유준 씨. 제가 일부러… 일부러 그런 게 아니고, 제가….”
“사영 씨.”
“죄송해요. 자, 잘못했어요…. 제가 싸구려처럼 굴려는, 굴려는 게 아니고. 죄송해요….”
사영은 반사적으로 두 손을 앞으로 모으며 중얼거렸다. 재우는 이런 식으로 사영이 페로몬을 흘리는 걸 극도로 싫어했다. 히트사이클이 찾아와서든 아파서든 이유는 중요하지 않았다.
재우는 사영의 향을 끔찍하게 여겼고 사영이 제 허락 없이 페로몬을 흘리는 날에는 늘 평소보다 더 강도 높은 언어적, 육체적 폭력이 이어졌다. 사영의 눈동자가 서서히 초점을 잃어갔다.
“다신… 다신 안 그럴게요, 죄송해요….”
“윤사영.”
그런 사영의 반응 때문에 유준 역시 덩달아 패닉 상태에 빠졌다. 갑작스러운 향에 놀랐고 그게 다소 불편했던 건 사실이지만 이런 식의 사과를 원했던 건 아니다.
처음에야 사영이 아닌 척 자신을 유혹하려 들진 않을까, 의심하기도 했지만 이제는 윤사영이 그럴 사람이 아니라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처음 향을 맡았을 때도 다른 것을 의심하기보다 먼저 몸이 안 좋으냐고 물은 것이다. 사영이 자신을 유혹하려고 일부러 향을 흘렸으리라곤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다.
그런데 갑자기 사영이 이렇게 정신이 나간 것처럼 반응하니 놀라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
“…….”
하지만 이내 유준은 사영이 어째서 이러는지 어렵지 않게 추측할 수 있었다. 흐릿한 사영의 눈동자에 지금 비치고 있는 건 유준 자신이 아니다.
그는 한재우를, 그와 함께한 지난날을 보고 있는 게 분명했다.
그걸 깨닫는 순간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짜증과 불쾌감이 느껴졌다. 윤사영을 향한 감정은 아니었다.
몸이 안 좋아 페로몬을 흘리는 배우자를 이렇게까지 겁에 질려 빌게 만들어 놓은, 쓰레기라는 말도 부족한 한재우를 향한 분노였다.
“사영 씨.”
유준은 다시 한번 그의 이름을 부르며 천천히, 아주 조심스럽게 제 페로몬을 일으켰다.
유준으로서는 드문 일이었다. 유준의 페로몬을 경험해 본 이들은 하나같이 거대한 해일에 휘말리는 것 같다고 말하곤 했다.
하지만 지금 유준이 뿜어내는 향은 그렇지 않았다. 지금 그의 향은 마치 잔잔한 호수처럼 고요하고 정적이었다. 상대를 압박하려 하지도 않고 유혹하려는 의도가 담긴 것도 아니었다.
다만 유준은 불안정해 보이는 사영을 단단히 보호하듯 제 향으로 그를 감싸 안았을 뿐이다. 유준은 살면서 단 한 번도 제 페로몬을 이런 식으로 사용해 본 적이 없었다.
낯설기만 한 자신의 변화를 실감하며, 유준은 제게 멀어지려는 사영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금방… 금방 제가….”
“윤사영 씨. 나 봐요.”
유준의 커다란 두 손이 사영의 어깨를 감싸 쥐었다. 사영의 마른 어깨 따위는 마음만 먹으면 으스러트릴 수 있을 만큼 강하게 잡을 수 있었지만 유준은 그러지 않았다. 그러고 싶지 않았다.
혹시나 아프지는 않을까 더없이 조심하면서. 제 향도, 손의 힘도 그 무엇도 사영에게 폭력적으로 느껴지지 않기를 바라면서. 유준은 사영을 붙들었다.
“나 김유준이에요.”
“저, 저는….”
“김유준입니다. 나를 봐요.”
불과 몇 달 전의 유준이었다면 사영이 패닉에 빠졌든 말든 이 상황 자체를 불쾌하게 여겼을 것이다. 하지만 놀랍게도 지금 유준이 느끼는 감정은 불쾌함이나 분노, 짜증, 그 어떤 것과도 닮지 않았다.
“괜찮아요. 미안해하지 않아도 돼요.”
유준은 사영을 향해 한 걸음 더 다가가며 그와의 거리를 좁혔다. 처음에는 미미하게 느껴졌던 녹음의 향이 코끝에 훅 끼쳤다.
본래라면 부드럽고 청아했을 향은 사영의 감정 상태 때문인지 날카롭고 위태로웠다. 유준은 동요하지 않고 계속 아주 느리게, 제 향으로 사영을 감싸 안았다.
본능적으로 몸에서 열기가 일었다. 유준은 원래 타인의 페로몬에 쉽게 동요하는 편이 아니었지만 사영의 페로몬은 어딘지 모르게 사람의 음심을 자극하는 면이 있었다.
유준의 알파로서의 본능은 이대로 그를 짓누르고 가지길 바라고 있었다.
“괜찮으니까 진정하고, 내가 누군지 봐요.”
그러나 유준은 작은 흔들림도 없이 일관된 태도로 사영을 진정시켰다.
상대가 나약해진 틈을 타 욕구를 채우는 건 유준의 스타일도 아니었거니와 심지어 다른 사람도 아니고 한재우 때문에 힘들어하는 사영을 상대로 욕정을 느낄 만큼 자존심이 없진 않았다.
유준의 손이 사영의 뺨을 부드럽게 쓸었다. 의도했다기보다는 자연스럽게 흘러나온 행동이었다.
지금 유준은 어떤 수를 써서든 사영을 다독이고 싶었다. 그가 이 비참하고 고통스러운 환영에서 조금이라도 빨리 벗어나길 원했다. 그게 유준이 바라는 전부였다.
초점 없이 흐릿해져 있던 사영의 눈동자에 서서히 선명한 빛이 돌아온 건 바로 그 순간이었다. 옅은 색의 눈동자에 비로소 유준의 얼굴이 또렷이 맺혔다.
“유준 씨…?”
“네. 접니다.”
“아….”
사영은 마치 차원을 건너온 사람처럼 혼란스러운 얼굴로 빠르게 눈을 깜빡였다. 방금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 모양이다.
두 사람의 거리는 지나치게 가까웠다. 유준은 그걸 알면서도 물러나지 않았다. 뺨을 감싼 손도 떼지 않았다. 유준은 그냥 그대로, 사영이 온전히 자신을 바라볼 때까지 기다렸다.
“제가 방금 무슨….”
“윤사영 씨 몸이 좋지 않은 모양입니다. 그래서 페로몬 조절이 완벽하지 않았던 것 같은데… 그 때문에 잠깐 혼란이 있었습니다.”
유준은 적당한 말을 고르면서도 무슨 일이 있었는지 빠트리지 않고 정확하게 알렸다. 문제를 파악해야 해답을 찾을 수 있는 법이다.
유준은 사영이 방금 같은 일을 다시 겪는 걸 원치 않았다. 그가 한재우의 늪에서 하루라도 빨리 벗어나길 원했다.
이건 어디까지나 윤사영의 사정이지 내 일은 아니라고 꼬박꼬박 생각했던 게 무색하게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