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8
사영은 딱히 그 일들이 유준의 잘못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때도 그 일로 특별히 상처받은 것도 아니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더 심한 일도 당한 사영이다. 그런 일은 정말로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래서 사영은 지금 자신이 느끼는 감정이 참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상처받지 않은 일을 두고서 사과를 듣는 순간, 왜 위안을 받은 것처럼 마음이 울렸던 걸까.
‘그러지 말았어야 했는데.’
누군가에게는 별것도 아닌 말이. 어쩌면 그 말을 한 유준에게조차 큰 의미는 아니었을 그 말이 자꾸만 귓가에 아른거렸다.
저런 한마디를 간절히 바랐던 날들이 있었다. 오래 걸려도 좋으니 언젠가 한재우가 그렇게 말하며 모질게 굴었던 날을 후회하고 사과해 주길 꿈꾸며 버텼던 날들 말이다.
그 한마디면 고통스러웠던 날들을 전부 잊고 행복해질 수 있을 것 같았다. 힘들었던 날에 어떤 미련도, 원망도 남기지 않았고 그 모든 날들을 없었던 것처럼 전부 잊을 수도 있었다. 사영은 정말로 그랬다.
하지만 죽는 순간까지도 끝끝내 들을 수 없던 그 한마디 말을 사영은 오늘 다른 남자에게서 들었다. 그것도, 제게 사과할 필요가 전혀 없는 사람에게서.
뭐라고 설명할 수 없는 복잡한 감정이 밀려왔다. 한심스러운 과거의 자신에 대한 회한과 함께 도대체 왜 유준이 제게 이렇게까지 해 주는지에 대한 의문이 동시에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유준은 이미 사영이 바라던 그 이상을 해 주고 있었다. 애초에 그의 동정심에 호소하며 도와 달라 매달리긴 했지만 이렇게까지 해 주길 바랐던 건 아니었다.
그동안 사영은 유준이 자신을 동정하면서도 동시에 답답하고 짜증스러운 사람이라고 여긴다고 생각했는데 오늘 유준이 보여 준 태도는 사영의 예측을 한참이나 벗어나 있었다.
어쩌면 이런 일에 엮이기에는 너무 좋은 사람을 끌어들인 건 아닌가 하는 생각에 사영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을 때, 저만치 테이블 위에 올려 두었던 휴대폰이 짧게 진동했다. 메시지 도착 알람이었다.
숙이고 있던 고개를 빠르게 든 사영은 앉은 채로 잠시 얼어 있었다. 사영에게 연락할 사람은 많지 않았다.
혹시 유준이 보낸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떠오르자마자 아주 낯설게도 심장이 뛰었다.
촬영장에서 긴장해 갈피를 잡지 못할 때, 한재우 때문에 긴장해 얼어 있을 때, 험한 꼴을 당할 뻔했을 때.
마치 동화에서 나오는 기사처럼 나타나 자신을 이끌어 주고 도와주었던 유준의 모습이 차례로 눈앞에 스쳐 지나갔다. 돌이켜 보면 모든 순간에 유준은 과분할 정도로 자신을 위해 움직여 주었다.
사영은 천천히 침대에서 일어나 휴대폰이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두 다리가 떨리고 몸에서 열이 올랐다. 그 열감이 무엇으로부터 비롯된 것인지 사영은 여전히 확신할 수 없었다.
도착한 메시지가 유준이 보낸 것이면 어쩌나 싶었다가, 또 유준이 아니면 어쩌나 싶기도 했다. 갈피를 잡지 못한 감정들이 바람결에 흩날리는 갈대처럼 이리저리 휘청였다.
“아….”
그리고 마침내 휴대폰을 손에 쥐고 메시지를 확인한 사영은 저도 모르게 짧은 탄성을 흘리며 허망한 웃음을 흘렸다. 메시지를 보낸 사람은 우종이었다.
그사이 유준에게서 연락을 받은 건지 왜 아픈 걸 말하지 않았느냐며 바로 약을 가지고 가겠다는 메시지가 우는 이모티콘과 함께 도착해 있었다.
그걸 확인한 후에야 사영은 제가 정확하게 무엇을 원했는지 알아챘다.
사영은 이 메시지의 주인이 유준이길 바라고 있었다. 내용은 아무래도 좋았다. 사영은 그냥, 유준과 조금이라도 더 대화를 나누고 싶었다.
그걸 깨닫고 나자 유준이 사과하고 방을 나서는 동안 변변한 대답 하나 제대로 하지 못한 게 더 아쉽게 느껴졌다.
괜찮다고. 유준 씨 잘못이 아니라고. 적어도 그 말은 꼭 했어야 하는데.
사영은 우종에게 답신을 보내고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우종은 아마 이미 자신의 방으로 오는 중일 테니 오지 말라고 하는 게 무의미할 것 같아 그냥 고맙다고만 말했다. 이래저래 민폐를 끼치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멍청하고 한심한 윤사영. 무엇 하나 제대로 하는 일이 없는 윤사영.
요즘 들어서는 잘 하지 않으려 노력했던 자책을 거듭하며 사영은 휴대폰을 내려놓고 몸을 움직여 가방에 넣어 두었던 안정제를 꺼냈다.
오늘 일의 원흉은 페로몬을 제대로 조절하지 못한 자신이다. 우종의 걱정 때문에 안정제를 조금 줄여 볼까 싶었지만 이런 일을 겪고 보니 덜컥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몸이 안 좋다고 촬영장에서 페로몬을 줄줄 흘려 대는 민폐를 끼치는 배우가 되고 싶진 않았다.
사영은 평소처럼 두 알의 약을 손바닥에 덜었다가 한 알을 더 추가로 꺼냈다. 컨디션이 나쁜 만큼 더 강한 효과가 필요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우종이 오기 전 얼른 약을 입 안으로 털어 넣고 물과 함께 넘긴 사영은 의자에 앉아 다시 차분하게 머릿속을 정리했다.
내일 유준을 만나면 오늘 있었던 일을 제대로 사과하고 고맙다는 말을 전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다시는 이렇게 멍청한 실수는 하지 않도록 정신을 바짝 차릴 것이다.
그 두 가지 다짐을 몇 번이나 마음에 새기며 사영은 짙은 어둠이 내려앉은 창밖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코끝에는 여전히 유준의 페로몬이 잔상처럼 남아서. 사영은 문득 파도가 치는 바다가 보고 싶어졌다.
***
유준은 우종과 통화를 하느라 복도에서 잠시 시간을 보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지난번 아무도 모르게 우종의 연락처를 받아 놨는데 이렇게 빨리 쓰게 될 줄은 몰랐다.
그 와중에 우종의 형질이 베타인 걸 굳이 확인했다는 걸 사영이 알면 소름 끼치고 기분 나쁘다고 여길 수도 있겠으나 유준으로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아무리 매니저라고 해도 페로몬 조절이 제대로 되지 않는 오메가의 방에 알파를 넣을 수는 없질 않나.
오메가인 연예인의 매니저로 알파를 두는 경우는 거의 없지만 조심해서 나쁠 건 없었다.
모든 조치를 취하고 나서도 착잡함이 가시지 않았다. 늦은 시간이라 휑한 호텔의 복도에서 한숨을 푹푹 내쉬다가 끝끝내 우종이 사영의 방으로 들어가는 것까지 멀리서 지켜보았다.
마음 같아선 자신이 직접 약을 들고 가고 싶었는데 자신이 사영에게 그렇게까지 해 줄 명분이 없다는 생각이 걸음을 막았다.
그랬다. 말 그대로 유준에게는 이유가 없었다. 비단 약을 들고 찾아가는 일만 두고 하는 말이 아니었다.
사영의 페로몬에 그렇게까지 무너질 이유도, 스스로 몸을 열겠다고 하는 오메가를 굳이 마다할 이유도, 나서서 고개를 숙여 먼저 사과할 이유도 전부, 아무것도 없었다.
생각하면 할수록 한숨만 나오는 일이라 유준은 애써 더 생각하지 않으려고 살짝 숙인 고개를 가볍게 흔들며 제방으로 돌아가기 위해 걸음을 옮겼다.
“…김유준?”
그 순간, 앞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유준이 반사적으로 인상을 찌푸리며 고개를 들었다.
눈앞에는 지금 가장 보고 싶지 않은 사람이 당황한 얼굴을 한 채로 서 있었다. 한재우였다.
머리로 무언가 판단을 내리기도 전에 대뜸 말이 먼저 튀어 나갔다.
“이름을 막 부르네?”
한 번도 대놓고 드러낸 적 없는 날카로운 말투였다. 늘 한재우가 못마땅하긴 했어도 굳이 꼬투리 잡힐 일을 만들 필요는 없으니 말이다.
하지만 오늘은 타이밍이 너무 안 좋았다. 안 그래도 윤사영 때문에 심경이 복잡하기 이를 데 없는데 이 모든 일의 원흉이 버젓이 나타난 것도 모자라 건방지게 이름을 부르다니.
유준이 도저히 인내심을 발휘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다만, 유준은 알고 있었다. 지금 자신이 이렇게 예민하게 반응하는 건 사실 한재우의 태도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일이라는 걸 말이다.
설령 그가 여기서 지극히 예의 바른 태도로 아는 척을 해 왔더라도 유준의 반응은 별반 달라지지 않았을 것이다.
솔직히 말해서 유준은 재우에게 곧장 주먹을 날리지 않은 것만으로도 자신이 칭찬받아 마땅하다고 생각했다. 그가 사영에게 한 짓을 생각하면 얼굴을 후려치는 걸로도 모자랐다.
“김유준 씨 지금….”
그런데 재우의 반응이 어딘지 모르게 이상했다. 유준이 이렇게까지 막 나갔으니 마찬가지로 화를 낼 거라고 생각했는데 재우는 한껏 당황한 표정으로 말을 제대로 잇지 못하고 있었다. 단순히 유준이 적의를 보여서 그런 것 같지는 않았다.
“지금 어디서 나오는 겁니까?”
한재우가 다시 말을 더해 묻는 순간, 유준은 그가 무엇 때문에 이렇게 당황했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사영의 방에서 나온 뒤, 유준은 굳이 사영의 향을 털어 내지 않았다. 코끝에 남은 그의 향이 신경 쓰이기는 했지만 이상하게도 그 녹음의 향이 제 몸에서 완전히 사라지는 건 싫었다.
그리고 한재우는 바로 그 향에 누구보다 익숙한 사람이다. 유준은 그가 제게서 풍기는 사영의 페로몬을 맡았을 거라고 확신했다.
유준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그러고 보니 한재우가 이 복도에 나타난 것부터가 이상했다.
재우의 방은 다른 층이었다. 윤사영과 한재우의 사정을 모두가 알고 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데 이 시간에, 한재우가, 윤사영의 방이 있는 층에 나타날 이유가 뭐냔 말이다.
유준은 의도적으로 페로몬을 거칠게 풀어 기세를 키우며 한재우를 향해 한 걸음 다가갔다. 명백한 위협이었다. 그리곤 불쾌한 듯 인상을 찌푸린 한재우를 향해 입을 열었다.
“그걸 알아서 뭐 하게?”
“김유준 씨.”
유준의 갑작스러운 반응에 잠시 당황한 표정을 지었던 재우는 곧 마찬가지로 페로몬을 흘리며 딱딱한 목소리로 유준을 부르더니 말했다.
“지금 뭐 하자는 겁니까?”
유준이 이렇게까지 도발했는데도 재우는 쉽게 민낯을 보이지 않았다. 모르는 이가 본다면 안하무인인 상대를 앞에 두고도 예의를 잃지 않는 이성적이고 차분한 사람으로 보일 것이다, 한재우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