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복수하는 회귀자를 사랑하는 법-103화 (103/193)

#103

“말도 안 돼….”

사영은 연신 같은 말을 중얼거리며 휴대폰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말을 하지 않을 때는 휴대폰을 들지 않은 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있다.

커다래진 두 눈동자가 하염없이 떨리며 연신 휴대폰 화면을 훑고 또 훑었다. 정말로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오늘 촬영은 다행히 예상대로 일찍 끝났다. 보통 늘 촬영이 지연될 수밖에 없는 변수가 가득한 촬영 현장을 감안하면 정말로 드문 일이었다.

사영은 먼저 호텔로 돌아왔다. 유준은 사영보다 한 장면을 더 찍어야 해서 호텔에서 그를 기다리기로 했다.

방에 돌아왔을 때까지만 해도 사영은 몹시 긴장한 상태였다. 유준에게 저녁을 먹자고 먼저 제안한 건 사영이었지만 막상 단둘이 시간을 보낼 생각을 하니 긴장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감사해야 할 것도 너무 많고, 또 며칠 전 있었던 일도 제대로 사과를 하고 싶었다. 하지만 막상 저녁 시간이 다가오자 또 실수하는 건 아닐까 걱정이 되었다.

휴대폰에 메시지가 도착한 건, 사영이 씻은 뒤 준비하면서 서서히 오만 걱정에 머릿속이 복잡해졌을 즈음이었다.

사영은 혹시 유준의 촬영이 생각보다 더 일찍 끝난 건가 싶어 서둘러 메시지를 확인했다. 수십 장의 이미지와 함께 메시지를 보낸 건 예상과 달리 우종이었다.

그가 보낸 건 수많은 캡처 이미지들이었는데 섬네일로 작게 보이는 이미지에는 작은 글씨들이 빼곡하게 적혀 있었다.

도대체 뭔지 파악이 되지 않아 이미지를 열어 보는 걸 망설이는 사이, 우종에게 전화가 왔다. 그는 아주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사영에게 말했다.

(- 그… 최근에 영상도 풀리고, 홍보 자료들도 많이 공개되면서 형에 관한 이야기도 부쩍 많아졌더라고요. 그래서 여기저기 댓글도 많이 달리고 사람들도 우리 영화에 대한 이야기도 많이 하고 그러고 있는데 그… 그러니까 제가….

우종은 꼭 부모님께 잘못을 고백하는 아이처럼 주눅이 들어 몇 번이나 말하기를 망설였다. 괜찮으니 편하게 말해 보라고 사영이 몇 번 설득을 한 뒤에야 우종은 끝까지 말을 이었다.

- 제가 그래서… 봤더니 형에 대해 좋은 말을 해 주는 사람들도 많더라고요. 형은 바쁘셔서 직접 댓글 보기 어려우실 것 같아서 제가… 형에 관한 것들만 추려서 정리해 가지고 보내드렸어요. 이런 거 싫으시면 다신 안 할게요.

사영은 처음 그 말을 들었을 때 바로 이해가 되지 않았다. 우종이 자신에게 악플을 모아서 보내 줬을 리는 없는데, 사람들이 제게 좋은 말을 해 줬을 리도 없다는 생각이 들어서 혼란스러웠다.

차마 그 글들을 읽을 자신이 없어 휴대폰을 제대로 보지도 못하고 몇 번이나 심호흡했다는 걸 남들이 알면 정말로 한심하다는 소리를 했을 거다.

그렇게 얼마나 뜸을 들였을까. 조금 전 사영은 큰 용기를 내 드디어 우종이 보내 준 이미지 속의 글자들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그 안에는 정말로 믿기 힘든 내용이 가득했다. 윤사영이 서단우 이미지와 정말로 잘 어울린다는 말이나 윤사영의 서단우가 기대된다는 말은 차라리 양반이었다.

어떤 이들은 오래전 사영이 했던 연기를 좋게 기억하고 있었다. 요즘은 그런 분위기를 가진 배우가 없어서 종종 생각났는데 복귀한다는 소식이 반갑다는 말도 해 주었다.

사람들의 머릿속에 ‘연기하는 윤사영’이 여전히 남아 있을 거라곤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런 건 이미 한참 전에 세상에서 전부 다 지워진 줄로만 알았다.

한재우가 사영에게 보여 준 세계의 윤사영은 더 이상 연기자 윤사영이 아닌, 한재우의 악독한 남편으로서의 윤사영뿐이었다.

사영은 그게 전부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자신이 복귀한다고 한들 반겨 주는 이는 아무도 없을 거라고 여겼다.

그런데 사영 자신조차 잊고 살았던 지난날의 윤사영을 기억하고 그리워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게 감당하기 힘들 만큼 엄청난 감동이 되어 사영의 마음을 휩쓸었다.

사영의 외모를 찬양하는 사람들은 그보다 배는 많았고, 생각보다 유준과 너무 잘 어울린다며 두 사람의 케미를 기대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하지만 그 무엇보다도 사영은 제 연기를 기억해 주는 이들의 말이 가장 마음에 깊이 박혀 왔다.

과거에 사영의 팬이었음을 고백하는 사람들의 댓글을 보며 사영은 죄책감을 느꼈다. 늘 자신을 응원하고 고운 애정을 보내 주던 이들에게 너무 깊은 상처를 주었다는 생각이 든 탓이다.

너무 깊은 구렁텅이에 빠져 있을 때는 그런 것들을 떠올릴 여유가 없었다.

그토록 마음을 다해 응원하던 배우가 하루아침에 연기를 그만둔 것도 모자라 연이어 온갖 부정적인 소식만 보일 때 팬들이 느꼈을 감정을 사영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지금껏 사영은 자신이 배신당한 일에만 매몰되어 있었다. 하지만 세상으로 한 걸음 나오자 비로소, 어쩌면 자신 역시 팬들의 기대를 배신했던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놀라운 건, 오래전 자신을 응원해 주었던 팬들에게 미안함을 느끼면서도 그 이면에 작은 설렘을 동시에 느끼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런 이들에게, 지금껏 자신을 잊지 않고 기억해 준 사람들에게 사영은 조만간 새로운 작품을 보여 줄 예정이었다. 연기를 선보일 수가 있다.

많이 변해 버린 사영의 모습에 그들이 실망할 수도 있고, 기다림을 아깝게 여길 수도 있겠지만 그건 문제가 아니었다.

가장 중요한 건, 사영이 어떤 식으로든 그들에게 보답할 기회가 있다는 점이었다.

열심히 하고 싶었다. 잘하고 싶었다. 그들에게 적어도 연기로는 다시 실망을 주고 싶지 않았다.

지금껏 느낀 감정과는 전혀 다른 빛깔의 의욕이 사영의 안에서 휘몰아쳤다. 텅 비어 있는 것 같던 전신에 다시 피가 도는 기분이었다.

사영은 저도 모르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침대 주변을 이리저리 서성였다. 그렇게라도 지금 차오르는 감정을 해소하고 싶었다. 엉엉 울고 싶기도 했다가, 소리 내 웃고 싶기도 했다.

설명할 수도 없고, 진정할 수도 없는 격정이 몰아쳤다. 연기를 다시 시작한 이후로 줄곧 살아 있는 감각을 하나하나 되찾아 가고 있던 사영이었지만 지금 느끼는 건 차원이 달랐다.

뛰지도 않았는데 가빠진 숨을 내쉬며 방을 돌아다니던 사영은 잠시 멈춰 서서 휴대폰 화면을 다시 한번 들여다보고, 다정하고 따뜻한 글자 하나하나에 감정이 고조되면 또 이리저리 걷기를 반복했다.

그사이 유준에게서 촬영을 마치고 돌아와 준비를 끝냈으니 곧 가겠다는 메시지가 도착했다. 사영은 이제 정말 진정해야 할 타이밍이라 생각했지만 마음을 가라앉히기는 쉽지 않았다.

물론 사영은 지금 자신이 보는 반응은 빙산의 일각에 불과한 걸 알았다.

우종이 거르고 보여 주지 않은 수면 아래에는 이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수많은 부정적인 의견들이 가득할 것이다.

그중에는 단순히 악플로 치부할 수 없는 비판 역시 어마어마하게 많을 것이다. 사영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괜찮았다. 그런 건 아무렇지도 않았다.

어차피 아무도 응원해 주지 않을 거라 생각하고 시작한 길이었다. 비판은 물론이고 악플조차도, 이미 더한 지옥을 지나온 사영에게는 아무런 상처가 될 수 없었다.

그냥 그런 길을 외롭게 혼자 걸어가야 한다고만 생각했는데. 누구의 응원도 받지 못하고, 아무도 반겨 주지 않는 곳에서 버텨야 한다고 그렇게만 생각해 왔는데.

생각지도 못하게 마주한 타인의 호의가, 애정이, 기대와 격려가 사영의 마음을 자꾸만 들뜨게 했다.

똑똑.

누군가 호텔 방 문을 노크한 건 바로 그 순간이었다. 유준이 도착한 모양이었다.

사영은 휴대폰을 얼른 내려놓고 크게 숨을 내쉬었다. 표정을 관리하며 문 쪽으로 걸어가는데 자꾸만 입꼬리가 올라가 몇 번이나 머뭇거리며 얼굴을 단속해야 했다.

“유준 씨, 오셨어요?”

그러나 사영의 노력이 무색하게, 유준을 맞이한 사영의 얼굴은 햇살처럼 화사했다.

***

“뭐야….”

유준은 저도 모르게 중얼거리다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 갑자기 튀어나온 말에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을 정도로 당황했다. 누군가를 만났을 때 할 첫인사로는 확실히 적절치 않은 말이었다.

하지만 유준에게도 나름의 변명거리가 있었다.

사영의 방으로 걸어오는 내내, 아니 호텔로 돌아와 준비하는 동안에.

좀 더 솔직히 사영이 저녁 식사를 함께 하자고 말한 이후 지금까지 유준은 계속 긴장 상태였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먼저 말을 걸어 준 사영이 고마우면서도, 그렇게 큰일이 있었는데 왜 아무렇지 않게 행동하는지 그게 또 서운했다.

단둘이 시간을 보낸다는 게 좋으면서도, 막상 단둘이 되면 무슨 이야기를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해 도망치고 싶기도 했다. 온통 모순적인 감정들뿐이었다.

거절은 쉽겠지만. 사영에게 연락해 같이 저녁을 먹고 싶지 않다고 말하면 사영은 두말하지 않고 알았다고 물러나 줄 거라는 걸 알았지만.

문제는 유준이 정말로 이 약속을 없던 것으로 하고 싶진 않다는 점이었다. 오히려 유준은 사영이 군말 없이 약속을 취소할 거라는 상상에 또 혼자 마음이 상했다.

한마디로 삽질의 연속이었다.

그렇게 유준은 온갖 힘겨운 번뇌 속에 사영의 방문 앞까지 왔다는 이야기였다. 어떤 얼굴로 사영을 마주하면 좋을지를 계속 고민하면서.

그런데 문을 열자마자 보인 사영은 여태 한 번도 본 적 없는 것 같은 들뜬 표정을 하고 있으니 유준이 어떻게 당황하지 않을 수가 있었겠냐는 말이다.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던 수많은 인사말 대신 ‘뭐야’ 따위의 재수 없는 말을 대뜸 먼저 꺼내 버린 유준은 낭패한 표정으로 수습을 위해 급하게 말을 이었다.

“아니, 내 말은… 윤사영 씨 표정이….”

“아…!”

사영은 유준이 표정을 언급하자 당황한 얼굴을 했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그는 여전히 얼굴 가득 어린 기분 좋은 기색을 숨기지 못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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