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복수하는 회귀자를 사랑하는 법-104화 (104/193)

#104

이쯤 되자 궁금증이 일었다. 사영은 좀처럼 웃지 않는 사람이다. 어디 그뿐인가. 그의 마치 한겨울의 시린 공기로 만들어진 사람이기라도 한 것처럼 줄곧 추워 보이기만 했다.

그런 사람에게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길래 이다지도 기분 좋은 티를 감추지 못하는 걸까.

설마, 나와의 식사 시간을 이렇게까지 기다렸던 걸까? 짜증스러울 정도로 담담하던 사람이 이렇게 들뜬 기색을 숨기지 못할 정도로?

애매한 기대감이 심장 아래에서 찰랑거렸다. 유준은 멍청하게 미소 짓지 않기 위해 애쓰며 모르는 척 입을 열었다.

“무슨 좋은 일이라도 있었습니까?”

“그게….”

“이렇게 티를 내놓고 말 안 해 주면 상대방은 진짜로 답답하고 짜증 나는 거 알죠?”

혹시라도 그가 끝까지 이유를 말해 주지 않을까 봐 유준이 먼저 치고 나갔다. 사영은 망설이는 얼굴을 하며 조금 머뭇거렸다.

그러는 와중에도 여전히 어려 있는 기쁜 낯빛이 유준을 설레게 했다.

“사실은… 잠시만요, 유준 씨.”

결정을 마쳤는지 사영이 속삭이듯 말하며 몸을 돌려 방 안쪽으로 걸어갔다. 유준은 의아한 표정으로 그 뒤를 따라 안으로 걸었다.

유준은 문 앞에서 대화하는 게 어색해서 안으로 들어간 건가? 생각했지만 침대로 간 사영은 그 위에서 무언가를 집어 들고는 다시 유준에게 다가왔다. 손에 들린 건 휴대폰이었다.

“사실은 유준 씨. 제가 우종이한테 이걸… 이런 걸 받아서요.”

그러더니 수줍은 얼굴로 유준을 향해 휴대폰을 슬쩍 내미는 게 아닌가.

기대했던 것과는 다른 사영의 반응에 유준은 속으로 조금 당황한 채 사영이 내민 휴대폰을 받아 들었다.

화면에는 어떤 이미지가 열려 있었는데 그보다 먼저 눈에 들어온 건 금이 가 있는 액정이었다. 반사적으로 유준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돈이 없는 것도 아닐 텐데 왜 망가진 휴대폰을 들고 다니나 싶었다.

하지만 그걸 묻기 전에, 유준의 눈에 화면에 뜬 이미지 속 글자들이 하나씩 들어오기 시작했다.

“이게….”

“그게 다, 저에 대한 좋은 말들이에요. 우종이가 홍보 영상이나 기사에 달린 댓글 중에서 좋은 것들을 골라서 제게 보내 줬는데… 저는 원래 아무것도 찾아보지 않거든요. 그래서… 그래서 몰랐는데….”

말을 이어 갈수록 사영의 목소리가 서서히 높아지는 게 느껴졌다. 그는 다소 말을 더듬었고, 조금 횡설수설 이야기했지만 주눅이 들거나 당황해서 보이는 반응이 아니었다.

사영의 음성과 표정에는 점점 더 선명하게 행복한 빛이 어리기 시작했다.

“저는 전부 욕하기만 할 줄 알았어요. 왜냐하면 저는 연기를 오래 쉬기도 했고… 평판도 안 좋고… 다들 저를 싫어하니까 당연히 욕만 있을 거라고. 아무도 제 연기를 기대하진 않을 거라고 그렇게 생각을 했는데….”

“…….”

“아, 물론 저를 안 좋아하는 분들이 훨씬 더 많다는 건 알아요. 저를 못마땅하게 여기는 의견이 훨씬, 훨씬 더 많겠죠. 저도 알고 있어요. 그런데 저는 정말로… 조금이라도 이렇게 좋게 말씀해 주시는 분들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을 못해서… 그래서 제가 이걸 보다가….”

유준은 사영이 이렇게 빨리, 이렇게 많은 말을 하는 걸 처음 보았다. 그게 낯설어서 아주 잠시 동안 그의 말이 제대로 귀에 들어오지 않았을 정도였다.

하지만 당황스러운 감정이 흘러가고, 자신과의 식사를 기대하고 있었던 게 아니었다는 깨달음에서 오는 짧은 실망감이 지나간 유준의 눈에 서서히 사영의 모습이 선명하게 들어오기 시작했다.

별빛이 있었다. 영원처럼 펼쳐져 있는 우주에 비하면 너무나도 작지만, 반짝이며 주변을 밝히는 그런 사랑스러운 빛이 바로 사영의 두 눈동자에 있었다.

선생님께 칭찬받은 아이처럼, 그것으로 부모의 칭찬을 바라는 아이처럼 사영은 유준을 올려다보며 사랑스러운 목소리로 재잘거렸다.

사영은 계속 화면 속 글에 대해 말하고 있었지만 유준의 눈은 자꾸만 휴대폰이 아닌 사영의 얼굴로 향했다. 그가 내뿜는 이 곱고도 어여쁜 기운을 만끽하고 싶었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이었구나. 이런 표정으로 기쁨을 표현하던 사람이었구나. 들뜨면 목소리가 높아지고 말이 많아지는 사람이었구나, 윤사영은.

한재우로 인해 강제로 잃어버린 사영의 본모습을, 그 조각들을 손에 쥔 기분이었다. 그걸 깨닫자 심장이 다시금 엄청난 속도로 뛰기 시작했다.

유준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 휴대폰에서 완전히 시선을 거두고 사영을 보며 그의 한 손을 조심스럽게 잡았다. 의도한 행동이 아니었다. 그냥 그 순간, 저도 모르게 손이 나갔다.

쉴 새 없이 이어지던 사영의 목소리가 그와 동시에 뚝 끊겼다. 당황한 채로 떨리는 눈동자가 유준을 바라보았다.

갑작스러운 행동에 스스로 당혹스러울 만도 한데, 사영과 시선을 마주치는 순간 유준은 제 마음이 신기할 정도로 차분해지는 것을 느꼈다. 기묘한 경험이었다.

심장은 터질 것처럼 뛰고 있는데 머릿속은 더없이 맑고 선명했다. 태어날 때부터 정해진 길을 걷는 것처럼, 이 순간만큼은 단 한 점의 미혹도 없었다.

작고 마른 사영의 손을 가만히 감싸 쥔 유준이 봄볕처럼 따사로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이런 건 아무것도 아니게 될 겁니다.”

“유준 씨….”

“저기 밖에 있는 사람들 중 그 누구도, 아직 사영 씨의 서단우를 보지 못했잖아요. 누구도.”

말을 잇는 사이 손안에서 사영이 손을 빼려는 듯 힘을 주는 게 느껴졌다. 유준은 오히려 더 힘을 주어 그 손을 꽉 붙들었다.

손바닥에 닿아 오는 서늘한 체온이 안쓰러워서, 유준은 문득 이 사람을 따뜻하게 만들어 주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의 태양이 되고, 온기가 되어 주고 싶었다. 지금 이 순간 느끼는 솔직한 감상이었다.

그 마음을 담아 유준이 말을 이었다.

“내가 장담할게요. 사영 씨를 욕하는 사람들? 머지않아 한 줌도 남지 않을걸요. 누군가 사영 씨를 욕하면 사영 씨를 대신해 싸워 줄 사람들이 셀 수도 없이 많아질 겁니다.”

“…….”

“한재우의 정체를 까발리지 못해도. 그간 쌓인 오해를 전부 다 풀지 못해도. 그래도 윤사영 씨.”

사영의 연기를 가까이에서 지켜보며 유준은 확신했다. 만약 사영이 계속 배우 생활을 지속했다면 대중은 그토록 일방적으로 한재우의 편이 될 수는 없었을 거다. 절대로 불가능했다.

설령 사영이 정말로 이기적이고 못된 사람이었다고 한들 그가 연기를 계속하기만 했다면 사영의 편을 들어 줄 사람들은 차고도 넘쳤을 것이다. 그만큼 윤사영의 연기는 너무나도 강력했다.

아마 한재우도 그걸 알았기에 가장 먼저 사영에게서 연기를 빼앗았으리라.

여전히 믿기 힘든 이야기를 듣는 듯 얼이 빠진 사영의 얼굴을. 전이라면 한심하고 멍청하다고 느꼈을 바로 그 표정을 더없이 사랑스럽다고 느끼며. 유준은 말했다.

“윤사영 씨는 오로지 연기만으로 사람들의 사랑과 지지를 모조리 되찾아올 거예요. 두고 봐요.”

그 순간 유준은 제 손을 쥐어 오는 힘을 느꼈다. 사영이었다. 그가 일방적으로 잡혀 있던 손으로 유준을 꽉 마주 잡았다.

특별한 의미가 있는 게 아니라는 건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사영은 지금 복받쳐 오르는 감정을 견디기 위해 그냥 손에 힘을 준 것에 불과하다는 걸 알았다.

그걸 알면서도 유준은 동요했다. 사영의 힘은 더없이 연약하고 보잘것없었지만 그 손끝으로부터 전해지는 감각은 유준의 등줄기를 짜릿하게 만들었다.

그대로 사영을 끌어당겨 안고 싶은 충동을 유준이 가까스로 참아 내는 사이, 이윽고 사영이 입을 열었다.

“…고마워요, 유준 씨.”

허무하리만큼 평범한 말이었다. 그러나 유준은 그 말 안에 담긴 사영의 감정은 결코 평범하지 않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여전히 별빛처럼 반짝이는 눈동자를 하고 저를 올려다보는 사영이, 행복한 듯 떨리는 목소리가, 유준의 손을 꼭 쥔 사영의 손이 전부 그 감정을 말 대신 표현해 주고 있었다.

먼 길을 왔다.

처음 유준은 사영을 미친 사람이라고 생각했고, 사영은 아마도 유준을 거칠고 냉담한 사람이라고 여겼을 테다.

하지만 그들은 이 세상에서 오로지 단둘만이 알고 있는 비밀을 공유하며 바로 여기에 다다랐다.

불현듯 서로를 보는 시선의 빛깔이 달라졌음을 실감하며, 유준은 반짝이는 사영을 향해 조용히 미소 지었다.

유준은 진심으로 그와 함께할 내일이 조금 더 기대되었다.

***

“그런데 정말 괜찮을까요?”

사영은 차에 타 안전벨트를 매면서도 불안한 목소리로 물었다. 유준은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괜찮다니까요. 그리고 먼저 저녁 먹자고 한 건 윤사영 씨잖아요.”

“…네. 그랬죠. 그렇긴 한데….”

사영은 불안한지 계속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렸다. 옆에 앉아 있는 터라 표정을 똑바로 볼 수 없는데도 그가 어떤 얼굴을 하고 있을지 알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조금 전 방에서 있었던 애매하고 간지러운 기류는 결국 사영에 의해 끝나고 말았다.

재잘재잘 떠들어 댄 게 뒤늦게 민망했는지, 아니면 유준의 손을 마주 잡은 게 창피했는지 결국 먼저 손을 뺀 사영이 이제 그만 식사하러 가자고 말하며 분위기를 깨트렸다.

유준은 깨진 분위기도, 순식간에 사영을 놓친 손도 전부 다 아쉬웠지만 어쨌든 예정된 일정이 있었으니 어쩔 수 없었다.

게다가 계속 그런 상태로 사영과 함께 있는 건 유준에게도 어렵고 어색한 일이었다.

사영의 손을 대뜸 먼저 잡았다고 해서 그를 보는 자신의 마음이 무엇인지 스스로 정의할 수 있게 된 건 아니었으니 말이다. 결국 둘은 어색한 분위기로 나란히 방을 나설 수밖에 없었다.

사영이 문득 떠오른 듯 유준에게 염려를 표현한 건 주차장으로 내려가기 위해 엘리베이터를 탔을 때였다. 이렇게 함께 외출하는 게 필요 이상으로 사람들의 주목을 받으면 어떻게 하냐는 말이었다.

유준은 그럼 안 될 이유라도 있냐고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지만 사영은 아직도 그게 마음에 걸리는 모양이다. 불안한 듯 안전벨트를 두 손으로 꽉 쥔 사영이 말을 이었다.

“괜히 저랑… 스캔들이라도 나면 어떻게 하나 싶어서.”

“참 나. 윤사영 씨, 장난합니까?”

유준의 대답에 사영은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려 그를 쳐다보았다. 그의 말은 굉장히 딱딱하고 날카롭다고 할 수도 있을 단어들로 만들어져 있었다.

그러나 사영은 그 대답에 그다지 긴장하지 않았다. 목소리에 담긴 옅은 웃음기와 미소를 짓고 있는 유준의 표정이 그의 말을 가벼운 농담으로 만들어 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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