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
유준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숨을 죽이던 때가 있었다.
혹시 그의 기분을 거슬러 그가 제 부탁을 들어주지 않을까 봐. 그래서 재우에게 복수하지 못하게 될까 봐 눈치를 보고 자세를 낮추던 때가.
유준이 짜증을 내면 사영은 이유가 무엇이든 그저 사과를 해 댔다. 모든 대화가 그런 식으로 이어지던 날들이 불과 얼마 전이었다.
사영은 새삼 달라진 유준과 자신의 분위기를 실감했다. 우종이 보내 준 호의적인 반응을 본 여운이 아직 남아 있어서일까. 묘한 기분이 들었다.
사영이 이전엔 느껴 본 적 없는 낯선 감정을 곱씹는 사이, 유준은 정말 일말의 걱정도 없는 건지 망설이지 않고 차를 출발시키며 말했다.
“나는 윤사영 씨를 사랑한다고 말해 달라고 부탁하던 사람이 지금 스캔들을 걱정하는 거예요?”
“아… 그건….”
사영은 그야말로 말문이 막혔다.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굳이 변명하자면 사영이 원한 건 그저 한재우 한 사람에게만 말해 주길 바란 거였다. 그러나 그 변명이 눈 가리고 아웅이라는 건 사영 역시 알고 있었다.
막말로 재우가 억하심정이라도 가져 그 말을 더러운 스캔들로 만들어 뿌려 버릴지 누가 알겠느냔 말이다.
그때는 너무 절박해서 이것저것 깊이 재고 배려할 여유가 없었는데 이제 와 생각해 보니 정말로 어처구니없는 부탁을 했다.
무슨 말을 어떻게 하면 좋을지 알 수가 없어 사영은 대답을 망설였다.
여전히 유준에게 복수의 많은 부분을 의지하고 있으면서 말뿐인 사과를 하자니 뻔뻔한 것 같고, 그냥 가만히 있으려니 그것도 좀 아닌 것 같아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먼저 침묵을 깨고 입을 연 건 유준이었다.
“괜한 신경 쓰지 마요. 스캔들 나라고 이러는 거니까.”
“…네?”
“뭐, 그것 때문에 밥 먹으러 가는 건 물론 아니지만 기왕 밖에서 같이 시간을 보내는데 스캔들 안 나면 섭섭하죠.”
“무슨 말씀이신지….”
“이왕 엿을 먹이려면 제대로 먹여야 속이 시원하지 않겠냐 이거예요.”
그 말을 하며 유준은 고개를 살짝 돌려 사영을 쳐다보며 웃었다. 그 얼굴이 얼마나 자신만만한지, 절로 그의 말이 전부 다 맞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유준은 곧바로 다시 전방을 바라봤지만 사영은 여전히 유준의 얼굴을 멍하니 쳐다보고 있었다.
한재우가 지금 유준은 안중에도 없을 만큼 신경 쓰고 있는 사람은 다름 아닌 윤사영 씨라고, 유준이 그렇게 말했던 적이 있었다.
‘그러니까 이제 사영 씨가 괴롭힐 차례예요.’
‘나한테 복수를 대신 맡기는 것보다는 이쪽이… 사영 씨한테도 더 좋을 겁니다.’
그와 동시에 유준이 해 주었던 말이 차근차근 떠올랐다.
그때는 유준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지만 재우가 저를 불러 이야기를 하며 그렇게까지 흥분한 걸 보면 어쨌든 지금 유준과 자신이 어울리는 게 그를 상당히 불편하게 만들고 있다는 건 명백한 사실인 것 같았다.
유준과 사영, 어느 쪽을 신경 쓰든 그건 중요한 게 아니다. 중요한 건 둘이 가깝게 지내는 것처럼 보일수록 한재우가 흔들리고 불쾌해질 거라는 사실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만약 둘이 대놓고 단둘이 식사를 하고 심지어 스캔들까지 터진다면?
사영은 허벅지 위에 올려 두었던 두 손을 꽉 쥐었다. 미미한 기대감이 열기처럼 전신으로 퍼져 나갔다.
사영이 원했던 형태의 복수도 아니고, 그만큼 강렬한 비참함을 줄 수 있는 방법도 물론 아니지만 어차피 지금은 복수의 최종장이 아니었다.
사영의 계획대로라면 유준이 마지막 한 방을 날리기 전까지 사영이 할 일은 거의 없었다. 재우의 마음을 얻는 것도, 그를 절망의 구렁텅이에 밀어 넣는 것도 전부 유준의 일이었다.
사영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기껏해야 재우의 앞에서 그에게 모욕당하며 더 초라하고 볼품없어지는 것을 참아 내는 것뿐이었다.
그런데 유준의 계획안에서의 사영은 달랐다. 그의 계획에서 사영은 적극적으로 재우의 신경을 건드리고, 그를 짜증스럽게 하며, 평온을 뒤흔들 수 있는 사람이었다.
여전히 유준의 도움이 필요했고, 유준이 아니었다면 사영이 아무리 촬영장에서 어슬렁거린다 해도 한재우가 지금처럼 신경 쓰는 일은 없었을 테지만 그래도 여기에는 사영의 몫이 있었다.
사영은 오늘 일로 유준과 스캔들이 터진다면 그 소식을 접한 한재우의 얼굴이 어떨지를 가만히 상상해 보았다.
심지어 사영은 그 스캔들로 잃을 게 없다. 더 바닥으로 떨어질 평판도 무엇도, 아무것도 없으니 말이다.
오히려 사영은 유준의 이름에 기대 이름값을 올릴 수도 있다. 김유준의 이름이 가지는 힘은 그만큼 어마어마하니 말이다. 유명인과의 추문을 자신의 홍보 수단으로 쓰는 연예인이 괜히 있는 게 아니었다.
유준이야 수준 이하의 배우와 스캔들이 나 다소 성가시긴 하겠으나 사영이 생각할 때 자신이 유준의 명성에 흠을 끼칠 만큼 대단한 존재는 되지 못할 게 분명해 보였다.
애초에 유준이 정말 사영과 사귈 거라고 믿는 사람도 없을 것이다. 유준이 뭐가 모자라 윤사영 같은 것과 만나겠느냐고 입을 모으겠지.
사영이 일방적으로 계획한 일도 아니고 유준이 먼저 의도한 것이니 그가 놀라거나 당황할 일도 없다.
그렇다면 결국 스캔들이 났을 때 여러모로 가장 큰 타격을 입을 사람은 한재우일 거라는 말이었다.
간신히 가라앉혔던 마음이 다시 들뜨기 시작했다. 조금 전까지는 분명 스캔들이 걱정되기만 했는데 어느새 사영의 마음속에는 은근히 기대하는 마음이 자라났다.
“거봐요. 즐겁겠죠?”
그런 사영의 변화를 알아채기라도 한 건지, 유준이 여전히 웃음기를 머금은 목소리로 말을 건넸다.
“…네.”
결국 사영은 아주 작은 목소리로 솔직한 대답을 꺼냈다. 뻔뻔하다고 해도 어쩔 수 없었다. 애초에 사영은 복수라는 자신의 목표를 위해 얼굴에 철면피를 깔고 유준을 이 일에 끌어들이지 않았던가.
이제 와 유준을 걱정한다는 핑계를 대는 건 오히려 위선이었다. 그래서 사영은 유준이 준 이 기회를 멍청하게 날려 버리지 않기로 결심했다.
어둠이 내려앉은 창밖으로 빠르게 스쳐 지나가는 도심의 야경이 아름다웠다.
아무리 멋진 풍경을 보아도 아름다움을 느끼지 못했던 지난날이 문득 까마득하게 느껴졌다. 사영은 고요히 밤을 만끽했다.
***
“후….”
레스토랑 입구를 앞에 두고 사영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유준의 말 덕분에 걱정이 어느 정도 사라지긴 했지만 막상 사람들이 눈에 보이기 시작하니까 다시 긴장이 밀려오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괜찮아요?”
걸음을 멈춘 사영의 옆에 나란히 선 유준이 다소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사영은 고개를 끄덕였으나 창백한 안색이며 떨리는 숨소리, 그 무엇을 보아도 경직된 게 한눈에 보였다.
저녁을 먹기엔 조금 늦은 시간이라 그런지 주변은 한산했다. 그러나 안으로 들어가는 순간 직원들은 물론이고 몇이 되었든 레스토랑에 있는 이들의 이목을 살 수밖에 없을 것이다.
“조급하게 생각할 거 없어요. 사영 씨가 준비되면 들어가죠.”
유준이 밖에 서 있는 게 알려지면 한바탕 난리가 날 게 분명했다. 그걸 알면서도 유준은 전혀 개의치 않는 사람처럼 느긋해 보였다.
사영은 그런 유준을 잠시 바라보았다. 불현듯 이 남자의 여유로움은 어디서 오는 걸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타고난 걸까. 아니면 오랫동안 가장 높은 자리에 있다 보니 자연스럽게 몸에 밴 걸까. 어느 쪽이든 상관은 없었다. 다만 사영은 그의 자신만만함과 여유로움이 조금 부러웠다.
지난 생에도 사영은 유준을 부러워했던 때가 있었다. 하지만 지금 느끼는 부러움은 그때 느낀 부러움과는 결이 달랐다.
그때는 단순히 그가 재우의 마음을 가졌기 때문에 부러워했다면 지금은 유준 자체가 가진 기질이 부러웠다. 그처럼 매사에 당당하게 임하고 싶었다.
다시 살아난 후에도 언제나 나 같은 건 혼자선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거라고, 그런 한심하고 멍청한 인간이라고 늘 자신을 다그치던 사영으로서는 그 자체만으로도 놀라운 성장이었다.
불과 얼마 전의 사영이었다면 유준과 같은 당당함을 가지고 싶다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을 것이다. 자신은 애초에 그게 불가능한 사람이라고 여기고 있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사영이 그런 생각을 하는 동안, 정작 그가 당당함의 화신이라고 생각한 유준은 속으로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조급하게 생각할 거 없다고 사영에게 말까지 해 놓고 유준은 지금 마음 가득 초조함을 느꼈다. 대단한 이유가 있는 것도 아니다.
그저 사영에게 하고 싶은 말이, 행동이 있는데 그걸 차마 실행으로 옮길 수가 없어 그랬다.
유준은 사영의 손을 잡고 싶었다. 말뿐인 위로를 건네는 게 아니라 떨리는 손을 잡아 주고 괜찮을 거라고, 내가 옆에 있어 주겠다고 다독여 주고 싶었다.
그리고 그렇게 손을 마주 잡은 채로 사람들의 시선이 가득한 곳을 같이 걷고 싶었다.
내세우는 명목은 사영을 격려하기 위한 것이지만 그 안에 담긴 진심은 우습게도, 단지 그 손을 다정하게 한번 잡아 보고 싶다는 욕망이라는 걸 부정할 순 없었다.
그런데 그 말을 못 해서.
세상천지에 못 할 말이 없는 사람처럼 살아온 주제에. 심지어 사영에게도 온갖 막말을 서슴지 않고 해온 주제에 손을 잡아 주겠다는 그 말 한마디를 못 해서 유준은 혼자 마음을 졸이고 있었다.
아니 어쩌면 그 때문인지도 모른다. 지금껏 사영에게 해 왔던 쓰레기 같은 말들이 차라리 없었더라면 넌지시 말을 꺼내는 게 지금처럼 염치없이 느껴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제 됐어요. 기다려 주셔서 감사해요.”
결국 사영이 결심을 마칠 때까지, 유준은 원하는 말을 꺼내지도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