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복수하는 회귀자를 사랑하는 법-106화 (106/193)

#106

“방에 없다고?”

재우의 물음에 은성은 고개를 살짝 숙여 시선을 피하며 “네….” 하고 대답했다. 목소리는 벌써부터 잔뜩 주눅이 들어 있었다.

제발 이대로 다음 질문 없이 넘어가길 간절히 바랐지만 그럴 리가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예상대로, 재우가 다시 물었다.

“어디 갔어?”

몸 안쪽 깊은 곳으로부터 한숨이 흘러나왔다. 당연히 이 질문이 나올 거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난감함이 사라지는 건 아니다.

“그게….”

“뜸 들이지 말고 말해. 짜증 나니까.”

재우는 대답을 듣기 전부터 이미 단단히 심사가 꼬여 있었다.

오늘뿐만이 아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근 며칠간 재우는 사사건건 은성을 쥐 잡듯이 잡아 댔다.

그간 한재우의 매니저로 일하면서 한순간도 편한 날이 없었던 은성이지만 요즘처럼 버거운 적은 없었다.

뭐가 마음에 안 드는지 속 시원히 말이라도 해 주면 좋겠는데 그것도 아니고 그냥 이래도 저래도 다 일을 그따위로 할 거냐고 쏘아 대니 아무리 그에게 익숙해진 은성이라고 해도 버틸 재간이 없었다.

“야, 내 말 안 들려?”

짧은 머뭇거림도 기다리지 못하고 재우가 다시 한번 은성을 다그쳤다. 순간 은성은 그냥 모르는 척할까, 하는 고민을 잠시 했지만 어차피 그런다고 그냥 넘어갈 한재우가 아니기에 결국 포기하는 마음으로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게… 어딜 갔는지는 잘 모르겠는데 김유준 배우님이랑 같이 나갔다고….”

“뭐?”

“…….”

“뭐라 그랬냐, 너 지금?”

“윤사영 씨가 방에 없어서 확인해 봤더니… 둘이 같이 나갔다고만….”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해?!”

재우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물어봐서 대답을 해 준 건데 말이라고 하냐 화를 내면 나보고 어쩌라는 건가 싶었지만 당연히 내색할 수는 없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은성은 단순히 사영이 방에 없었고 어딜 갔는지는 확인이 안 된다는 말로 상황을 모면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재우라면 어디 갔는지 전화라도 해서 알아 오라고 했을 확률이 높지만 그랬다면 사영이 제 전화를 받지 않을 가능성이라도 생기는 거니까.

하지만 은성은 적극적으로 이 상황을 무마하는 대신 재우가 가장 화를 낼 대답이라는 걸 알면서도 곧이곧대로 제가 알아낸 사실을 전해 주었다.

은성 그 자신도 명확한 이유를 골라내긴 힘들었다. 어차피 맞을 매라면 조금이라도 빨리 맞고자 하는 성격 탓일 수도 있고, 재우에게 아는 걸 모르는 척할 만한 배짱이 없는 탓일 수도 있다.

그도 아니면, 어차피 자신이 재우에게 한 소리 듣는 건 피할 수 없는 일이니 조금이라도 그를 더 불쾌하게 만드는 걸로 소심하기 그지없는 반항을 한 건지도 모른다.

이것도 반항이라고 이름 붙일 수가 있다면 말이다.

“죄송합니다….”

은성은 습관적으로 고개를 숙이며 사과했다. 이쯤 되면 자신의 사과는 재우에게 그다지 중요한 게 아니었다.

은성은 그저 사과하고, 그의 말에 맞장구를 치고, 재우의 기분이 풀릴 때까지 그의 화를 받아 주는 사람이었다.

“보자 보자 하니까 이 새끼들 아주 웃긴 새끼들이네?”

재우는 이제 아예 자리에서 일어나 주변을 서성이며 욕을 뱉었다. 그들이 같이 나가서 시간을 보내든 말든 이제 와 그게 형님과 무슨 상관이냐고, 그런 말은 당연히 할 수 없었다.

한재우의 앞에서 은성은 때때로 보지도, 듣지도, 말하지도, 생각하지도 못하는 사람이어야 했다.

“내가… 내가 경고를 했는데도 이렇게 걸레처럼 군다 이거지, 윤사영.”

은성은 불현듯, 이제 한재우는 내게 이런 말 할 자격이 없다는 거, 당신도 알지 않냐고 묻던 사영의 음성이 떠올랐다.

사영의 집 앞에서 문전 박대를 당한 이후 은성은 줄곧 그의 목소리를 되새기곤 했다.

“윤사영 네가 감히….”

한재우는 여전히 자신이 사영의 절대적인 신이라고 여기는 것 같았다. 한때는 은성 역시 그렇게 생각했었다.

윤사영은 결코 새장 밖으로 빠져나가지 못할, 그런 생각조차 하지 않을, 오로지 한재우의 사랑만을 갈구하다 죽어 버릴 날개가 꺾여 버린 불쌍한 새라고.

하지만 사영은 보란 듯이 그 새장을 떠났다. 그리고 한재우가 제게서 빼앗아 갔던 세계에 다시 두 다리를 디뎠다.

그렇다면 최은성 자신은, 지금 어느 자리에 있을까.

‘은성 씨는 그 사람 매니저죠. 시키는 대로만 할 뿐인 거 알아요. 그런데 그게… 저한테 와서 그런 말을 전하는 일에 대한 변명은 되지 않아요.’

그날 은성은 자신에게 연신 폭언을 퍼붓는 재우의 목소리를 들으며 자꾸만 사영을 생각했다.

***

“궁금한 게 하나 있어요.”

유준이 그답지 않게 제법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말을 꺼낸 건 함께 와인 몇 잔을 빠르게 비워 낸 다음이었다.

유준은 오늘 사영과 꼭 술을 한잔하고 싶었고 운전이야 다른 사람에게 맡기면 되니 큰 문제는 없었다.

“뭐가 궁금하세요?”

사영은 느릿한 목소리로 물었다. 오랜만에 술을 급하게 마신 탓인지 기분이 조금 몽롱한 것 같았다.

평소 사영이었다면 이렇게 빨리 술을 마시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은 긴장을 덜어 줄 무언가가 필요했다.

안 그래도 오늘 유준과 식사하는 건 긴장을 동반할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지난번 페로몬 실수 이후 제대로 대화하는 건 처음이었으니까 말이다.

거기다가 사방에서 은근하게 쏟아지는 시선들 역시 사영을 평소보다 더 긴장하게 했다.

다들 나름대로 아닌 척을 하고 있긴 했지만 대한민국 최고의 배우와 꼴사납게 몰락한 배우가 함께 있으니 누구라도 시선을 두지 않기는 힘들 것이다.

유준이 스캔들을 오히려 반기고 있다고 말해 줘서 마음의 부담을 조금 덜긴 했지만 그렇다고 이 상황을 즐기기는 힘들었다.

그래서 사영은 이왕이면 최대한 사람들 눈에 안 띌 수 있는 구석진 자리를 원했지만 유준은 굳이 사방이 탁 트인 창가 자리를 고집했다.

그뿐만이 아니다. 오늘따라 유준은 유독 사영에게 더 다정했다. 부드럽게 웃고 살뜰하게 사영을 챙겼다.

사영의 소매에 묻은 먼지를 유준이 손수 떼 줬을 때는 주변의 술렁이는 공기가 피부로 적나라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농담이 아니라 그는 정말로 스캔들을 바라는 것처럼 보였다. 사영은 여전히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 어쩌면 누군가는 이미 몰래 사진이나 동영상을 찍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사영은 그의 행동에도, 주변의 반응에도 예민하게 신경 쓰지 않으려 애를 쓰며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빠르게 와인을 비우게 된 건 바로 그런 이유에서였다.

사영의 되물음에도 유준은 잠시 말이 없었다. 그 얼굴이 정말로 조금 긴장한 것 같아 사영은 덩달아 입을 다물고 숨을 죽였다. 유준의 이런 얼굴은 처음 보았다.

무슨 말을 하려고 이렇게 뜸을 들이는 걸까. 매사 당당하고 자신감 넘치는 사람이 무엇 때문에 긴장하는 걸까. 침묵이 길어질수록 사영의 머릿속은 점점 더 복잡해졌다.

“나한테….”

한참 만에, 유준이 입을 열었다.

“나한테 왜… 뭘 믿고 모든 걸 솔직하게 다 말한 거예요?”

“…네?”

“죽었느니, 시간을 되돌아왔느니 하는 그런 말들… 도대체 나를 뭘 믿고 처음부터 그걸 다 털어놨냐고요.”

굳이 이렇게 분위기를 잡을 필요가 있었나 싶을 정도로 새삼스러운 질문이었다. 사영이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대답했다.

“음,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하지만 유준은 사영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즉각적으로 반응했다.

“아니, 아니. 그거 말고.”

“……?”

“윤사영 씨가 직접 복수할 능력이 없다고 생각한 것도 알고, 그래서 내 동정을 사고 싶었던 것도 알고 그래, 그건 다 알겠어요.”

“그런데….”

“내 말은, 어쨌든 단 1%라도 내가 믿어 줄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했으니까 나한테 다 털어놓은 거잖아요.”

유준은 사영의 눈동자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그건 유준이 줄곧 가지고 있던 가장 근본적인 의문이었다.

“사영 씨가 죽었든 말든, 한재우한테 배신당했든 말든 그건 솔직히 나랑 상관없는 일이잖아요. 내 알 바가 아니지, 솔직히.”

도대체 무엇이 윤사영으로 하여금 마지막 남은 기회를 김유준이라는 사람에게 걸어 봐야겠다고 결정하게 만들었는지.

“나는 타인에게 관대한 사람도 아니고, 그런 평판을 가진 사람도 아니죠. 오히려 다른 사람에게 무관심하고 심지어 그게 치정이다? 내가 그런 거에 관심이 없는 사람이라는 건 대다수의 사람들이 알고 있어요.”

한재우와 엮이는 일을 끔찍하여 여기면 여겼을 자신이 복수에 동참해 줄 가능성이 아주 조금이라도 있을 거라고, 사영은 왜 그렇게 판단했는지.

“그런데 왜 윤사영 씨는, 두 번 다시 없을 절호의 기회를 나한테 걸었냐 이거에요, 내 말은.”

“…….”

“한재우가 나를 사랑했기 때문이라고 대답할 생각은 말아요. 내가 당신 말을 들어줄 가능성이 전혀 없다고 여겼다면 애초에 윤사영 씨도 그런 계획을 세우지 않았을 테니까.”

유준은 그걸 알고 싶었다. 윤사영이 믿었던, 그의 마음에 불씨가 되었던 그 미미한 가능성이 도대체 무엇으로부터 비롯됐는지를 말이다.

말없이 유준의 시선을 똑바로 받고 있던 사영은 이내 손을 들어 다시 와인이 채워진 잔의 손잡이를 만지작거렸다.

순간적으로 현기증이 일었다. 급하게 마신 술 때문인지 아니면, 눈앞에 너무 많은 시간과 일이 빠르게 스쳐 지나간 탓인지 알 수 없었다.

“그건….”

사영은 쉽게 말을 잇지 못하고 잠시 멈췄다가 와인을 몇 모금 더 목으로 넘겼다. 유준에게는 존재하지 않을 지난 생의 사소한 순간을 굳이 말해 줄 필요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말해봤자 비웃음만 살 게 뻔했다. 고작 그 정도의 이유로 가까스로 얻은 기회를 던진 거냐고, 한심한 취급을 당할 것이다.

그걸 알면서도 유준에게 그날의 일을 말하고 싶은 건 마찬가지로 술기운 때문인지 무언지, 사영은 역시 알 수 없었다.

사영이 와인을 마시고도 몇 번이나 입을 열었다 닫기를 반복하는 동안 유준은 더 사영을 재촉하지 않고 기다려 주었다.

지치지도 않는지 지금까지도 계속 이어지고 있는 주변 사람들의 시선이, 목을 타고 넘어간 강한 향의 와인이, 이번 생에서 사영의 유일한 조력자가 되어 준 눈앞의 사내가.

그 모든 것이 사영의 마음을 이유도 없이 어지럽게 만들었다.

아무래도 취했나 보다고, 그런 터무니없는 핑계를 대며 사영이 천천히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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