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7
“아마 올해 말 즈음이었을 거예요. 어느 연말 파티에서 유준 씨와… 아주 잠깐 마주친 적이 있었어요.”
사영의 말이 시작되는 순간 유준의 심장이 거칠게 뛰기 시작했다. 그는 분명 유준 자신과 있었던 일을 말하고 있는데 유준에게는 그런 기억이 없었다.
묘하고, 두려운 기분이 들었다. 유준은 아직 겪지 못한 그 순간이 사영에게는 과연 어떤 시간으로 박제되어 있을까.
“컨디션이 좋지 않아 세수라도 하려고 화장실에 갔는데 거기에 유준 씨가 있었어요. 유준 씨는 막 그곳을 나오던 길이었죠.”
사영은 눈을 빠르게 깜빡였다. 그날의 기억은 사영에게 깊은 흔적을 남겼던 만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마치 시공간이 뒤틀린 것 같은 감각을 선사했다. 사영은 말을 이었다.
“그때 이미 저는 어렴풋하게… 한재우가 유준 씨에게 마음이 있다는 걸 눈치채고 있었어요. 그래서 저답지 않게 고집을 부려 그 행사에 따라간 거였고요. 제가 없는 곳에서 유준 씨와 한재우가 만나는 게 무서웠거든요.”
“…네. 그리고요?”
“유준 씨를 마주쳤을 때 저는 완전히 얼어 버렸어요. 갑자기 마주칠 거라 예상하지 못했기도 했고, 그리고… 그리고 그날 유준 씨가 정말로….”
“…….”
“정말로 너무 멋있었거든요.”
사영의 입에서 전혀 생각지 못한 말이 나오자 당황한 유준이 얼빠진 표정으로 사영을 쳐다보았다. 유준은 잠시 사영이 농담을 한 건가 의심했지만 사영의 표정은 진지했다.
사영은 유준의 시선을 담담하게 받아넘기며 또 와인을 한 모금 마시고 말을 이었다.
“정말이지… 가까이에서 마주친 유준 씨는 너무… 너무 잘난 사람이었어요. 그때는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아마도 저는… 어떤 강렬한 예감을 받았던 것 같아요.”
“무슨….”
“나는… 나 같은 건… 저 사람을 절대로 이길 수 없겠구나, 하는….”
그 순간 유준이 발을 디디고 있는 세계가 진공의 암흑으로 빠져드는 듯했다.
레스토랑의 음악 소리도, 그릇을 들고 주변을 걷는 직원도, 연신 힐끔거리던 다른 테이블의 사람들도 암흑에 먹혀들었다.
다시 눈을 한번 감았다 뜬 곳에서 유준은, 아무것도 모르는 세계의 자신과 절망 속에 빠져 있던 그날의 윤사영을 보고 있었다. 세계의 밖에서 사영이 말했다.
“이미 저 사람에게 기울어진 한재우의… 내가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을 나는 절대로 되돌릴 수 없겠구나….”
“…….”
“그런 확신이 들었어요, 그때.”
목이 바싹바싹 말라 유준은 옆에 놓인 와인을 물 마시듯 들이켰다. 그래도 타는 듯한 갈증은 사라질 기미가 없었다.
그런 생각을 하는 윤사영에게 자신은 과연 무슨 말을 했을까. 좀처럼 조심할 줄을 모르는 그 입을 어떻게 놀렸을까. 등에서 식은땀이 흐르는 것 같았다.
제게 모든 걸 다 털어놓기로 마음먹은 계기가 사영에게는 전혀 좋은 기억이 아닐까 봐 겁이 났다. 몇 번이나, 몇 번이나 사영에게 칼날 같은 말을 내뱉었던 주제에.
“…그래서요.”
할 수만 있다면 도망치고픈 강렬한 충동과 싸우며 유준은 가까스로 물었다. 이유를 들어야 했다. 그래서 그날의 마주침이 어떻게 끝맺었는지 알아야만 했다.
이 시간, 이 공간에서 윤사영과 자신이 어떻게 만나게 된 건지 유준은 알고 싶었다.
“저는 도망치려고 했어요. 도저히 유준 씨를, 절대로 벗어날 수 없을 것 같은 제 불행을 더 마주할 자신이 없었거든요. 그런데 그 순간에… 유준 씨가 제게 말을 걸었어요.”
사영은 어느샌가 테이블 아래로 내려 마주 잡고 있던 두 손에 힘을 주었다. 이 세상에서는 혼자만이 가지고 있던 삶의 조각을 유준에게 내놓으려고 하니 누군가가 강력한 제동을 걸듯 자꾸만 말문이 막혔다.
하지만 유준은 여전히 사영의 말을 기다리며 그 자리에 앉아 있었으므로, 사영은 포기하지 않고 말했다.
“내가 상관할 바는 아니지만 내가 진짜… 불쌍해서 말해 주는 거예요, 윤사영 씨.”
“…….”
“그쪽이 어떤 사람인지 솔직히 나는 몰라요. 근데… 한재우한테 과분한 사람이라는 건 알겠어요. 그런 놈한테 헌신하지 말아요. 결국 윤사영 씨만 후회하게 될 겁니다.”
사영은 유준이 그날 말한 그 내용을 그대로 읊었다. 아마 한 음절도 틀리지 않았을 것이다. 토씨 하나 놓치지 않고 그때 유준이 한 말을 전부 기억하고 있었다.
“유준 씨가 그렇게 말했어요, 저에게.”
두 사람 사이에 침묵이 흘렀다.
사영은 그날 유준이 자신에게 왜 그런 이야기를 했는지 알 수 없었다. 유준은 말을 마친 후 실례했다는 간단한 인사말을 남긴 채 떠났고 그 뒤로 다시 유준을 마주칠 일은 없었다.
그냥 한재우가 재수 없어서 그랬을 수도 있고, 말 그대로 윤사영이 너무 불쌍해 보여 그랬을 수도 있다. 유준 나름대로는 무언가 이유가 있었겠지만 사영에게는 이유가 중요하지 않았다.
사영에게 중요한 건, 유준이 제게 해 주었던 말 그 자체였다.
당시 사영의 세계에 남아 있던 사람들은 전부 한재우가 아깝다고 했다. 어쩌다 한재우가 저런 남편을 만나서 고생하냐고 했고, 하루빨리 윤사영이라는 악당에게서 가련한 한재우가 탈출하기를 바랐다.
제발 남편에게 그만 좀 잘해 주라는 말을 듣는 것도 늘 한재우의 몫이었다. 그래서 사영은 잘못하는 게 오로지 자신뿐인 줄로만 알았다.
그런데 오직 김유준만이. 어떤 의미에서는 사영이 라이벌이라고 여길 수도 있는 자리에 있던 그 남자만이 사영에게 더 이상 한재우에게 헌신하지 말라고 충고해 주었다.
괜스레 숨이 차올라 의식적으로 깊은 한숨을 내쉰 사영이 떨리는 목소리를 애써 꾹꾹 누르며 말을 이었다.
“아마도 유준 씨는 큰 의미 없이 한 말이겠지만… 돌아서서 금방 잊으셨겠지만….”
유준은 궁금했다. 그때의 자신은 어째서 사영에게 그런 어울리지 않는 충고를 한 걸까. 왜 그런 쓸데없는 오지랖을 부린 걸까. 자신은 정말 돌아선 뒤에 사영을 잊었을까.
“이상하게 저는 유준 씨의 그 말을 잊을 수가 없었어요. 그 말이 사실이라고 생각하진 않았지만 한재우에게 모욕을 당한 날에는 이따금, 유준 씨가 한 말을 떠올리곤 했죠.”
“…….”
“그래서… 죽었다가 다시 깨어났을 때. 시간이 되돌려진 것을 알았을 때. 내게 복수의 기회가 주어졌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이어지는 사영의 말을 들으며 유준은 사영의 부고를 듣게 되었을 자신을 상상했다. 어떤 기분이었을지 조금도 예상할 수 없었다. 다만 유준은 심장이 찢어지는 듯한 고통을 느꼈다.
마치 지금의 자신이, 사영의 죽음을 듣게 되기라도 한 것처럼.
“저는 유준 씨를 떠올리지 않을 수가 없었던 거예요. 유준 씨가… 지금보다 더 한심했던 저를 불쌍하게 여겨 준… 유일하게 그 동정심을 제게 전해 준 사람이었으니까요.”
“…….”
“제가 어떻게 유준 씨의 동정에 작은 희망을 걸어 보지 않을 수가 있었겠어요.”
사영이 유준의 눈을 마주 보고 말을 끝마치는 순간, 늪과 같은 암흑에 삼켜진 유준의 세계가 비로소 다시 제 모습을 찾았다.
사영은 유준의 처분을 기다리는 사람처럼 입을 꾹 다물고 침묵했다.
유준은 그를 위해 뭐라도 대답을 해 줘야 한다는 걸 알았지만 너무나도 많은 감정이 폭풍처럼 머릿속을 헤집는 통에 어떠한 말도 쉽게 꺼낼 수가 없었다.
“…그랬군요.”
결국 한참 만에 유준이 겨우 꺼낸 한마디는 그뿐이었다. 더는 어떤 대답도 떠오르질 않았다. 타인에게서 전해 받은 기억이 모래알처럼 혈관 속을 돌아다니는 기분이었다.
“네. 그랬어요.”
“알겠습니다.”
다행인지 무언지, 사영은 어처구니없는 유준의 대답에도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그는 그저 고개를 끄덕이며 놓았던 포크와 나이프를 다시 손에 쥐었을 뿐이다.
유준은 반사적으로 그의 손등을 살폈지만 새로운 상처는 없었다. 안도감과 허전함, 그 사이의 애매한 감정을 느끼며 유준은 마찬가지로 손에 커트러리를 쥐었다.
입 안과 목구멍이 전부 껄끄러워 음식이 넘어가지 않았으나 이 순간의 어색함을 넘길 수 있다면 뭐든 할 수 있었다.
조용히 스테이크 한 조각을 씹던 사영이 아주 작은 목소리로 입을 연 건 그 순간이었다.
“지난번에 제가 페로몬 실수했던 건 정말 죄송했어요.”
“아….”
“감사도 감사고, 그 일에 대해 사과도 드리고 싶어서 오늘 저녁을 함께 하자고 한 거예요.”
방금 나누었던 대화와는 전혀 상관없는 뜬금없는 주제였다. 그러나 유준은 갑자기 무슨 소리냐고 사영을 타박할 수 없었다. 유준이 느끼는 마음의 무게를 덜어 주려고 하는 말임을 알았기 때문이다.
“…뭐, 나도 잘한 건 없으니까 너무 마음 쓰지 말아요.”
“네. 고맙습니다.”
유준은 며칠 전 있었던 그들 사이의 사건을 단순 실수로 넘기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었지만 그의 머릿속은 아직도 다른 세계의 기억을 헤매고 있어서.
식사가 끝나는 그 순간까지도 그 일에 대해 다시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
“여기까지 바래다주지 않으셔도 되는데….”
호텔 방 문 앞에 서서 사영이 조금 어색한 기색으로 웅얼거렸다.
레스토랑에서는 물론이고 호텔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도 두 사람 사이에는 계속 숨 막히는 적막이 흘렀다.
사영은 아마도 유준이 자신과 단둘이 시간을 보내기로 한 걸 후회하고 있을 거라 생각했다.
실제로 유준의 마음은 사영의 생각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유준은 사영에게 이유를 물은 것이 후회되었다.
단순히 생각하면 유준이 질문했고, 사영은 대답했을 뿐이다.
아마도 당시의 유준 입장에서는 큰 의미가 없었을 말에 사영이 과한 의미를 둬 결국 유준을 여기까지 끌어들였을 뿐인 일이었다.
그까짓 게 뭐 대단한 사건이라고 자꾸만 신경이 쓰이고 사영의 숨소리 하나 듣는 것마저 어색한지 모를 일이었다.
유준은 어서 빨리 사영과 헤어져 이 불편함에서 벗어나고 싶다고, 분명히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데 막상 호텔에 도착해 헤어질 때가 되자 오기와 같은 미련이 남았다. 사영과 이대로 헤어지고 싶지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