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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수하는 회귀자를 사랑하는 법-108화 (108/193)

#108

별말을 안 해도, 어색해 죽을 것 같아도, 그래도. 유준은 사영과 조금이라도 더 함께 있고 싶었다. 그래서 결국 괜찮다는 사영을 방까지 데려다주겠다고 고집을 피웠다.

민망함에 괜히 아무렇지 않은 척 어깨를 으쓱해 보이는 유준에게 사영이 말을 이었다.

“어쨌든 고마워요. 피곤하실 텐데 유준 씨도 어서 가서 쉬세요.”

“…네. 오늘 저녁 잘 먹었어요.”

“제가 받은 거에 비하면 별것도 아니었는데요. 오히려 제가 감사하죠. …귀찮은 일이 생길 수도 있는데 시간 내 주셨잖아요.”

유준은 사영이 말하는 ‘귀찮은 일’이 스캔들을 말하고 있다는 걸 바로 알아챘다. 그 단어를 떠올리자마자 무겁기만 했던 기분이 한결 가벼워졌다.

오늘 두 사람을 목격한 이들 중 대다수는 이 일을 비밀로 하지 않을 것이다.

다른 연예인과 시선만 마주쳐도 스캔들에 휩싸이던 유준이다. 하물며 상대가 유준을 꼬시기 위해 영화에 합류했다는 소문을 가진 윤사영일 때에는 더 말할 것도 없는 일이다.

“스캔들 나면 진짜 재밌을 거예요.”

“아….”

“한재우 얼굴, 정말로 기대되지 않아요?”

유준은 마치 나쁜 장난을 계획하는 소년 같은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비밀 이야기를 나누듯 목소리를 낮춘 탓에 유준은 제 목소리가 사영에게 제대로 들리도록 고개를 숙이고 그에게 한 걸음 가까이 다가갔다.

아무도 없는 고요한 호텔 복도에서 두 사람은 숨결을 느낄 수 있을 만큼 가까운 거리에서 서로를 보고 있었다. 코끝에 와인 향이 맴돌았다. 사영은 취기를 느꼈다.

“윤사영 씨와 내가 사귄다는 소문을 듣고 그 새끼가 어떤 기분일지… 나는 진짜 궁금해.”

얼굴에 열이 올랐다. 술을 마셨기 때문인지, 아니면 너무 가까이 다가온 알파 때문인지 짐작하기 어려웠다. 유준이 페로몬을 풍기고 있는 건 분명 아니었는데 이상하게 사영은 몸에서 열기를 느꼈다.

“평생 자기만 바라볼 거라고 생각했던 사람이 보란 듯이 다른 남자를 사랑하게 되었다고 하면 얼마나 놀라고 당황할지.”

“…….”

“후회해도 자신의 기회는 이미 오래전에 사라졌다는 걸 한재우가 깨닫는 순간이 나는 너무 궁금해요.”

재우에게 자신이 느꼈던 것과 같은 절망을 주고자 했던 건 사영의 계획이었다. 하지만 유준이 지금 속삭이는 말은 사영이 계획했던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는 이미 한재우가 김유준이 아닌 윤사영 때문에 후회할 거라고 확신하는 것 같았다.

어째서 이 남자는 그런 말도 안 되는 가정을 거듭하는 걸까. 술기운과 정체를 알 수 없는 열과, 가까이에서 흩어지는 와인 향이 나는 숨결. 그 모든 것들이 사영의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어느새 코앞까지 다가온 유준의 얼굴 말고는 세상이 전부 일그러져 보였다. 앞이 너무 어지러워 사영이 저도 모르게 눈을 감았을 때.

“윤사영.”

절대로 낯설어질 수 없는 목소리 하나가 사영의 귓가를 울렸다.

“저 새끼가….”

얼어 버린 사영보다 먼저 고개를 돌려 상대를 확인한 유준의 입에서 욕이 튀어나왔다. 얼이 빠진 얼굴로 저만치에 서 있는 사람은 다름 아닌 한재우였다.

***

한재우는 윤사영에 관한 일에 있어서 만큼은 충동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당연했다. 모든 것을 철저하게 계획하고, 치밀한 계산 하에 움직이지 않았다면 한재우의 계획은 결코 성공하지 못했을 테니까.

사영에게 화를 내고, 폭력적으로 굴고, 강압적인 잠자리를 가지던 순간들까지. 한재우는 늘 그 모든 걸 계산하고 움직였다.

하지만 지금, 재우가 이 늦은 밤 사영의 호텔 방 앞으로 온 건 계획도 계산도 없이 오로지 충동에서 비롯된 일이었다.

은성에게 두 사람이 함께 나갔다는 소리를 들은 이후 재우는 도저히 이성적인 사고를 할 수가 없었다.

결국 재우는 은성에게 윤사영이 방으로 돌아왔는지 확인해 보라고 몇 번이나 윽박지른 것도 모자라 급기야 자신이 직접 사영의 방까지 찾아오고 말았다.

사영과 유준을 마주친 이 순간까지도 재우는 자신이 비이성적으로 행동하고 있다는 자각조차 하지 못했다. 재우는 그 정도로 감정에 함몰되어 있었다.

더 놀라운 건, 재우가 여전히 제 감정을 뜻대로 컨트롤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너, 지금… 지금 뭐 하는….”

재우는 말을 더듬었다. 분명 두 눈으로 유준과 사영이 하는 짓을 전부 보았는데 그 장면이 뇌까지 제대로 전달이 되지 않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도대체 자신이 지금 뭘 본 건지 이해가 가질 않았다.

아무도 없는 고요한 복도에서 두 사람은 숨결을 나눌 수도 있을 만큼 가까이에 붙어 있었다. 복도의 공기에서 그들이 내뿜은 친밀한 기운을 맡을 수도 있을 정도였다.

유준은 오로지 윤사영에게 다가가는 것만이 그가 원하는 전부라도 되는 양 심혈을 기울여 거리를 좁히고 있었다. 재우는 그의 몸짓이 무엇을 원하고 있는지 보는 순간 알아챌 수 있었다.

귓가에서 삐- 하는 이명이 들렸다. 놀랐기 때문인지, 화가 났기 때문인지, 아니면 둘 다인지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차라리 이곳에 두 사람의 페로몬이 진동이라도 했다면 재우가 지금처럼 얼어붙진 않았을 것이다.

결국 윤사영의 천박한 질투 유발 작전에 김유준이 넘어가기라도 한 모양이라고, 그렇게 합리화를 할 수라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곳엔 아무것도 없었다. 사람의 동물적인 본능을 자극하는 그 어떠한 향도 존재하지 않았다.

알파인 유준은 물론이고 아주 옅은 흔적이라도, 아주 짧은 찰나라도 있었다면 재우가 절대로 놓칠 리가 없는 사영의 향도 거기엔 없었다.

그런 게 없이도, 유준은 금방이라도 사영에게 입을 맞출 듯 다가가고 있었다.

윤사영, 하고 부른 그의 이름은 재우의 비명과 다를 바가 없었다.

재우는 거기에 무력하게 서서 김유준과 윤사영의 시선이 제게로 향하는 걸 바라보았다. 눈이 마주치는 순간 재우는 저도 모르게 어깨를 움찔했다.

믿을 수 없게도, 꼭 사냥감이 된 듯한 기분이 들었다. 사영을 이용해 스타의 반열에 오른 뒤에는 한 번도 느껴 본 적 없는 감각이었다.

자존심이 상했다. 유준도 유준이지만 윤사영 앞에서 이런 얼빠진 모습을 보여 주었다는 걸 용납할 수 없었다. 재우는 서둘러 표정과 몸짓을 갈무리하려 했다.

그런데 이상하게 그게 쉽지가 않았다. 평소처럼 아무렇지 않은 척을 제대로 해낼 수가 없었다.

속으로 어떤 감정을 느끼고 무슨 생각을 하든, 남들에게 여유롭고 온화한 모습을 꾸며 내 보여 주는 건 재우가 가장 잘하는 일이었음에도, 손이 떨리고 입술을 깨무는 걸 막을 수가 없었다.

결국 재우는 놀라고 당황한 기색을 완전히 감추지 못한 채 천천히 두 사람을 향해 다가갔다.

특별한 계획이나 의도가 있었던 건 아니다. 다만 재우는 본능적으로 유준과 사영을 떨어트려 놓고 싶었다. 그뿐이었다.

한 걸음 한 걸음 두 사람에게 다가가는 재우의 머릿속에 지난번 유준과 마주쳤을 때 그의 몸에서 맡았던 페로몬이 맴돌았다.

윤사영은 한재우를 맹목적으로 사랑한다. 설령 한재우가 그를 버리더라도 윤사영은 한재우를 잊지 못하고 평생토록 망가진 채 살아갈 것이다.

단 한 순간도 의심한 적 없던 가정이 처음으로 흔들렸다. 재우는 조금도 예상치 못한 이 순간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재우의 어떤 계획에도 이런 일에 대한 대비책은 없었다.

그래서 재우는 다짜고짜 사영에게 손을 뻗었다. 늘 그랬던 것처럼 사영의 손목을 붙들고 그를 데려가고자 했다.

김유준이 없는 곳에서 단둘이 얘기하길 원했다. 그래야만 자신이 원하는 대로 사영을 주무를 수 있을 테니 말이다.

“뭐야?”

그런 재우의 손을 막은 건 유준이었다. 사영을 향해 내민 재우의 손목을 탁, 소리 나게 쳐 낸 유준이 재우 앞으로 한 걸음 나서며 곧바로 말을 이었다.

“뭐냐고.”

다짜고짜 반말하는 유준의 목소리에서 감출 수 없는 짜증이 묻어났다. 재우의 시선이 짧게 유준의 얼굴로 향했다.

도대체 이 남자는 뭘까. 윤사영에게 어떤 마음인 걸까. 둘은 도대체, 내가 없는 곳에서, 어떤 시간을 보내고 있는가.

온갖 의문에 대한 답이 떠오르기도 전에 분노가 먼저 치밀어 올랐다. 윤사영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주제에 뭐라도 되는 양 제 앞을 가로막는 유준의 행태에 화가 났다.

“네가 상관할 일 아니니까 비켜.”

재우도 굳이 성질을 감추지 않고 응수했다. 지난번 유준에게 받았던 모욕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이번에는 그냥 물러나지 않을 생각이었다.

재우는 곧바로 유준의 뒤에 있는 사영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을 덧붙였다.

“사영아. 얘기 좀 하자.”

유준에게 말할 때와 다르게 사영의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는 부드럽다 못해 애틋하게까지 들렸다. 그 목소리를 들은 유준은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돌려 사영의 표정을 살폈다.

한재우가 어떤 전략을 펼치기로 했는지는 깊이 생각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재우는 자신의 힘으로는 김유준을 절대로 이길 수 없다는 걸 잘 알고 있다. 그러니 그가 지금 할 수 있는 대응은 고작해야 이런 방법밖에는 없는 것이다.

“너한테 할 말이 있어서 그래, 사영아….”

사영의 마음이 약해지고 허물어지도록, 다시 같잖은 연기를 하는 것밖에는.

“적당히 좀 해라. 추해서 못 보겠으니까, 진짜.”

유준은 다시 재우의 말을 가로막았다. 방금까진 갑자기 한재우가 나타난 게 그저 짜증스럽고 불쾌할 뿐이었는데 사영에게 애처롭게 말하는 목소리를 듣자 심장이 불안하게 뛰기 시작했다.

재우는 의기양양한 눈빛으로 아주 짧게 유준을 쳐다보았다.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자신을 밀어내는 유준의 목소리에서 미미한 초조함이 느껴진 탓이다.

한재우와 윤사영의 사이에서 재우가 그토록 절대적인 강자일 수 있었던 이유는 다른 게 아니다.

사영이 재우에게 헌신적이었기 때문에 재우는 심지어 무명이었던 순간에도 윤사영과의 관계에서만큼은 갑일 수가 있었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유준이 정말로 사영에게 사심이 있든 다른 목적이 있는 것이든, 윤사영과 관련된 일에서만큼은 절대로 자신을 이길 수 없다고 재우는 확신했다.

아니, 그는 이 자리에서 그 사실을 확인하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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