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
“…….”
재우는 한참 동안 고장 난 기계처럼 그 복도에 멍하니 서 있었다. 서서 사영의 방문을 하염없이 쳐다보기만 했다. 누군가 복도로 나오지 않은 게 천만다행이었다.
그는 그냥 거기에 서서 눈만 깜빡이고 있었다. 화도 내지 않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머릿속이 텅 비어 버린 것 같았다.
도대체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아예 파악조차 하지 못한 사람처럼, 재우는 그냥 서 있기만 했다.
‘왜 자꾸 귀찮게… 하는 거예요?’
사영이 했던 말이 귓가에서 윙윙거렸다. 윤사영이 할 수 있을 거라고는 단 한 번도 생각하지 못했던 말들이었다.
‘나도 이제… 이런 식으로 쓸데없는 감정 소모하는 거 지겨워요….’
귀찮고 지겨워하는 건 늘 한재우의 몫이었다. 그건 결단코 사영에게 허락된 감정들이 아니었다.
그래서 아이러니하게도 재우는 그 자리에 서서 자신에게 수도 없이 비슷한 말들을 들었을 사영을 떠올렸다.
지겨워. 네가 지긋지긋해.
‘그러니까 그만 돌아가요.’
제발 내 앞에서 사라져.
윤사영에게 상처 주겠다는 일념으로 집요하게 내뱉던 말들이 사영의 음성 뒤로 환청처럼 따라붙었다.
솔직히 그간 재우가 사영에게 쏟아 냈던 말의 수위에 비하면 오늘 그가 한 말은 아무것도 아니다. 하지만 중요한 건 말의 수위가 아니다.
중요한 건 그 말을 누가, 누구에게 했냐는 점이다. 한재우는 가능하지만 윤사영은 불가능했던 말을 그가 했다는 게 중요했다.
재우가 여전히 멍한 얼굴로 문을 향해 한 걸음 다가섰다. 유준의 품에 기대어 보란 듯이 뒤돌아서던 사영의 모습을 떠올리자 당장이라도 안으로 들어가 윤사영을 끌어내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어떻게 윤사영이, 어떻게 나에게.
어디서부터 비롯되었는지 알 수 없는 격렬한 감정이 놀라 얼어붙었던 마음의 틈을 비집고 나와 범람하기 시작했다.
사영이 재우의 질투를 유발하기 위해 연기하고 있다는 추측은 떠올릴 수도 없었다. 이번만큼은 그럴 수가 없었다.
사영의 눈빛을 보았기 때문이다. 분명 떨고 있으면서도 물러서지 않고, 시선을 피하지도 않고 제 할 말을 하던 사영의 눈동자는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빛을 띠고 있었다.
재우는 예민한 사람이었다. 사영에 관해서는 더더욱 그랬다. 세상 그 누구보다 사영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은 자신이라고 확신할 수도 있었다.
그래서 재우는 오늘 사영에게 무엇이 없었는지 알 수 있었다. 오랫동안 자신을 보는 사영의 눈동자에 언제나 존재하던 지긋지긋한 애정이, 지겹고 한심스러운 집착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을 말이다.
“말도… 말도 안 돼….”
한참 만에 재우가 겨우 내뱉은 말은 전혀 의미 없는 부정이었다.
“그럴 리가 없어….”
아무런 근거도, 논리도 없는 허울뿐인 맹신이었다. 윤사영은 한재우에게 절대로 그럴 수 없다는, 한때 그들의 세계를 지탱해 주던 이미 지나가 버린 명제만이 지금 재우가 매달릴 수 있는 전부였다.
“아니야… 아니야….”
하지만 지금 재우에게는 그것 말고는 남은 게 없어서. 애초에 사영의 마음 말고는 가지고 있던 것이 아무것도 없어서.
지금 다시 사영을 마주치면 혹시라도 지금 느끼는 불안이 사실이 될까 겁이 나기까지 해서.
그래서 재우는 차마 문을 두드리지도 못한 채 패배자처럼 그냥 거기에 서 있기만 했다.
단순히 사영과 유준에게 그런 취급을 당한 게 자존심 상해 화가 난 것뿐이고, 그래서 말문이 막힌 거라고 자위하는 게 재우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대처였다.
한심스럽게도 말이다.
***
유준은 도무지 잠들 수가 없었다. 방으로 돌아와 씻고 침대에 누운 지 꽤 오랜 시간이 흘렀는데도 정신이 말똥말똥했다.
결국 유준은 침대 옆에 놓인 작은 조명을 켜고 한숨을 길게 내쉬며 천장을 바라보았다.
기절하듯 잠든 사영에게 이불을 덮어 주고 나서도 유준은 한참이나 그의 곁을 떠날 수가 없었다.
한재우가 있을까 봐, 라는 이유는 다만 핑계에 지나지 않았다. 그 알량한 핑계로 사영은 속일 수 있을지 모르지만 자기 자신을 속이는 건 불가능했다.
한재우가 있든 없든, 그가 사영을 다시 찾아오든 아니든 유준은 그것과 상관없이 거기에 머무르고 싶었다. 그냥 사영의 곁을 떠나기 싫어서.
사영이 잠든 것을 확인한 뒤 몇 번이나 그의 뺨을 매만지고 머리를 쓸어 넘겨 주었는지 모른다. 볼썽사납고 추잡한 행위라는 걸 알면서도 도무지 충동을 제어할 수가 없었다.
“씨발, 이게 말이 되냐….”
견딜 수 없는 자괴감이 밀려와 유준은 손을 들어 제 얼굴을 마구 문질렀다. 이럴 순 없다. 이럴 수는 없었다.
어떻게 자신이, 어떻게 윤사영을, 어떻게 그렇게까지 사랑스럽다고 느낄 수가 있냔 말이다.
하지만 유준이 그렇게 자신의 마음을 부정하면 마음 한편에서 곧바로 반박하는 생각들이 튀어나왔다.
솔직히 오늘 한재우가 사영에게 가련한 척을 했을 때 유준은 조금 낙담했다. 어쩌면 사영이 그를 뿌리치지 못할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사영이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많이 변했다는 건 누구보다 유준이 가장 잘 알았다. 그러나 한 생을 전부 잠식했던 강박을 완전히 벗어 버리기엔 이번 생은 지나치게 짧았다.
사영의 노력 여하와 상관없이 한계가 있는 일이었다는 말이다. 그래서 유준은 어쩌면, 어쩌면 사영이 자신을 내버려 두고 한재우가 내민 손을 잡고 따라갈 수도 있겠다고, 정말로 그렇게 생각했다. 그 정도로 한재우의 목소리는 파급력이 있었다.
그런데 사영은 그러지 않았다. 단순히 그러지 않은 것뿐만이 아니라 자신이 할 수 있는 가장 날카로운 말로 재우를 밀어냈고, 그 앞에서 보란 듯이 유준을 선택하기까지 했다.
그 순간 유준이 느낀 짜릿함은 이루 말로 표현할 수조차 없을 정도였다.
초등학생도 아니고, 누가 누구랑 더 친하냐 따위로 우월감을 느낀다는 게 얼마나 유치한 감정인지 알면서도 그 순간엔 어쩔 수가 없었다.
그러니 유준이 가진 마음의 어느 조각들은 그런 사영이 견딜 수 없이 사랑스럽게 보이는 것도 당연하다고, 그렇게 항변했다.
“하….”
그러나 유준은 여전히 심각한 얼굴로 한숨만 푹푹 내쉬고 있다.
설령 사영이 눈부신 성장을 이뤄 내고 있다고 한들 그게 자신이 자꾸만 사영을 안고 싶고, 만지고 싶은 충동에 휩싸이는 근거가 되진 못한다는 걸 알고 있는 탓이다.
결국 유준은 베개에 얼굴을 묻고 “으으…!” 하고 비명과 비슷한 신음을 터트렸다. 머리는 너무 복잡하고 심란한 마음은 가다듬을 길이 보이질 않았다.
최악인 건, 이런 순간에도 눈을 감자 한재우의 앞에서 제 품에 얌전히 기대오던 사영의 모습이 떠올라 자꾸만 입꼬리가 올라간다는 사실이었다.
아무래도 단단히 망한 모양이다. 정말로 망했다. 벗어날 수 없는 미로에 갇힌 심정으로 유준은 그날 밤이 새도록 잠을 이루지 못했다.
***
“조금이라도 어디 안 좋은 거 같으면 꼭 말씀하셔야 해요.”
“응. 그럴게. 정말로 꼭 그럴 테니까 걱정하지 마.”
사영에게 몇 번이나 다짐을 들으면서도 우종은 영 마음이 놓이질 않아 침울한 표정을 풀지 못했다.
어제 촬영도 일찍 끝났고 그 이후엔 유준과 저녁 식사를 하고 온 것 외에 다른 일은 없었던 걸로 알고 있는데 아침부터 사영의 안색이 너무 안 좋았다.
혹시 식사 중에 또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아니면 몸이 안 좋다거나 다른 걱정거리가 있어 잠을 설친 건지.
짧은 순간에 오만가지 걱정이 우종의 머릿속을 어지럽게 만들었는데 정작 당사자는 괜찮다는 말만 하고 있으니. 우종으로서는 속이 탈 수밖에 없는 일이다.
사영은 그런 우종의 표정을 살피며 남모르게 한숨을 쉬었다. 괜한 걱정을 끼친 것 같아 미안했지만 그렇다고 어제 있었던 일을 말해 줄 수도 없는 일이다.
결국 사영은 우종의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리기 위해 서둘러 입을 열었다.
“그나저나 오늘 촬영장에 무슨 일 있어?”
급하게 찾은 화두이긴 했지만 전혀 뜬금없는 주제는 아니었다. 사영의 말대로 오늘 촬영장 분위기는 평소와 달리 어딘지 모르게 조금 어수선해 보였다.
다행히 우종은 사영이 내민 주제에 금방 관심을 보이며 대답했다.
“아, 그게… 오늘 촬영장에 대규모 밥차가 오는 모양이더라구요.”
“밥차?”
“네. 김유준 배우 팬들이 보내는 거라고 하던데….”
“아….”
우종의 설명을 들은 사영의 눈동자가 살짝 가라앉았다. 앞을 보고 걷느라 그를 눈치채지 못한 우종이 말을 덧붙였다.
“점심때에 먹을 수 있게 준비하는 모양인데 뭐가 엄청 많이 온다나 봐요. 김유준 배우 팬들 서포트 워낙에 유명하잖아요.”
우종의 말대로 유준의 팬들은 수가 많기도 하지만 열정적이기로 유명했다. 특히나 그들의 서포트는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였다.
오죽하면 스태프들이나 경험이 많은 엑스트라 배우들 사이에서 그 서포트 때문에 유준과 같이 작업하고 싶다는 말이 심심치 않게 나오기까지 했다.
“그렇구나….”
사영은 담담하게 대답하며 패딩 지퍼를 목 끝까지 더 당겨 올렸다. 오늘따라 아침 바람이 유독 차가운 것 같았다.
연기를 그만두기 전, 사영 역시 팬들에게 엄청난 서포트를 받았을 때가 있었다.
밥차며 도시락이며 추운 겨울에는 따뜻한 커피차에 방한용품 선물까지, 팬들은 언제나 사영을 위해 세심하게 신경 써 그를 돕곤 했다.
사영이 그들의 애정에 얼마나 감동하고 고마워했는지는 설명할 필요도 없는 일이었다.
꼭 체한 것처럼 명치가 답답해졌다. 그런 팬들이었는데. 그렇게 고마운 사람들이었는데. 그런 그들에게 자신은 무슨 모진 짓을 한 걸까.
이제 와 과거의 인기가 그립다거나 다시 그런 사랑을 받고 싶다거나 하는 욕심이 있는 건 아니었지만 그들에게 제대로 사과하지도, 보답하지도 못했다는 사실이 무거운 짐이 되어 어깨를 짓눌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