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복수하는 회귀자를 사랑하는 법-113화 (113/193)

#113

사영은 긴장한 표정으로 자신을 찍는 정민의 휴대폰을 바라보았다. 우종의 반응을 보아하니 나쁜 상황은 아닌 것 같긴 했지만 그렇다고 마냥 마음을 다 놓을 순 없었다.

안 그래도 유준의 팬들에게 부채감이 있는 사영으로서는 그들을 대하기가 어려울 수밖에 없었다.

심호흡을 한 사영이 앞을 향해 정중하게 허리를 굽혀 인사를 하고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안녕하세요. 김유준 배우와 함께 영화 <하지>를 촬영 중인 윤사영입니다.”

너무나도 정석적인 인사에 유준이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누가 보면 서로 사적으로 조금도 교류가 없는 사이인 줄 알 것 같았다.

그러나 너무 긴장해서 유준의 웃음소리는 듣지도 못한 사영은 긴장한 얼굴로 제 할 말을 이어 갔다.

“유준 씨처럼 좋은 배우와 함께 일하게 되어서 정말 영광이에요. 매일… 김유준 배우에게 많이 배우고 있습니다.”

말을 하면 할수록 머릿속이 점점 더 새하얘지는 기분이었다. 괜히 안 그래도 자신이 거슬릴 사람들의 마음을 더 상하게 만드는 건 아닌가 걱정이 되었다.

긴장한 사영은 저도 모르게 말을 덧붙이기 시작했다.

“오늘은 김유준 배우 덕분에 이렇게 좋은 것들도 받고… 맛있는 식사도 하게 되었어요. 정말 감사합니다. 그리고 죄송해요….”

실실 웃으며 사영을 보던 유준의 표정이 놀라 굳은 건 바로 그 순간이었다. 우종과 정민의 표정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이미 귀가 먹먹해지고 손발이 차갑게 식은 사영은 주변의 반응을 알아채지 못하고 말을 이었다.

“저 때문에 걱정이 많으실 거라고… 생각해요. 지금도 그러실 거고… 제가 크게 믿음직스러운 동료는 되지 못하겠지만 그래도 민폐를 끼치지 않기 위해서 열심히… 열심히 노력하겠습니다. 잘 먹을게요. 정말 감사드려요.”

“…그냥 같이 인사나 하자고 부른 건데, 누가 그렇게 자책을 하라고 했어요?”

다시 한번 허리를 깊이 숙여 인사하는 사영의 손목을 잡아 슬쩍 당기며 말을 붙인 건 유준이었다.

사영의 솔직한 사과에 당황해서 어찌할 바를 모르던 정민은 두 사람을 계속 찍고만 있었다.

“사영 씨가 뭘 잘못해서 얻은 소문도 아닌데. 그런 거 신경 쓰고 사과하고 그러지 말아요.”

그러더니 눈만 깜빡이고 있는 사영에게 다시 한번 씨익 웃어 주고는 다시 휴대폰 카메라를 향해 손을 흔들며 말했다.

“좋은 배우와 함께 정말로 열심히 찍고 있으니까 기대해. 알겠지? 그럼 나 간다.”

정민은 화면을 향해 다시 손을 흔드는 유준의 모습을 마지막으로 녹화를 중지시켰다. 그리고 정민이 곧장 유준을 향해 물었다.

“형… 이거 다 올려요?”

유준이 대답했다.

“뭘 당연한 걸 물어. 올리라고 찍었는데.”

정민은 이제 정말, 될 대로 되라는 기분이 되어 버리고 말았다.

***

미친 기뮤준 윤사영 사긤??

처음에 단둘이 데이트했네 어쩌네 했을때는 ㅇㅇ다음 구라~ 이랬는데 사진떳네??? 미친 거 아냐??? 말이됨? 진짜임?? 야 도랏다 내가 왜 한재우 눈치보이냐 야 진짜 ㅇ뉴사영 레전드인생 ㄷㄷㄷ

└ 안사귐 그냥 밥 먹은 거

└└ 같이 촬영하는데 구우지 둘이서만 따로 나와서 레스토랑에서 밥을 먹었다? 와인이랑? 그냥?

└└ 김유준 영화 그렇게 많이 찍었어도 동료 배우랑 매니저도 없이 단둘이 ‘그냥’ 밥먹는 거 본적이 없음

└ 김유준이 뭐가 아쉬워서 윤사영이랑 사귀냨ㅋㅋㅋㅋㅋㅋㅋㅋ 말이 되는 소리를 해라 하여간에 윤사영빠들 희망회로가 불타다 못해 미쳐날뛰네 ㅋㅋㅋㅋㅋㅋ

└ 아니 근데 존나 웃긴게 맨날 윤사영 누가 좋아한다고 쓰냐고 욕하면서 이럴때만 윤사영빠를 찾네 ㅋㅋㅋㅋㅋ

└└ 그니까 ㅋㅋ 있다는 거야 없다는 거야 하나만 해 ㅋㅋㅋㅋ

└ 야 솔직히 개잘어울림

└└ 와꾸 클라스가 다르다 둘 중 하나만 있어도 쩌는데 둘이 같이 있으니까 이건 머...

└ 김유준 나만 좀 실망인 거...? 아무리 그래도 동료 배우한테 너무 배려가 없네

└└ ???? 개뜬금 오지네 무슨 배려? 설마 한재우???

└└ 이제 제삼자된 한재우는 좀 빠져라 무슨 비련의 주인공이야? 배려는 무슨ㅋㅋㅋㅋㅋ

└ 내 배우 윤40이랑 엮이는 거 솔직히 나도 좋진 않은데 ㅎㅈㅇ가지고 저러니까 쫌 욱기넼ㅋㅋㅋㅋㅋ 누가보면 지들은 그동안 내 배우한테 배려 오졌는줄?

└└ 2222 김유준 한재우로 망상질하던 거 누구...? 지들 망붕 실패할까봐 저러는 거면서 배우 생각하는 척 시바 ㅋㅋㅋ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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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은성 씨?”

촬영장 한쪽 구석에서 몸을 웅크린 채 돌담에 기대어 서 있던 은성은 생각지도 못한 목소리에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어떻게 자신을 발견한 건지, 저만치에서 사영이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다가오고 있었다. 머리로 뭔가를 생각할 새도 없이 은성의 입이 열렸다.

“형님은 대기실에 계세요.”

“…네. 그런 것 같아서 온 거예요.”

사영의 대답을 듣고 나서야 은성은 자신이 쓸데없는 말을 했다는 걸 깨달았다. 너무 당황해서 저도 모르게 오랜 습관이 발동된 모양이다.

사영의 관심은 언제나 한재우에게 집중되어 있었다. 재우가 말하지 말라고 명령한 상황이 아니라면 은성은 늘 사영이 묻지 않아도 재우의 행방을 말해 주곤 했다.

은성은 다소 불편한 표정으로 사영이 제게 점점 더 가까이 다가오는 걸 지켜보았다. 안 그래도 사영은 대하기 어려운 인물인데 방금 있었던 일 때문에 그를 보는 게 더욱 불편했다.

유준과 사영의 스캔들이 터졌다. 근거 없이 허황된 소문도 아니고 둘이 ‘데이트하는 것처럼 보이는’ 사진까지 공개가 되었으니 순식간에 말이 퍼지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리고 당연히 그 스캔들은 한재우에게도 흘러 들어갔고 말이다. 은성은 여태 재우에게 엄청난 폭언을 듣고 대기실에서 쫓겨나듯 나온 상태였다.

날이 추웠지만 다른 곳에 가 있을 수도 없었다. 언제 다시 재우가 자신을 찾을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가 찾자마자 곧바로 가지 않으면 분명 몇 배로 더 곤욕을 치르게 될 것이다. 요즘 한재우는 전에 겪어 본 적이 없을 정도로 폭언 수위가 높아졌다.

그런데 한재우를 그렇게까지 화나게 만든 장본인이 다가오니 은성은 좌불안석할 수밖에 없었다.

다가오는 사영의 뒤쪽으로는 당장 자신에게 달려들기라도 할 것 같은 얼굴인 사영의 매니저가 있었다.

어쩐지 눈을 제대로 마주칠 수가 없어 이리저리 시선을 피하고 있는데 그사이 은성의 바로 앞까지 다가온 사영이 입을 열었다.

“무슨 일 있었어요?”

“…….”

“그 사람이 또 은성 씨한테 화풀이했나 보네요.”

애꿎은 바닥만 바라보던 은성이 번뜩 고개를 들어 사영을 바라본 건 바로 그 순간이었다. 시선을 마주하자 저도 모르게 등골이 오싹해졌다.

자신을 보는 사영의 얼굴에서는 쉽게 감정을 읽을 수 없었다. 그가 무슨 생각으로 이런 말을 하는 건지 짐작하기가 어려웠다.

은성이 기억하는 사영은 언제나 모든 감정이 얼굴에 전부 다 드러나는 사람이었다. 그는 조용했고, 늘 아무렇지 않은 척을 했지만 은성은 어렵지 않게 사영이 매 순간 상처받고 있음을 알아챌 수 있었다.

그런데 지금 은성의 앞에 있는 사영은 도무지 표정을 읽을 수가 없었다. 꼭 전혀 다른 사람을 보는 것 같았다.

은성의 머릿속에 지금도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든 스캔들이 떠올랐다. 김유준일까. 사영이 이렇게 달라진 이유가 정말로, 김유준과 그가 무슨 사이라도 되었기 때문인가.

원래대로라면 이제 은성이 상관할 바가 전혀 아닌 일이 자꾸만 머릿속에서 의문이 되어 떠돌았다. 정말로 두 사람이 사귀기라도 해서, 그래서 한재우는 이토록 이성을 잃은 걸까.

“그런… 그런 거 아니에요….”

은성은 서둘러 생각을 비우며 대답했다. 깊은 생각은 매니저에게 결코 도움이 되지 않는 법이다.

두 사람 사이에 짧은 적막이 흘렀다. 어색함을 견디기 힘든 은성이 아무래도 먼저 자리를 피해야겠다 싶어 인사를 하려 했을 때, 그보다 조금 앞서 사영이 입을 열었다.

“은성 씨.”

“네? 아, 네….”

“혹시 한재우가… 전보다 더 심하게 은성 씨한테 폭력적으로 굴어요?”

은성이 다시 멍한 표정이 되어 사영을 쳐다보았다. 도대체 왜 이런 질문을 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김유준 때문이든 무엇이든, 만약 사영이 정말로 무언가 특별한 깨달음을 얻어 한재우가 그에게 했던 일들은 부당하다 못해 범죄에 해당하는 일이었다는 걸 알아챘다면.

그랬다면 은성은 사영에게 있어 공범이나 마찬가지인 사람이다. 상대적으로 죄질이 약하다고 해서 처벌을 피해 갈 수는 없는 법이었다.

그래서 은성은 지금 사영의 목소리가 정말로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꼭, 은성을 염려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무슨 말씀이신지 잘… 모르겠는데요….”

“은성 씨. 은성 씨에게도 어쩔 수 없는 이유가 있겠죠. 나도 그걸 모르지는 않아요.”

“…….”

“하지만 은성 씨가 나한테 했던 일이 옳지 않은 일이었듯이….”

한재우가 때때로 사영에게 물리적인 형태의 폭력을 가한다는 걸 알면서도 은성은 그걸 모른 척했다.

사영의 손목에, 목에 이따금 보이는 멍이 누구 때문에 생긴 건지 애써 생각하지 않으려 했다.

그런데 은성이 그렇게 외면해 왔던 사영이 은성에게 말하고 있었다.

“지금 은성 씨가 당하고 있는 일도 절대로 온당한 일이 아니에요.”

“…….”

“돈 때문에. 사랑 때문에. 더 중요한 것 같은 다른 무언가 때문에 자신을 버리지 말아요. 언젠가… 꼭 후회하게 되는 날이 와요, 은성 씨.”

은성은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사영의 말이 무거운 돌덩이가 되어 명치를 누르는 것 같았다.

돈 때문에. 사랑 때문에. 그가 들었던 이유 하나하나가 칼날처럼 가슴에 박혀 왔다.

“그럼 수고해요.”

그 인사를 끝으로 사영은 더 이상 은성에게 일말의 관심도 남아 있지 않다는 듯 몸을 돌려 멀어졌다.

은성은 그 자리에 서서, 얼마 지나지 않아 한재우가 전화해 ‘어디야, 이 새끼야!’ 하고 윽박지르기 전까지 계속 사영이 사라진 곳을 보고만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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