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복수하는 회귀자를 사랑하는 법-114화 (114/193)

#114

“형, 이제 저런 애랑은 말도 섞지 마세요.”

사영은 은성에게서 멀어지자마자 옆으로 바싹 다가와 말을 건네는 우종의 심각한 목소리에 가볍게 웃음을 터트렸다.

우종이 얼마나 살벌한 시선으로 감시하듯 은성을 노려보았는지, 오죽했으면 뒤돌아 있던 사영까지도 그 시선을 느낄 수 있을 정도였다.

자신은 걱정이 되어 죽겠는데 사영이 웃어 버리자 더 마음이 초조해진 우종이 눈썹을 있는 힘껏 올리며 말을 덧붙였다.

“제가 사람 보는 눈이 있는데 저거도 속이 시꺼먼 놈이에요. 그냥 상종을 안 하는 게 제일 좋아요.”

우종이 뭘 염려하는지 사영도 모르는 바는 아니었다. 한재우와 엮여서 좋을 게 하나도 없는데 왜 굳이 그의 매니저와 대화하는지 이해가 가지 않는 게 당연했다.

그들은 집요하고 치졸하게 사소한 꼬투리를 잡고 사실을 날조하는 사람들이다. 우종의 말대로 저런 사람들과는 아예 상종하지 않는 게 분란에서 멀어지는 길이었다.

그런데도 사영이 굳이 은성에게 다가간 건 그에게 어쭙잖은 조언을 하고 싶어서가 아니다.

물론 은성에게 한 말은 그의 진심이었다. 그건 사영이 한 번쯤은 그에게 해 주고 싶었던 말이기도 했다.

한재우에 의해 억압된 삶을 산다는 게 어떤 건지, 그게 사람의 정신을 얼마나 피폐하게 망가트리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사영의 의도는 은성이 단순히 한재우에게서 벗어나길 바란 것만이 아니었다. 다만 사영은, 한재우의 곁에 있는 사람 중 누가 가장 그에게 치명적인 한 방을 날릴 수 있을지를 생각해 보았을 뿐이다.

사영은 언젠가 유준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사영 씨에게서 연기를 빼앗는 건… 한재우에게도 절대로 쉬운 일은 아니었을 거예요.’

‘사영 씨를 연기에서 밀어내기 위해 그 역시 가진 모든 걸 쏟아 필사적으로 매달렸을 겁니다.’

그 말을 들은 후로 사영은 종종 그 말을 머릿속으로 거듭 되새겨 보곤 했다.

유준이 일러 주기 전에는 한 번도 그런 식으로 생각한 적이 없었다. 사영이 보기에 자신은 너무나도 나약하고 한심한 사람이라서, 재우가 쉽게 승리를 거머쥔 것만 같았다.

자발적으로 나서서 재우에게 무릎을 꿇고 매달렸으니까. 한재우가 자신을 온전한 삶에서 쫓아내고 망가트리는 건 숨 쉬는 것보다 더 쉬운 일이었을 거라고, 그렇게 여겼다.

그런데 유준의 말을 듣고 나서 사영은 깨달았다. 어쩌면 유준의 말대로, 그 모든 일들이 마냥 쉬운 일은 아니었을지도 모르겠다고 말이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복수를 다짐한다고 해 놓고 자신이 그간 얼마나 안일하게 굴어왔는지를 깨달았다.

한재우는 자신을 이용하고 망가트리기 위해 그렇게나 필사적으로 노력했는데. 그랬을 텐데. 자신은 죽음을 겪고, 복수한답시고 돌아와 가장 중요한 일은 유준에게 맡겨 놓고 뒤에 물러나 있기만 했다.

재우를 유혹하는 것도, 다시 진창으로 처박는 것도 전부 유준의 몫으로 생각했다. 그 안에 사영의 노력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래서 사영은 한재우 역시 필사적이었을 거란 유준의 말에 부끄러움을 느꼈다.

단순히 사랑이 이루어지지 않는 것만으론 부족했다. 사영이 그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했던 걸 전부 잃었듯 한재우 역시 그래야 했다.

무슨 짓을 해서라도 얻고 싶었던 인기를, 너무 간절해서 한 사람의 인생을 짓밟는 일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게 될 만큼 절박했던 그것을, 한재우도 잃어야 공평했다.

그리고 그걸 위해 노력해야 하는 사람은 김유준이 아니라 윤사영 그 자신이었다. 사영은 이제 그걸 알았다.

그래서 사영은 오늘 은성이 혼자 있는 걸 보고 일부러 그에게 다가갔다. 부질없는 노력이 될 수도 있겠지만 최은성이라면 가치가 있었다.

오랜 시간 동안 한재우의 측근으로 있었던 그의 마음을 움직일 수만 있다면 그보다 더 날카로운 무기는 없을 테니 말이다.

차마 우종에게는 다 털어놓을 수 없는 생각들을 조용히 정리하며 사영은 우종을 향해 대답했다.

“그래, 알았어. 조심할게. 걱정해 줘서 고마워.”

순간 우종의 표정이 잠시 멍해졌다. 걱정스러운 마음에 말을 하긴 했지만 사영이 이렇게 순순히 알았다고 대답을 해올 줄은 몰랐다.

지금껏 걱정하는 우종을 물리고 한재우와 단둘이 대화한 게 벌써 몇 번이던가. 그래서 우종은 이번에도 사영이 괜찮으니까 걱정하지 말라고 말할 줄 알았다.

지난번 민망함을 무릅쓰고 저를 조금만 더 믿어 달라고 했던 게 효과가 있었던 건가 싶어 이루 말할 수 없이 마음이 뿌듯해졌다.

그래도 괜히 티를 냈다가 괜히 어색한 분위기를 만들까 싶어 우종은 필사적으로 입술에 꾹꾹 힘을 주며 아무렇지 않은 척 사영과 발을 맞춰 걸었다.

저딴 것들이 아니어도 우종은 지금 신경 쓸 게 너무 많아 머리가 터질 지경이었다.

우종은 조금 전 회사 대표와 통화했던 내용을 머릿속으로 떠올리며 사영을 향해 다시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것보다도 형….”

“응?”

“그… 대표님께 연락이 왔었는데요.”

“아… 그랬어?”

“네. 그게… 그러니까 대표님이 하시는 말씀이….”

“뭔데 그렇게 망설여? 편하게 말해도 괜찮아.”

지금 같은 상황에 대표님이 우종에게 전화한 이유야 뻔했다. 사영은 혹시나 자신이 상처받을까 말을 고르는 우종에게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이윽고 우종이 말을 시작했다.

“그러니까 스캔들이요….”

“…응.”

“대표님이 혹시 회사 차원의 대응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말만 하시라고….”

대충 어떤 이야기를 할지 예상하긴 했지만 막상 스캔들이라는 단어가 직접적으로 귀에 들어오자 심장이 덜컹 내려앉을 수밖에 없었다.

레스토랑에서 사람들의 시선이 끊이지 않는 걸 느꼈을 때 어느 정도는 이 만남이 어떤 식으로든 이슈가 될 거라는 걸 예감하긴 했다.

하기야 언제나 모든 관심의 중심에 있는 유준과 함께 있었으니 당연한 일이긴 했다. 유준은 방송국 복도에서 우연히 누군가와 스치기만 해도 기사가 나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짐작했다고 해서 정말로 그와 자신의 사진이 ‘데이트’라는 타이틀을 달고 기사화된 것을 보는 게 아무렇지도 않을 순 없었다.

게다가 대중의 반응 역시 사영이 생각한 것과는 전혀 달랐다. 사영은 설령 스캔들이 난다고 해도 그걸 진지하게 믿을 사람은 아무도 없을 거라고 여겼다.

천하의 김유준이 윤사영 같은 이와 사귄다는 허황된 말을 누가 믿겠느냔 말이다. 아마 3류 찌라시라고 일컬어지는 곳에서나 좀 떠들다 팬들과 대중의 욕을 먹고 금세 사라지게 될 거라고 사영은 생각했다.

그래서 사영은 연예계 메이저 언론이 앞다투어 이 소문을 퍼트리는 것과 진지하게 둘의 관계를 짐작하는 대중의 반응이 낯설고 놀라웠다.

스캔들 나라고 이러는 거라 말하던 유준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난데없이 마른하늘에 날벼락을 맞은 유준의 회사와 팬들에게는 그저 미안한 마음뿐이었다.

또다시 머릿속이 복잡해진 사영이 작게 한숨을 내쉬곤 우종에게 말했다.

“일단 너무 감사하다고 전해 주고… 아직은 괜찮은데 혹시라도 필요한 게 생기면 내가 꼭 말씀드리겠다고, 그렇게 말해 줘.”

“네! 그럴게요! 그리고 또….”

“응?”

“혹시 이 일과 관련해서 제가 어떤 식으로 말해 줬으면 좋겠다든가… 시키실 일이라든가… 그런 게 있으실까 해서요.”

이어진 우종의 물음에 사영이 잠시 걸음을 멈추고 우종을 바라보았다.

사실 스캔들 기사를 접하고 누구보다 상황을 똑바로 알고 싶었을 사람은 우종이었을 것이다. 임시라고 해도 그는 사영의 매니저였고, 매니저라면 응당 이런 일을 잘 대처할 수 있어야 하니 말이다.

그런데도 우종은 지금껏 사영에게 개인적인 어떤 질문도 하지 않고 참아 주었다. 지금도 사실을 캐묻는 게 아니라 혹시라도 사영이 따로 원하는 대응 방식이 있을까 봐, 우종은 오직 그걸 묻고 있었다.

“…아니야. 그런 거 없어. 너는 그냥 아는 바가 없다고 대충 둘러대면 돼.”

“아….”

“그리고… 그 소문은 일단… 사실이 아니니까 걱정하지 말고.”

사영은 우종에게 솔직하게 대답했다.

솔직히 이 스캔들은 진짜라고 믿는 사람들이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사영에게 유리했다. 그래야 한재우가 유준 때문이든 아니면 자신 때문이든 더 이 일에 영향을 받을 테니 말이다.

어제 한재우의 반응으로 짐작해 보건대, 유준의 말대로 그는 유준과 사영의 관계에 히스테릭할 정도로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그래서 사영은 이왕 이렇게 된 거 뻔뻔하게 이 스캔들을 더 이용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여전히 자신을 걱정하는 우종의 앞에서까지 연기를 하고 싶진 않았다.

“…네! 그럼 긍정하지도, 부정하지도 않고 그냥 의뭉스럽게 대처할게요.”

우종은 사영의 설명이 없이도 의도를 정확하게 간파했다.

사영이 굳이 거기까지 우종에게 바란 건 아니었다. 다만 사실이 아니라고 하면서도 부정하지 말고 그냥 모른다고 말하라는 대답이 가진 이면을 우종이 곧바로 눈치챈 것이다.

사영은 그제야 다시 우종을 향해 미소를 지으며 말을 덧붙였다.

“너 같은 매니저를 만나고… 알고 봤더니 내가 정말 운이 좋은 사람이었던 것 같아.”

“무, 무슨 그런 말씀을 하세요….”

“정말이야. 네가 없었으면 나는 지금 더 외롭고 더 힘든 싸움을 하고 있었을 거야. 고마워, 우종아.”

그건 한치의 꾸밈도 없는 사영의 진심이었고 우종은 이번에도 아무런 설명 없이, 그 진심을 그대로 느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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