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복수하는 회귀자를 사랑하는 법-120화 (120/193)

#120

“사영아….”

두 번째 부름은 울먹임과 닮아 있었다. 마주 닿은 가슴으로 평소보다 빨라진 사영의 심장 박동이 느껴졌다. 우습게도 유준은 그게 슬펐다. 알 수 없는 방식으로 벅차오르기도 했다.

이 어지러운 감정을 뭐라고 설명하면 좋을지 짐작할 수가 없었다.

사영은 지금 나를 알까. 지금 자기를 안고 있는 게 한재우가 아닌 김유준임을 알고 있을까. 혹시라도 무의식중에 오래전 결혼 생활 중의 어느 밤을 헤매고 있는 건 아닌가.

한재우를 사랑했던 날들을 악몽처럼 꾸며 자신을 끌어안고 있는 건 아닐까.

김유준과는 어울리지 않는 구질구질한 상념들이 빠르게 머릿속을 채웠다가 또 다른 구차한 상념에 밀려나길 반복했다.

그때, 유준의 품에서 흐느끼듯 사영이 입을 열었다.

“…유준 씨.”

그 순간 유준의 모든 행동이 멈췄다. 그야말로 시간이 정지된 것처럼 유준은 그대로 멈춰 버렸다. 사영이 말했다.

“미안… 미안해요…. 흑….”

“…….”

“유준 씨한테 이러면… 안 되… 안 되는… 이제 가… 가세요….”

유준의 끌어안은 팔이 애처롭게 떨렸다. 유준을 밀어내려고 하는데 몸에 힘이 제대로 들어가지 않는 모양이었다.

“미안해요….”

사영이 거듭 사과를 해 왔을 때, 멈춰 있던 유준의 시간이 비로소 다시 흐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유준은 자신이 무엇을 하고 싶은지, 해야 하는지를 정확하게 깨달을 수 있었다.

유준의 두 손이, 사영보다 훨씬 크고 단단한 그 손이 사영의 등과 허리를 꽉 끌어안았다.

제게 파묻히게 하기라도 할 기세로 사영을 안은 유준은 제 향을 아주 섬세하게 조절하여 사영의 몸을 전부 감쌌다.

그를 흥분시키려는 목적이 아닌, 사영을 안정시키려는 목적을 가진 향이었다. 거대한 바다와 같은 유준의 향에 파묻힌 사영의 숨이 가늘게 떨렸다.

불안정하게 날뛰던 사영의 페로몬이 서서히 유준의 것과 부드럽게 얽혀 들기 시작했다. 유준은 한 손으로 사영의 등을 조심스럽게 쓰다듬듯 쓸어내리며 말했다.

“괜찮아요.”

할 수 있는 말은 많았다. 당신은 내게 아무것도 강요하지 않았고, 처음부터 지금까지 나는 내가 원해서 여기에 있는 거니까 나한테 미안해할 필요는 전혀 없다고.

유준은 그렇게 조금 더 구체적으로 사영에게 제 마음을 설명할 수도 있을 것이다.

“내가 옆에 있어 줄게요.”

하지만 유준은 그 많은 말들 중에서 가장 중요한 말을 찾았다. 사영이 제대로 알아듣지 못하는 상황이라고 하더라도 반드시 얘기하고 싶은 그런 말들만 골랐다.

“사영 씨가 어떤 선택을 하든 나는 윤사영 씨를 도울 거고. 그리고….”

“흐으….”

“그리고 윤사영 씨의 이번 삶을 내가… 행복하게 만들 겁니다. 반드시.”

그건 차라리 유준 스스로 하는 다짐이나 마찬가지였다.

끊임없이 페로몬을 흘려 대는 오메가를 품에 안고서도 유준이 지금 원하는 건 단 한 가지였다.

유준은 그를 지켜 주고 싶었다. 품 안의 이 사람이 행복하길 바랐다. 이 안타까운 사람의 두 번째 삶이 복수가 아닌 행복으로 끝나길 원했다.

뜬구름 잡듯 명명하는 행복이 아니었다. 유준은 그가 자신으로 인해 행복을 느끼고, 삶에 만족하며, 아마도 다신 할 일이 없을 거라 여겼을 사랑을 되찾길 바랐다.

일방적으로 헌신하고, 이용당하고, 버림받는 걸로 끝나는 게 아니라 온전히 서로를 사랑하고, 의지하며, 다정한 날들을 나누는 그런 사랑을.

유준은 사영이 다른 사람이 아닌 자신과 경험하길 바랐다. 그게 바로 지금 이 순간 유준이 깨달은 사실이었다.

“그러니까 걱정 말아요….”

꼴사납게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어쩌면 내일이면 지금을 기억조차 하지 못할 사람을 두고 혼자 절절하게 고백하면서도 도무지 이 감정을 자조적으로 가볍게 넘길 수가 없었다.

이토록 애틋한 감정은, 소중한 사람은, 무슨 일이 있어도 지켜 주고픈 존재는 여태껏 유준의 삶에 없었다.

윤사영이, 김유준의 처음이었다. 윤사영에게는 두 번째인 이 삶이 지금을 사는 유준에게는 유일한 삶이었다.

아니, 어쩌면 유준에게 또한 지금이 두 번째 기회일 수도 있었다.

사영의 죽음으로 끝난 첫 번째 삶에서 유준은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조언이랍시고 건넨 몇 마디 말이 전부였다.

유준은 처음으로 사영이 죽은 세계에 남겨졌을 자신에 대해 생각했다.

그는 어떤 감정이었을까. 매사 그런 것처럼 나랑 관련 없는 일이라고 느꼈을까. 아니면 일말의 죄책감을 느꼈을까.

혹시 어떤 밤에는, 왜 그때 조금 더 적극적으로 윤사영의 삶에 끼어들지 않았을까 하는 뒤늦은 후회 같은 걸. 그런 걸 하지는 않았을까.

누군가 시간을 되돌려 준다면 알량한 조언 몇 마디를 하는 것보다는 조금 더 나은 일을 할 수 있을 텐데, 하는 그런 생각을 떠올려 보지는 않았을까. 정말로 단 한 번도.

머리로는 말도 안 되는 가정이라고 치부하면서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이 순간이 간신히 얻어 낸 기적 같은 두 번째 기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떨쳐 낼 수가 없었다. 정말로 우습고 한심하게도.

사영을 끌어안은 유준의 팔에 힘이 들어갔다. 복잡한 생각을 이어 가고 있지만 사실 진실이 무엇이든 그건 지금의 유준에게는 그다지 중요한 일이 아니었다.

도저히 의심할 수 없는 명백한 사실 하나는.

결국 김유준이 윤사영을 사랑하게 되어 버렸다는 것. 동정이나 연민 따위의 단어로는 절대로 설명할 수 없던 감정의 정체는 결국 사랑이었다는 것.

그것이 오늘 유준이 얻은 확신의 전부였다.

어둠의 시간이 흘렀다. 유준은 그 밤이 다 가고 사영이 제 품에서 지쳐 잠들 때까지 계속 사영을 안은 채 그를 지켜 주었다.

***

‘그쪽이 어떤 사람인지 솔직히 나는 몰라요. 근데… 한재우한테는 과분한 사람이라는 건 알겠어요. 그런 놈한테 헌신하지 말아요. 결국 윤사영 씨만 후회하게 될 겁니다.’

유준은 그 말을 끝으로 멍한 얼굴을 한 사영을 지나쳐 화장실 밖으로 나왔다.

그가 어떻게 반응하든 자신과는 상관없는 일이라고 여겨 굳이 대답을 기다리지 않은 것인데 막상 밖으로 나오고 보니 영 기분이 찝찝했다.

그러나 이미 여기까지 나온 이상 이제 와 다시 들어가 그를 살필 수는 없었다. 사영이 나올 때까지 기다리는 건 더 이상한 일이었다. 이미 유준은 지나치게 그답지 않은 일을 한 후였다.

솔직히 말해 도대체 유준은 자신이 왜 사영에게 불쑥 그런 말을 꺼낸 건지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었다.

한재우와 윤사영의 부부 사이는 그야말로 유준이 상관할 일이 아니다. 그들의 사생활이었다.

설령 한재우의 태도가 유준을 지극히 거슬리게 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단지 부부라는 이유로 사영에게 책임을 물을 수는 없는 일이 아닌가.

그건 다시 말해 한재우가 제아무리 누군가의 배우자로서 탐탁지 않은 인간이라고 해도 유준이 나서서 사영에게 그걸 충고해야 할 책임은 전혀 없다는 뜻과 같았다.

그런데도 오늘 유준은 사영에게 어쭙잖은 충고를 건넸다. 당신이 한재우에게 과분한 사람이라느니 어쩌느니 하는 얼토당토않은 말까지 덧붙여 가며 말이다.

유준은 고개를 돌려 뒤를 쳐다보았다. 윤사영은 안에서 무얼 하고 있는지, 꽉 닫힌 문은 열릴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충격을 받았을까. 아니면 자존심이 상했을까. 서러울까. 비참할까. 화가 났을까.

짐작할 수 없는 사영의 감정이 어지럽게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가 무슨 감정을 느끼든 그게 무슨 상관이라고. 서글퍼하든, 혼자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든 말든. 그게 뭐 어쨌다고.

유준은 어째서 평소처럼 남의 일이라며 간단히 무시하고 걸음을 옮기지 못하고 있는 걸까.

사영의 감정만큼이나 유준은 지금 자신이 느끼는 감정이 무엇인지 가늠하기가 어려웠다.

남의 말 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사영을 앞에 두고도 수군거리던 게 떠올랐다.

입에서 입으로, 손가락에서 손가락으로 옮겨지는 말들 속에서 윤사영은 그야말로 드라마에서나 나오는 악역의 표본이었다.

윤사영에 대한 안 좋은 말들을 떠올리자마자 반박이라도 하듯 유준의 머릿속에는 조금 전 마주했던 사영의 눈동자가 떠올랐다. 그의 눈동자는 너무나도 지쳐 있었다. 아파 보였다.

마치 그 눈을 통해 사영이 입은 상처 하나하나가 전부 들여다보이기라도 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렇다면 그 눈은 연기일까. 유준 앞에서 자신이 피해자인 양 꾸며 내기라도 한 걸까.

연예계에서 오랫동안 구르며 사람 보는 눈을 닦아 온 유준을 완벽하게 속일 만큼 완벽하게. 정말 그랬나.

‘…….’

정답을 알 수 없는 수많은 물음을 뒤로하고 결국 유준은 다시 고개를 돌려 앞을 보고 멈췄던 걸음을 걸었다.

어차피 어떤 정답이 있든 여전히 유준과는 관계없는 일이었으니 굳이 답을 찾으려 애쓸 필요는 없었다. 유준은 그렇게 자꾸만 멈춰 돌아서려 하는 걸음을 억지로 옮겼다.

그날 이후 유준이 그답지 않게 얼마나 사영을 신경 썼는지, 굳이 얽혀서 좋을 일이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해 얼마나 힘겹게 그 관심을 끊어 냈는지.

그렇게 억지로 관심을 버리고 버리던 끝에 사영의 죽음을 맞닥뜨리게 되었을 때 얼마나 허망했는지,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얼마나 크게 상심했는지.

그리하여 매몰차게 돌아서던 순간을, 일부러 사영에게 무관심하려 애썼던 날들을 얼마나 후회했는지.

그 모든 건 결국 윤사영에게 가까이 닿아 보지도 못하고 끝나 버렸던 김유준만이 아는 사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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