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4
정민의 말은 틀린 게 하나도 없었다. 이번 일만 해도 그렇다. 평소였다면 유준 성격에 사실도 아닌 스캔들이 났을 때 이렇게 미적지근한 태도를 보이진 않았을 거다.
이상하다고 느낀 지는 한참 됐지만 그래도 설마 설마 했는데, 이번에 촬영장에서 벌어진 소동을 보고 정민은 확신했다.
정민은 쓰러진 사영을 끌어안고 살피던 유준의 얼굴에 어린 감정을 알아채지 못할 만큼 유준을 모르지 않았다. 작게 한숨을 내쉰 정민이 유준에게 물었다.
“그래서… 윤사영 씨도 같은 마음이에요?”
“…….”
“헐… 설마 형 혼자?”
방금까지 태연하던 정민의 표정이 그 순간 경악으로 물들었다.
유준이 이렇게까지 대놓고 감정을 내보이는 걸 보면 정식으로 사귀지는 않아도 둘이 이미 서로 마음은 통한 상태거니 했는데 그것조차 아닌 모양이다.
이제 더는 놀랄 일도 없겠구나 싶었는데 아직도 남은 게 있었다.
놀란 정민의 표정을 보며 유준은 어깨를 으쓱했다. 천하의 김유준이 짝사랑이라니 누가 들어도 경악할 만한 일이다.
정민은 여전히 세상에 있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는 표정이었지만 유준은 태연하게 말했다.
“아무튼 윤사영 씨랑 연애하기로 했으니까 그렇게 알고 있어.”
“그건 또 뭔 소리예요? 형 혼자 좋아한다며.”
“그건 그런데… 아무튼 좀 복잡한 사정이 있어. 지금은 그냥 시늉이지만 머지않아 진짜가 될 거니까 뭐, 그냥 진짜라고 생각해도 되고.”
“진짜… 뭔 소린지….”
정민이 좀 더 설명 좀 해 보라는 표정을 지었지만 유준이 할 수 있는 말은 여기까지였다. 아무리 정민이라고 해도 당장 구구절절 모든 걸 다 말해 줄 순 없었다. 그건 유준에게 허락된 몫이 아니었다.
“내 말은… 그러니까 나 좀 도와 달라는 소리야.”
그래서 유준은 할 수 없는 모든 복잡한 말들을 버리고 바라는 바를 간단하게 말했다. 또다시 놀란 표정이 된 정민을 향해 유준이 말을 이었다.
“나도 안 믿기긴 하는데 내가 지금 생각보다 진심이거든.”
“허….”
“그러니까 나 좀 도와줘. 부탁한다.”
살면서 유준이 술 먹고 사고 치는 모습을 보면 봤지 연애니 사랑이니 하는 단어들을 입에 올리게 되는 날이 올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는데. 도대체 윤사영이 무슨 짓을 한 걸까.
도무지 현실 같지 않은 상황에 정민이 결국 얼빠진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도대체 상황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영문을 알 수가 없는 일이었다.
***
“이거 받아요.”
사영은 촬영이 끝나자마자 다짜고짜 제 방으로 찾아온 유준이 건넨 상자를 의아한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그게 뭔지 알아채는 건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유준이 내민 상자는 최신형 휴대폰의 상자였다. 사영은 눈앞의 상자를 받지 않은 채로 물었다.
“이걸 왜….”
“선물이에요.”
“저 휴대폰 있어요.”
“있는 거 알아요. 다 죽어 가는 거 그거.”
유준은 어이가 없다는 듯 대답하며 저만치 침대 옆 협탁에 놓여 있는 사영의 휴대폰을 턱짓으로 가리켰다. 사영이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려 제 휴대폰을 쳐다보았다.
조각조각 금이 간 액정이 멀리서도 보였다. 유준을 처음 만난 날 깨진 액정은 그간 더 심하게 손상이 되어 있었다. 물론 휴대폰의 기본적인 기능을 사용하는 데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유준은 아직도 선물을 받을 기색이 없어 보이는 사영의 손에 억지로 상자를 들려 주고는 그대로 그를 지나쳐 창가의 테이블 앞에 앉으며 종알종알 입을 열었다.
“앞으로 윤사영 씨가 저런 걸 계속 들고 다니면 사람들이 누굴 욕하는 줄 알아요? 나를 욕해.”
“…제 휴대폰인데 왜 유준 씨를 욕해요?”
“돈도 많은 새끼가 자기 애인이 저런 다 망가진 거 들고 다니는데 신경도 안 쓴다고 날 욕한다고. 내 이미지를 그렇게까지 망치고 싶어요?”
협탁 위에 있던 제 휴대폰을 집어 들고 유준 쪽으로 걸어오던 사영이 그 대답에 저도 모르게 가벼운 웃음을 터트렸다. 유준은 미간을 찌푸렸다.
“어, 농담 아닌데? 진짜라니까? 뭐라도 하나 꼬투리를 잡으려고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드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압니까?”
물론 유준은 그깟 말도 안 되는 소리에 신경 쓰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저 사영이 자신의 선물을 거부하지 않고 받아 주었으면 하는 마음에 나오는 대로 지껄이는 말일 뿐이었다.
자연스럽게 유준의 맞은편에 앉은 사영이 상자를 테이블 위에 가만히 올려놓고는 대답했다.
“엄살 부리지 말아요. 그런 사람들보다 유준 씨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훨씬 더 많은 거 알고 있잖아요.”
“어….”
“그리고 유준 씨도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에 신경 안 쓸 거고.”
유준이 그답지 않게 얼빠진 얼굴로 눈을 끔뻑거렸다. 사영의 반박에 말문이 막힌 건 아니었다. 다만 유준은 사영의 입에서 흘러나온 ‘엄살 부리지 말아요’라는 말을 곱씹는 중이었다.
사영이 이렇게 자신에게 편하게 말을 한 적이 있었던가 싶었다. 사영은 항상 유준의 앞에서 큰 빚을 진 사람처럼 행동했다.
어떻게든 유준을 거슬리게 만들지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몸을 맞추며 노력했다. 굴욕적으로 보이기까지 할 만큼 순종적인 태도 때문에 기분이 상한 게 어디 하루 이틀이었느냔 말이다.
그런 사영이 마치 유준을 타박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말했다. 음성엔 웃음기가 어려 있었고 얼굴 역시 미소를 지은 채였다.
유준의 심장이 걷잡을 수 없이 빨리 뛰기 시작했다. 혹시나 이 반응을 들키면 사영이 다시 움츠러들까 봐 진정하려고 애를 쓰는데 몸이 확 더워지는 것까지는 어떻게 막을 수가 없었다.
사영이 제 상태를 알아채지 못하도록 유준은 서둘러 입을 열어 아무렇지 않은 척 대답을 뱉었다.
“뭐, 신경 안 쓰는 건 맞지만… 아무튼 내가 보기 싫어서 그러니까 받아요.”
“…….”
“그러다가 어느 순간 완전히 망가져 버리면 그것대로 또 골치 아플 테니까.”
유준이 계속 말을 덧대는 사이 사영은 깨진 제 휴대폰을 손가락 끝으로 이리저리 만지작거렸다.
무슨 값비싼 반지를 선물한 것도 아니고 이깟 휴대폰 하나에 이렇게까지 간절하게 매달려야 하나 싶어 유준이 입술을 막 삐죽거렸을 때, 어느새 웃음기가 사라진 음성으로 사영이 말했다.
“이 휴대폰이 깨진 게 유준 씨 대신 바이크에 치였던 그 날이었어요.”
그 목소리의 너울을 타고 유준의 기억이 과거로 흘렀다. 한재우의 전남편이 자신을 구한 게 과연 우연으로 벌어질 수 있는 일일까를 의심하던 유준에게 사영은 영 못마땅한 사람이었다.
“액정에 금이 간 채로도 잘만 작동하는 이 기계를 보면서 동병상련을 느꼈던 것 같아요. 죽음에서 되돌아와 살아서 숨 쉬고, 움직이고 있지만 사실은 볼품없이 망가져 있다는 점이요.”
그 말을 하며 사영은 자조적으로 웃었다. 이제 와 돌아보면 지독한 자기 연민이다. 사영은 그때 자신의 죽음에, 배신에, 아팠던 모든 날에 매몰되어 있었다.
“나에게는 이 정도의 삶이 어울린다고 생각해서… 그래서 이걸 계속 바꿀 수가 없었나 봐요.”
그 말을 한 사영의 시선이 망가진 휴대폰에서 유준이 선물로 준 상자로 옮겨 갔다. 그냥 기계일 뿐인데. 이 기계는 결코 삶을 대변해 주는 그 무엇도 될 수가 없는데.
그때는 왜 그런 늪 같은 감상들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을까.
“어느 순간부터는 그런 생각들이 습관이 되고, 당연한 게 되고….”
“…….”
“지금 생각해 보니까 정말로 한심했네요. 유준 씨가 저를 못마땅하게 여긴 것도 당연한 일이죠.”
이어진 말에 유준의 눈동자가 마구 흔들렸다. 사영은 그런 뜻으로 한 말이 아니겠지만 유준은 난데없이 회초리를 맞은 기분이었다.
아마 그 날들이 유준의 마음에 계속 죄책감으로 남아 있던 탓이리라. 유준이 서둘러 입을 열었다.
“그건… 그때는 내가 심했어요. 뭐 대단한 이유가 있어서 그런 게 아닙니다. 그냥 사영 씨가 신경 쓰이고 자꾸만 마음에 걸려서… 내가 윤사영 씨한테 마음을 쓰고 있다는 걸 인정하기 싫어서 유치하게 군 거예요.”
“아….”
“미안해요, 사영 씨. 그러고 보니 제대로 사과한 적이 없었네요.”
“사과를 바라고 한 말이 아니었는데….”
유준의 사과에 사영이 오히려 더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사영은 정말로 유준을 이해한다는 의미로 말을 꺼낸 거지 이제 와 사과받기 위해 비꼰 게 아니었다.
유준은 그런 사영의 마음을 알고 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알아요. 그냥… 내가 해야 할 사과이기 때문에 한 겁니다.”
“…고마워요.”
유준의 말을 잠시 곱씹던 사영은 고맙다고 말했다. 사영에게 잘못했던 그 어떤 사람도 사과하지 않았는데 정작 사영은 깊이 마음에도 두지 않았던 일을 두고 유준은 미안하다고 말했다.
사영은 그 말이 진심이라는 걸 어렵지 않게 알아챌 수 있었다.
“그리고 이건….”
사영의 시선이 다시 유준이 선물한 상자에 닿았다. 새삼 정말로 많은 것이 바뀌었다는 게 실감이 됐다.
사영이 다시 연기를 시작한 것도, 유준과의 관계가 변한 것도 전부 다 큰 변화였지만 그중 가장 도드라진 건 사영이 삶을 대하는 태도였다.
자신을 이미 돌이킬 수 없을 만큼 망가진 사람, 혹은 미련처럼 떠도는 망령이라고 여기며 수동적으로 하루하루를 살아 내던 윤사영은 이제 없었다.
사영은 이런 변화가 자신이 스스로 이뤄 낸 것이 절대 아님을 알았다. 유준을 만나지 않았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여기까지 결코 오지 못했을 테다.
그래서 사영은 유준에게 그냥 그 자리에 머물러 있는 사람으로 보이고 싶지 않았다. 그의 도움이 헛된 것이 아님을 증명하고 싶었다. 더는 혼자 청승 떨며 피해자로 남아 있고 싶지 않았다.
무어라 정의할 수 없는 애매한 감정이었지만 스승에게 인정받고 싶은 제자의 마음과 비슷하다면 비슷하다고 설명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유준이 들었다면 기가 막혀 말문이 막혔겠지만.
어쨌든 그래서 사영은 침묵을 깨고 유준에게 대답했다.
“잘 쓸게요.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해요.”
솔직히 유준은 조금 놀랐다. 깨진 휴대폰에서 동병상련을 느꼈다는 이야기를 할 때 어쩌면 사영이 제 선물을 거절할지도 모르겠다고 예상했던 탓이다.
놀란 감정이 가시자 다음에는 그 자리를 엄청난 뿌듯함이 채워 왔다. 사영이 선물을 받아 준 것은 그 자체로는 별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유준에게는 그게 꼭 사영이 매몰되어 있던 과거의 대신 미래를, 더 정확히 말하자면 자신과 함께할 미래를 선택해 준 것만 같아 괜히 마음이 들떴다.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유난스러운 감정의 변화에 유준은 일부러 장난스럽게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내 번호를 제일 먼저 저장해요.”
유치하기 그지없는 말이었지만 가볍게 웃음을 터트리는 사영의 얼굴을 보았으므로 충분히 가치 있는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