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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수하는 회귀자를 사랑하는 법-129화 (129/193)

#129

하지만 사영은 쉽게 움직이지 않았다. 이토록 늦은 시간에 남의 구질구질한 이야기를 듣고 싶어 하는 이는 없을 것이다.

하물며 유준과 자신 같은 관계에서는 더 말할 것도 없었다. 사영은 더 고민할 것도 없이 그냥 조용히 홀로 침잠하여 견뎌 내기로 결심했다.

분명 그랬는데.

염려 가득한 얼굴로 코앞에서 저를 보고 있는 유준의 시선에 사영의 머릿속이 혼란해졌다. 언제 여기까지 찾아온 걸까.

“죄, 죄송해요….”

당황하자 습관적으로 죄송하다는 말부터 쏟아져 나왔다. 그러나 이어지려는 사과와 돌아가려는 발걸음을 막은 건 여전히 부드럽기만 한 유준의 목소리였다.

“잘 왔어요.”

“…네?”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잘 왔다고요.”

사영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이유도 모르면서. 얼마나 한심하고 멍청한 이유로 제 휴식을 방해한 건지 아무것도 모르면서 유준은 잘 왔다고 말했다. 이유 같은 건 하나 중요하지 않다는 듯.

“왜 왔는지도 모르잖아요.”

사영은 방어적으로 대답했다. 스스로 찾아와 놓고 차라리 유준이 자신을 거부해 주길 바라는 모순적인 감정이 동시에 들었다.

그러나 유준은 사영을 밀어내기는커녕 오히려 거리를 더 가까이 좁히며 속삭이듯 말했다.

“이유가 뭐 중요합니까? 애인을 보러 오겠다는데.”

“…진짜 애인도 아닌데.”

“계약이 지속되는 동안은 애인이지.”

“남들이 보는 곳에서만 하는 거… 아니었어요?”

“그러길 원하면 윤사영 씨는 그렇게 해요. 난 내 맘대로 할 테니까. 내가 원래 좀… 뭐든지 최선을 다하는 사람이라서.”

장난스러운 태도에도 웃음은 나오지 않았다. 단순한 농담이라고 하기엔 유준의 눈동자가 너무나도 무거웠다.

가능성 없는 가정들이 자꾸만 사영의 머릿속을 가득 메웠다. 그럴 리가 없는데. 말도 안 되는 소리인데. 그런데도 유준의 태도가 자꾸만 의심을 키웠다.

괜히 낯선 기분이 들어 유준의 시선을 피한 사영이 이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한재우가 찾아왔어요.”

순간 여전히 사영의 손목을 잡고 있던 유준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사영이 반사적으로 손목을 빼내려는데 으르렁거리는 듯한 유준의 목소리가 들렸다.

“개새끼가 어딜 감히….”

감히. 유준의 입에서 흘러나온 그 단어가 유독 귀에 꽂혔다. 한재우를 이토록 하찮게 대하는 사람이 있다는 게 신기하면서도 든든한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유준은 뒤에 더 욕을 이어 가진 않았다. 한재우가 사영을 찾아갔다는 것도 중요한 일이긴 했지만 지금 유준에게 더 중요한 건 사영이 자신을 찾아왔다는 사실이었다.

사영은 혼란스러워 보였다. 그 자신도 지금 왜 여기에 와 있는 건지 알지 못하는 기색이었다. 유준은 차분하게 이어질 사영의 말을 기다렸다.

“참지 않고 못되게 말했거든요.”

“…그랬어요?”

유준은 솔직히 못되게 말했다는 사영의 말을 믿지 않았다. 그의 기준으로 못된 수준이라고 해 봐야 보지 않아도 뻔했다. 그래도 유준은 비웃지 않고 차분히 그의 말을 들었다.

“우리는 끝났다고. 구질구질하게 굴지 말라고. 그렇게 말을 했는데….”

“네.”

“한재우가 한 방 먹은 표정이었어요. 절절하게 고백하던 내 말을 들은 척도 안 하던 사람이 아무 말도 못 하고 서서 상처라도 받은 것처럼 멍하니 저를 쳐다보는데….”

“…….”

“너무 많은 감정이 교차했어요.”

말을 이어 가는 사영의 목소리는 담담했지만 잡은 손목에서는 미미한 떨림이 느껴졌다.

유준은 아주 조심스럽게, 혹시라도 그가 놀라 말을 멈추지 않도록 섬세하게 손을 움직여 그의 팔을 쓸어 주었다.

사영은 마치 그 손길에 힘을 얻기라도 하는 것처럼 말을 이었다.

“통쾌하기도 하고, 허무하기도 하고, 내 자신이 한심하기도 하고 감정이 복잡해서 이걸… 문득 이 감정들을 누군가에게 말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거기까지 말했을 때 사영은 이리저리 방황하던 시선을 들어 유준을 똑바로 올려다보았다.

유준은 저도 모르게 사영의 팔을 다시 힘주어 잡았다. 지금 무슨 말을 들은 건지 순간적으로 이해가 가질 않았다.

코끝에 흩어지는 사영의 숨결이 불안정하게 흔들렸다. 말을 하는 와중에도 혼란스러워하고 있다는 게 여실히 느껴졌다. 그런데도 사영은 멈추지 않고 계속 말했다.

“유준 씨밖에 생각이 안 났어요. 민폐가 될 거라는 걸 알면서도 유준 씨라면 들어 주지 않을까 싶어서… 굳이 이런 이야기 듣고 싶지 않으실 텐데….”

“그래서 나한테 왔어요? 나밖에 생각이 안 나서?”

분명 사영이 그렇게 말을 하긴 했지만 유준이 정리한 문장은 어딘지 모르게 간질거리는 느낌이 있었다. 그래도 틀린 말은 아니라 사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순간 유준의 입에서 작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동시에 사영은 찬물을 뒤집어쓴 것처럼 화들짝 놀라 유준에게서 한 걸음 물러섰다.

고작 이런 이야기나 하려고 이 시간에 찾아온 건 확실히 어이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사영이 물러선 것보다 더 빠르게, 오히려 한 걸음 다가온 유준은 한숨과는 어울리지 않는 만족스러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잘 왔어요.”

“아….”

“말했잖아요. 내가 애인인데, 나 아니면 누구한테 이런 걸 말하려고?”

“그래도….”

“진짜 애인 아닌 거 나도 알아요. 근데 상관없다니까? 이게 내 방식이고 나한테 부탁했으니 윤사영 씨도 그냥 받아들여야 할 겁니다.”

듣기에 따라서는 유준이 꼭 강요하는 것처럼 들리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사영에게는 이상하게 유준의 말이 강권처럼 들리지 않았다. 오히려 안심이 되기까지 했다.

저도 모르게 마음이 풀어진 사영이 조금 더 제가 느낀 감정을 자세히 말해 보려 입을 연 순간, 커다란 유준의 손이 사영의 뺨을 감싸 왔다.

놀란 사영이 말을 멈추고 입을 다물었다. 유준은 아랑곳하지 않고 사영의 뺨을 엄지손가락으로 조심스럽게 쓸었다.

이것 또한 애인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는 걸까. 모든 계약 연애의 당사자들은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조차 이런 분위기를 유지하는 걸까. 사영으로서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얼어 버린 사영의 얼굴을 가만히 쳐다보던 유준이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내 생각이 나서, 내 생각밖에 안 나서 나도 모르게 찾아왔다고. 그런 얘기를 애인에게 듣고 아무렇지도 않을 남자가 있겠어요?”

“아니, 그건….”

“사실은 나 감동하라고 한 말 같은데. 아니야?”

“그게….”

사영은 아무 말도 꺼낼 수가 없었다. 유준의 태도가 너무나도 명백해서 무슨 말을 하든 결국 제자리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우리는 진짜 연인이 아니잖아요. 사영은 그렇게 항변할 수밖에 없고 유준은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이게 내 방식이라는 말로 받아넘길 거다. 그래서 사영은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사영이 머뭇거리는 사이 유준은 착실하게 몸을 붙여 다른 팔로 사영의 허리를 감싸 안기까지 했다. 그 과정이 너무나도 물 흐르듯 자연스러워 어색함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아니, 사실 그런 것들은 다 핑계다. 사영은 이 행위가, 이 분위기가 이상하다는 걸 알면서도 단지 거부하고 싶지 않은 것뿐이었다.

유준의 말을 억지라고 생각했고, 굳이 사람들이 없는 곳에서까지 이럴 필요가 없다는 것도 알고 있다. 사영이 원한다면 이런 건 불편하다고 얼마든지 선을 그을 수도 있었다.

문제는, 사영이 잘 모르겠다는 핑계를, 그가 나를 도와주니 매몰차게 거부하기 힘들다는 억지 이유를 들어 가면서까지 유준이 이 행위를 이어 가길 바라고 있다는 점이었다.

애매한 죄책감이 심장을 찔렀다. 나는 더 이상 사랑을 믿지 않는다고, 유준에게는 필요하지도 않을 경고를 먼저 한 건 윤사영 자신인데 도대체 무얼 기대하고 이 손길을 받아들이고 있는 걸까.

유준을 찾아오기 전보다 더 어려워진 마음이 이리저리 갈피를 잡지 못하고 흔들렸다.

“또 무슨 얘기를 하고 싶었어요?”

유준은 어떻게든 사영의 마음을 더 무너트리고 싶은 사람처럼 따스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 음성이 어찌나 친밀하게 들리던지, 사영은 홀린 사람처럼 입을 열었다.

“한재우가… 유준 씨를 이용해서 자기한테 복수하려는 거 아니냐고….”

“오….”

“진짜 김유준을 사랑하는 건 아니지 않냐고 물어봤어요.”

여태 애써 태연하고 여유로운 척을 하던 유준도 이때만큼은 숨을 참을 수밖에 없었다.

사실 유준은 사영이 이 시간에 자길 찾아온 이유를 얘기한 순간부터 폭풍의 한가운데에 있는 기분이었다. 다만 애써 잡힌 분위기를 깨트릴 수가 없어 필사적으로 아닌 척을 했을 뿐이다.

하지만 짝사랑하는 상대에게 이런 말을 듣고서까지 평정을 유지할 순 없었다. 사영의 허리를 안은 팔에 힘을 주며 유준이 신음처럼 말을 꺼냈다.

“그래서… 뭐라고 대답했는데?”

“저는….”

“…….”

“저는 어떻게든 한재우를… 불쾌하게 만들고 싶어서… 그래서….”

“응. 그래서.”

“…나는 유준 씨를 사랑한다고.”

유준은 맹세코, 더 느긋하게 기다릴 작정이었다. 사영이 살아온 삶과 지금 처한 상황의 특수성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으니까. 급하게 다가가면 오히려 겁먹고 도망칠 게 뻔했으니까.

최대한 여유를 가지고 천천히 물들게 만들 작정이었다. 정말로 그랬다.

“진심으로 유준 씨를 사랑한다고, 그러니까 우리는 이제 완전히 끝났다고… 그렇게 대답했어요.”

그래서 유준은 이 모든 게 전부 윤사영의 잘못이라고 생각했다. 겁도 없이 이런 말을 잘도 내뱉는 윤사영이 자초한 일이었다.

“진짜 씨발….”

갑자기 흘러나온 유준의 욕설이 어떤 의미를 담고 있는지. 사영에게는 그걸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그 음성에서 느껴지는 열기가 코끝에서 채 사라지기도 전에 유준이 다급히 입을 맞춰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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