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1
솔직히 사영은 자신이 지금 왜 이러는지, 어째서 자꾸만 유준을 도발하듯 행동하는지 알지 못했다. 그런데도 제 행동 하나하나에 반응하는 유준을 볼 때마다 이상하게 마음 한구석에서 만족감이 피어올랐다.
내도록 당당하고 자신만만하기만 하던 사람의 색다른 모습이 흥미로워 그런 걸까. 알 수 없었다.
그사이 지친 얼굴로 한숨을 내쉬며 손바닥으로 제 얼굴을 몇 번 문지른 유준이 다시 입을 열었다.
“나는 내 행동의 이유를 말할 수 있어요. 왜 그랬는지 알고 있으니까.”
“말해 주세요.”
“그런데 윤사영 씨는 아직 내 질문에 대한 대답을 모르잖아요, 스스로.”
반박할 수 없었다. 유준의 말대로였다.
사영은 왜 그의 키스를 받아 줬는지, 받아 주다 못해 적극적으로 즐기기까지 했는지, 왜 페로몬을 맡은 것도 아닌데 그가 주는 자극에 흥분하고, 그의 반응 하나하나에 만족감을 느끼는지. 그 어떤 질문에 대해서도 제대로 된 해답을 가지지 못했다.
유준이 말을 이었다.
“그래서야 공평하지가 못하잖아요. 그러니까 나도 오늘, 대답 안 해 줄 겁니다.”
대답은 제법 냉정한데, 말을 끝내기 무섭게 유준은 손을 들어 제가 헝클어 놓은 사영의 뒷머리를 조심스럽게 정리해 주었다. 섬세하고 다정한 손길이었다.
“그러니까 한번 생각해 봐요. 내가 왜 윤사영 씨한테 발정 난 짐승처럼 달려들었는지.”
그다음엔 유준의 손이 흐트러진 사영의 옷매무새를 만져 주었다.
“아무리 계약 연애를 하기로 했다지만 보는 사람도 없는 곳에서, 딱히 필요도 없는데 왜 그렇게 흥분해 사영 씨를 빨아 댔는지.”
노골적인 표현에 열이 올랐다. 사영은 손을 들어 제 뺨을 문지르고 싶은 충동을 참으며 유준의 시선을 감내했다.
자신을 내려다보는 유준의 눈동자에는 여전히 욕망이 가득해 꼭 그 시선 앞에 발가벗겨진 기분이었다. 놀라운 건 그런데도 수치심이나 모욕감 따위가 전혀 들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발끝이 저릿하고 뱃속이 따끔거렸다. 오히려 사영은 그 시선에 흥분하고 있었다.
“그리고 왜 윤사영 씨는 나를 밀어내지 않고 같이 흥분했는지… 한번 생각해 봐요.”
“…….”
“윤사영 씨 역시 내게 내줄 답이 생기면 그때 나도 말해 줄 테니까.”
말을 마친 유준은 다시 한번 사영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쉽게 가까워지는 거리에 사영은 어깨를 움츠렸지만 유준을 밀어내거나 피하진 않았다.
이런 모습이 사람을 얼마나 미치게 만드는지 정말로 이 남자는 조금도 모르는 걸까.
유준은 한숨을 내쉬고 싶은 걸 간신히 참으며 사영의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추고 떨어졌다. 굳이 이런 간지러운 행위를 더한 건 일종의 힌트였다.
유준은 한번 제 마음에 들어온 사람에게는 아주 관대한 사람이었으니 말이다.
“…이만 가 볼게요.”
결국 사영이 한참 만에 선택한 대답은 일단 이 자리를 피하는 것이었다. 유준은 그 대답에 실망하지 않았다. 이미 지나치게 많은 걸 얻었으니 아쉬울 게 없었다.
고개를 끄덕인 유준이 대답했다.
“조심해서 가요. 마음 같아서는 데려다주고 싶은데… 윤사영 씨 때문에 내가 지금 움직일 수 있는 상황이 아니네요.”
말하며 유준의 시선이 슬쩍 자신의 아래를 가리켰다. 노골적인 메시지였다. 반사적으로 유준을 따라 시선을 내렸던 사영이 ‘아….’ 하고 외마디 탄성을 뱉었다.
저급하다고 유준을 탓할 순 없었다. 키스가 아주 조금만 더 이어졌어도 사영은 제 상황 역시 그와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임을 알았다.
그러나 그런 것까지 유준에게 말해 주고픈 생각은 없는 사영은 그저 담담함을 가장한 목소리로 해야 할 말을 했다.
“늦은 시간에 갑자기 찾아와서 죄송했어요. 그리고….”
“…….”
“들어줘서 고마워요, 유준 씨. 정말 고마워요.”
“…고맙다는 말을 듣고 싶어서 한 건 아닙니다.”
“알아요. 그래도 저는 말하고 싶었어요. 가 볼게요.”
거기까지 말한 사영은 고개를 살짝 숙였다 들고는 그대로 몸을 돌렸다. 더 있다가는 이 밤이 다 가도록 여기서 벗어나고 싶지 않을 것만 같았다.
문으로 향하는 내내 등으로 유준의 뜨거운 시선이 느껴졌다. 여기서 돌아보면, 아니 아주 잠시라도 걸음을 멈추기만 하면 유준이 다가와 다시 자신을 끌어당길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그 장면을 상상하자 저도 모르게 짜릿한 감각에 몸이 떨려서. 사영은 돌아보지도, 멈추지도 않고 꿋꿋이 걸음을 옮겨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대답 기다릴게요.”
문이 닫히기 직전, 유준의 목소리가 들렸다. 사영은 대답하지 않고 그대로 문을 닫았다.
더 이상 유준이 눈앞에 보이지 않는데도 그가 전해 주었던 뜨거운 열기가 끊임없이 사영의 감각을 맴돌았다.
그래서 사영은 방으로 돌아와 한재우의 폭언이 담긴 녹음기를 보면서도 한재우에 대한 생각에 잠기지 않을 수 있었다.
***
“이게 무슨 한심한 꼴이냐….”
유준은 허탈하게 중얼거리며 그대로 침대에 드러누웠다. 사영이 돌아간 후 좀처럼 가라앉을 기미가 없는 흥분을 혼자 풀고 난 후였다.
온몸에 기운이 하나도 없었다. 특정한 누군가에게 이렇게까지 몸이 달아 수음을 한 건 처음이었다. 말 그대로 이렇게 한심한 꼴이 또 없었다.
그러나 말과는 다르게 유준의 얼굴에 자조적인 기색은 딱히 없었다. 아니, 오히려 매우 만족스러워 보였다.
아직까지 뜨겁게 일렁이는 유준의 검은 눈동자에 조금 전 벌어진 일이 몇 번이나 그려졌다. 몸의 열기가 좀처럼 가라앉지 않는 이유이기도 했다.
한참 동안 말없이 유준을 바라보기만 하던 사영이 스스로의 의지로 유준을 다시 끌어당겼을 때, 유준은 진심으로 자신이 꿈을 꾸고 있는 게 아닌지 의심했다.
태어나 처음으로 빠진 사랑의 감정이 너무나도 강렬해서 꿈을 꾸고 있는 거라고 말이다.
하지만 꿈이라기엔 혀끝에 닿아 오는 사영의 살결은 지나치게 적나라했고 또한 자극적이었다. 그간 맛본 그 어떤 것보다 달콤했다. 그 누구와의 입맞춤도 이토록 유준을 흥분시킨 일이 없었다.
그럴 수만 있다면 영원히 놓아주고 싶지 않았다. 여린 입 안을 모조리 제 것으로 만들고 싶었다. 혀로 입천장을 문지를 때마다 제 품에서 떨던 윤사영의 몸을 그대로 찍어 누르지 않은 게 다행이었다.
태어나 그토록 파괴적인 욕구를 느낀 것도, 그토록 필사적으로 제 욕구를 참아 낸 것도 전부 다 처음이었다.
하마터면 짐승 같은 알파에게 살점 하나 남기지 못하고 뜯어먹힐 뻔했다는 걸 과연 윤사영은 알까.
아주 조금만, 정말 아주 조금만 유준이 자제심을 잃었다면 지금쯤 사영은 이 침대에 누워 엉망으로 울고 있었을 것이다.
“윤사영….”
그 이름을 가만히 입에 담아 보았다. 유준으로 하여금 한 번도 뱉어 본 적이 없는 말을 뱉게 하고, 해 본 적이 없는 행동을 하게 하며, 가져 본 적이 없는 감정을 가지게 만드는 남자의 이름을.
그와 동시에 명치 아래가 뻐근해졌다. 사영에 대한 감정을 깨달은 이후 시도 때도 없이 느끼는 감각이었다. 이것저것 한심한 상황은 자꾸만 늘어 가는데 유준의 입가에는 오히려 미소가 어렸다.
“두고 봐….”
고등학생이라도 된 양 유치한 호승심이 들끓었다. 오늘 일로 사영 역시 자신을 다르게 보기 시작할 거라 생각하자 들뜬 마음을 가라앉힐 수가 없었다.
오늘 사영이 도대체 무엇 때문에 그토록 충동적으로 행동했는지. 왜 한재우를 만난 후 제 발로 자신을 찾아왔고 왜 입을 맞추는 자신을 밀어내기는커녕 오히려 호응을 해 준 건지.
그 행동을 전부 사랑으로 해석하기엔 지나치게 이른 판단일 것이다. 하지만 분명한 건 사영 역시 단순히 복수니, 계약이니 하는 단어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을 느끼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사영이 자신을 거부하지 않고 입을 맞춰 온 건 오히려 별게 아니다. 그보다 더 중요한 건 사영이 자신을 만나고 싶어서, 가장 아픈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서 찾아왔다는 사실이었다.
사영이 제 방에서 나와 여기까지 오는 동안 무슨 생각을 했을지, 어떤 욕구를 느꼈을지 상상만 해도 속이 다 울렁거렸다.
시간은 깊어만 가는데 정신은 오히려 또렷하게 깨어났다. 생각을 거듭할수록 심장이 두근거렸다.
왜 날이 밝지 않는지 답답했다. 마음 같아선 당장 사영의 방으로 가 그의 얼굴을 보고 싶었다. 조금씩이지만 분명하게 변하고 있는 사영이 사랑스러워 견딜 수가 없었다.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한 군데도 빠짐없이 입을 맞춰 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가 허락만 해 준다면 어떤 수치스러운 부위라도 기꺼이 핥고 빨아 줄 수 있었다. 정말 그랬다.
사랑에 빠지면 다들 바보 얼간이가 된다더니.
저만큼은 절대로 가질 리가 없을 거라 여겼던 욕구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며 유준은 억지로 눈을 감았다. 맨정신으로는 아침이 올 때까지 사영에게 뛰어가지 않고 참을 자신이 없었다.
***
사영은 평소답지 않게 침대에서 한참을 뭉그적거렸다. 이렇게 잠이 깨지 않는 건 오랜만이었다. 늘 긴장 속에서 살았던 사영은 좀처럼 깊은 잠에 들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물론 이유가 없는 건 아니었다. 사영은 지난밤 한숨도 제대로 잠을 이루지 못했다. 몸에 남은 감각도, 머릿속을 가득 채우는 의문들도 전부 다 사영의 잠을 쫓아내는 원흉이었다.
하지만 사영은 그게 전부가 아님을 알았다. 머릿속이 복잡했던 건 지난날들도 다르지 않았다. 밤새 뒤척이다가 해가 뜨고 나서야 겨우 선잠이 든 날에도 잠에 취해 일어나지 못하는 일은 없었다.
알지도 못하는 사이 변화는 삶의 구석구석에 자리 잡았다. 평범한 인간처럼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하면 피곤하고, 밥을 먹지 않으면 배가 고픈 일상이 이제야 사영에게도 찾아온 것이다.
그 감각이 생경해 사영은 보드라운 이불 속에서 발가락을 꼼지락거리며 한참 동안 피곤한 아침의 여운을 즐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