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복수하는 회귀자를 사랑하는 법-132화 (132/193)

#132

지난밤을 가득 채운 상념 중 대부분이 유준과 관련되어 있었다는 점도 특별했다. 평소였다면 사영의 밤을 괴롭게 만드는 건 갑자기 찾아와 이해할 수 없는 말을 잔뜩 늘어놓은 한재우였을 것이다.

이제 와 두려움을 느끼기라도 하는 것처럼 김유준을 정말로 사랑하냐고 묻는 한재우의 모습은 사영의 밤을 어지럽히기에 충분하다 못해 과했다.

그런데도 사영은 줄곧 김유준을 떠올렸다. 정말 사랑에 빠진 사람이 된 것처럼 떨리는 눈동자로 자신을 보고, 심장을 두근거리며, 끝끝내 진득하게 제게 입을 맞춰 온 김유준을 말이다.

‘왜일 것 같아?’

제 눈을 똑바로 마주 보고 묻던 유준의 목소리가 다시금 귓가에 어른거렸다. 사영의 마음을 떠보듯 굴던 태도는 내도록 사영의 마음속에 모래알처럼 불편한 감각으로 남아 있었다.

사영은 일찍이 유준에게 나는 사랑을 믿지 않는다고 경고한 바가 있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노파심에서 한 말이었을 뿐 정말로 유준이 자신을 사랑할 거란 생각은 조금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지난밤을 겪고 나니 사영은 다시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김유준은 정말로 윤사영을 사랑하지 않는가. 정말로 그의 모든 행동은. 필요 이상으로 사영을 염려하고, 사영의 일에 관여하고, 그것도 모자라 계약 연애를 제안한 그 모든 것들은.

명백하게 흥분한 얼굴로 사영과 입술을 겹치고 숨을 헐떡이며 더 깊이 파고들지 못해 안달하던 그 행위들은.

정말로 사랑이란 감정과는 전혀 상관없는 동정이고, 연민이며, 오메가를 탐하는 알파로서의 본능에 불과할까. 정말 그럴까.

생각을 거듭할수록 점점 더 깊어지는 사영의 상념을 깨운 건 휴대폰 벨 소리였다. 놀란 사영이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며 휴대폰을 찾았다.

새 휴대폰의 말끔한 화면 위에 ‘이우종 매니저’라는 글자가 떠 있었다.

사영은 저장된 우종의 이름을 얼른 바꿔 놓아야겠다고 생각하며 전화를 받았다. 저렇게 정 없이 저장된 걸 발견한다면 우종은 분명 서운하게 여길 것이다.

- 형, 일어나셨어요?

“응, 우종아. 일어났어.”

상상이지만 왠지 우종이 귀엽게 느껴진 사영이 옅은 미소와 함께 대답했다. 너머에서 우종이 곧바로 말을 더했다.

- 그럼 저 방으로 갈게요!

“응.”

사영은 간단히 대답하고 전화를 끊었다. 편하게 드나들라고 여분의 키를 주었는데 혹시라도 아직 사영이 불편해하진 않을까 걱정을 하는 모양이다.

우종이 오면 앞으로 편하게 와도 괜찮다고 말해 줘야지, 하고 생각하고 있는데 노크 소리가 들렸다.

순간 사영의 몸이 굳었다. 혹시 유준이 온 건 아닌가 싶어서였다. 사영은 아직 유준을 어떻게 보아야 할지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았다.

“형, 저 왔어요.”

“아, 우종이구나.”

다행히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들어온 건 우종이었다. 긴장으로 굳어져 있던 사영의 표정이 그제야 부드럽게 풀렸다.

전화를 끊은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바로 온 걸 보니 문 앞에서 전화한 모양이었다. 그 섬세한 배려에 마음이 금세 따뜻해졌다. 사영은 이불을 걷고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며 편안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런데 왜 이렇게 일찍 왔어? 아직 시간 많이 남았는데 좀 더 쉬지….”

오늘 사영은 모처럼 오후 촬영이 있는 날이었다. 이렇게까지 일찍 올 필요는 없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사영은 우종이 단순히 성격대로 부지런하게 움직인 거라고만 생각했다.

“아, 그게….”

그런데 우종의 반응이 좀 이상했다. 무언가 할 말이 있어 보이는 태도인데 그 얼굴이 딱히 어두워 보이진 않고 오히려 어딘지 모르게 설레는 것처럼 보였다.

사영은 의아한 얼굴로 이어질 우종의 말을 기다렸다. 그러자 우종이 품에서 휴대폰을 꺼내 사영에게 내밀며 말했다.

“혹시 이거… 보셨어요?”

“이게 뭔데?”

사영은 고개를 기울여 우종이 내민 휴대폰 화면을 쳐다보았다. 지난번처럼 자신에게 호의적인 반응을 모아서 보여 주나 싶었는데 이전 것과는 달랐다.

그게 뭔지 알아보기 위해 사영이 미간을 찌푸리며 집중하는 사이, 들뜬 우종이 조금 높아진 톤으로 말을 이었다.

“여기… 형 팬카페에요!”

“…응?”

“어젯밤에 검색하다 보니까 형 팬카페가 생겼더라고요! 모르셨죠?”

“어? 어… 어, 나는….”

사영은 말을 더듬었다. 분명 우종의 말을 듣긴 들었는데 무슨 뜻인지 이해가 되질 않았다. 사영은 우종의 손에서 휴대폰을 아예 빼앗아 들고는 조금 더 집중해 화면을 살펴보았다.

예쁘게 꾸며 놓은 메인 화면의 소개란에는 분명 [배우 윤사영 팬카페]라는 문구가 적혀 있었다.

“이게 왜… 왜….”

그걸 보고서도 사영은 계속 말을 더듬었다. 짧은 시간 동안에도 사영은 몇 번이나 소개에 적힌 문구를 읽고 또 읽었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사영이 활동하던 시기에는 당연히 팬카페가 있었다. 사영이 급작스러운 결혼과 함께 작품 활동을 멈추었을 때 꾸준히 그 자리에서 사영을 응원하고 기다려 주던 팬들도 분명 있었다.

그러나 공백 기간이 길어질수록 활동하는 이들은 점점 그 수가 줄어 갔다. 한재우와 관련된 루머가 계속되고 이미 은퇴한 거나 다름없다는 소문이 이어졌다.

간간이 한재우와 함께 모습을 드러내던 사영은 어느 날부터 완전히 방송에서 자취를 감췄고, 종국엔 윤사영을 좋아한다는 것만으로도 손가락질받을 만큼 여론이 안 좋아졌다.

팬들이 지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공식 팬카페 운영자가 말없이 카페를 닫아 버리는 사건이 발생했다.

그때는 이미 회사와의 계약도 끝나서 거기까지 신꼉 쓰는 사람도 달리 없었다.

그나마 팬카페에 모여 서로를 의지하던 팬들은 뿔뿔이 흩어졌고 다시 팬카페가 만들어지는 일은 생기지 않았다. 그렇게 끝난 일이었다.

그런데 이제 와 팬카페가 다시 생기다니. 사영은 이 상황을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다.

“혹시 대표님이 하신 거야, 이거? 아니면 우종이 너… 네가 했어?”

급기야 사영은 우종을 보며 그렇게 묻기까지 했다. 우종은 서둘러 고개를 마구 저었다.

“저 아니에요! 대표님도 아니죠, 당연히! 형 팬들이 만든 거예요. 제가 어제 먼저 가입했거든요? 벌써 가입해서 글 남기는 분들도 꽤 많아요!”

덩달아 흥분해 말을 쏟아 내는 우종의 얼굴에는 환한 미소가 가득했다.

우종은 이 사실을 빨리 알려 주고 싶어 평소보다 일찍 사영을 찾았다. 제 팬카페도 아닌데 올라오는 글을 보며 가슴이 설레 잠을 다 설친 우종이었다.

“나 이것 좀 계속 봐도 돼?”

우종의 휴대폰을 두 손으로 꼭 쥔 채 사영이 물었다. 얼마나 세게 쥐고 있는지 손마디가 하얗게 질려 있었다. 우종은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네, 당연하죠. 형 휴대폰 주시면 제가 로그인해 놓을게요. 우선 제 걸로 보고 계세요.”

사영은 서둘러 제 휴대폰을 우종에게 넘기고 본격적으로 카페에 남겨진 글들을 보기 시작했다.

카페는 만들어진 지 이틀 정도밖에 되지 않은 것 같았다. 그런데도 벌써 꽤 많은 사람들이 가입해 활동하고 있었다.

어떤 이들은 그간 조용히 사영을 기다려 오던 날들의 외로움을 토로했고, 어떤 이들은 이제라도 사영이 복귀해 줘서 너무 고맙다고 울었다.

영화 <하지>와 서단우 캐릭터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는 이들의 글에서는 감출 수 없는 설렘과 행복이 느껴졌다.

<하지>를 찍으면서 공개된 사진들, 짧은 인터뷰들, 공개된 공식 영상들이 정성스럽게 정리되어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라 사영의 과거 작품에 대한 자료들도 있고 그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들도 존재했다. 그야말로 별천지를 구경하는 기분이었다.

액정을 문지르고 누르길 반복하는 사영의 손끝이 안쓰러울 정도로 떨려 왔다. 좋고, 미안하고, 설레고, 안쓰러운 마음들이 한데 엉켜 사영의 마음을 복잡하게 만들었다.

영화가 개봉하고 나면 분명 자신을 다시 사랑해 주는 사람들이 많이 생길 거라는 말을 사영은 그간 여러 번 들어왔다.

유준과 우종이 그랬고, 촬영이 진행되면 진행될수록 같은 말을 하는 사람들이 늘어 갔다.

하지만 사영에게 그건 여전히 과분한 꿈이었다. 이미 자신을 사랑해 준 사람들을 배신하고 실망을 안겨 주었다. 한 번만 더 자신을 믿고 사랑해 달라는 뻔뻔한 말 같은 건 차마 할 수 없었다.

그런데 벌써. 아직 영화가 개봉하지도 않았는데 이렇게 자신을 용서해 주고 다시 사랑해 주는 사람들이 있다니.

사영은 입을 다물고 입술을 꾹 깨물었다. 눈앞의 글씨가 자꾸만 흐려졌다. 제게는 울 자격조차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울컥 치밀어 오르는 감정을 쉽게 다스릴 수가 없었다.

“형….”

사영의 감정을 눈치챘는지 우종이 다소 가라앉은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사영은 대답하지 않고 한참 동안 두 손으로 휴대폰을 꼭 쥔 채 숨을 골랐다.

지금 사영이 어떤 감정을 느끼고 있을지 감히 짐작할 수 없는 우종은 조용히 그를 기다려 주었다. 한참 만에, 물기 어린 목소리로 사영이 말했다.

“나 혹시… 여기에 내가 직접 글 남겨도 될까?”

“당연하죠. 그런데 지금 당장은 좀 그렇고 우선은 제가 운영자한테 연락 좀 해 볼게요. 조금만 기다려 주실래요?”

“응. 그럴게. 고마워.”

마음 같아선 당장 고맙다고 영상이라도 찍어 올리고 싶었지만 사영은 얌전히 대답했다. 이제는 회사에 소속된 이상 혼자 마음대로 행동할 순 없는 일이었다.

“여기 형 휴대폰으로 로그인해 두었으니까 편안하게 보세요. 식사는 방에서 하실 거죠?”

“응.”

사영은 돌려받은 휴대폰에 다시 집중하며 습관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식사 같은 건 안중에도 없는 모습이었다.

우종은 그 모습에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뿌듯한 기분이 되었다. 아침부터 서두른 보람이 있었다.

촬영은 이제 막바지였다. 머지않아 대중은 윤사영의 복귀작을 보게 될 것이다.

아직 제대로 된 콘텐츠 하나 공개되지 않은 상태에서도 이 정도로 반응이 오는데 영화가 개봉하고 나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윤사영과 사랑에 빠지게 될까.

요즘 우종은 그걸 생각하면 밥을 먹지 않아도 배가 부른 기분이었다.

휴대폰으로 들어가기라도 할 기세로 집중한 사영 옆에서 우종은 콧노래를 부르며 사영의 아침 식사를 골랐다. 여유로운 아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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