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4
“안녕하세요.”
그때, 저만치에서 너무나도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언제나 한재우에게 곱고 상냥하고 따스하기만 했던. 그러나 언제인가부터는 늘 주눅 들고 울먹이고 겁을 먹던 윤사영의 목소리였다.
재우는 눈을 뜨고 고개를 돌려 목소리의 근원지를 바라보았다. 처음 봤던 그 순간처럼 반짝반짝 빛이 나는 윤사영이 주변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며 다가오고 있었다.
한재우의 앞에서 혹시나 그의 기분을 상하게 할까 봐 전전긍긍 눈치나 보던 윤사영은 거기에 없었다.
스태프와 조연 배우들과 자연스럽게 인사를 나누고 안부를 묻는 사영은 지극히 여유로워 보였다.
그를 보는 사람들의 시선은 또 어떠한가. 언제 윤사영을 꺼림칙하게 여겼냐는 듯 그 자리에 있는 이들은 저마다 호의를 가득 담은 눈빛으로 사영을 대했다.
과거로 되돌아간 것만 같았다. 무력하고 비참한 무명이었던 그 시절로, 윤사영을 그저 올려다보아야만 했던 그 순간으로 말이다.
하지만 지금 재우를 고통스럽게 만드는 건 놀랍게도 사영이 다시 사랑받는다는 게 아니었다. 재우는 지금, 더 이상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윤사영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재우 씨, 안녕하세요.”
그사이 재우의 앞까지 다가온 사영이 자연스럽게 인사를 해 왔다. 재우와 있었던 일들은 전부 털어 낸 것처럼 가벼운 말투였다.
‘유준 씨를 사랑해요.’
그 목소리가 이명처럼 귓가에 맴돌았다. 이상했다. 이해할 수가 없었다. 애초에 사영에게 준 진심 따위는 없었는데. 그를 먼저 버린 건 자신인데.
왜 이제 와 그가 다른 사람을 사랑한다고 하는 말이 실연이라도 당한 것처럼 아프게 가슴을 찔러 오는 걸까.
왜. 가장 소중한 걸 전부 잃기라도 한 것처럼 고통스러운 걸까.
“오늘도 잘해 봐요, 우리.”
사영은 참으로 어여쁘게도 웃으며 말했다. 전과 달라진 건 그 미소가 철저히 같은 작품에 출연하는 동료 배우를 향하는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는 점이었다.
차라리 미워라도 하지. 증오하는 시선이라도 줄 것이지.
이제 정말 자신의 인생에 한재우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선포하는 것만 같은 상냥한 표정이 재우의 심장을 날카롭게 갈랐다.
“…그래.”
결국 한재우는 멍한 얼굴로 대답하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
“네가… 네가 어떻게 나한테 이래!!”
무성은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소리쳤다. 우악스러운 힘에 목을 졸리고 있는 건 서단우였지만 더 고통스러운 얼굴을 한 사람은 강무성이었다.
서단우는 그 곱고 순한 얼굴과는 어울리지 않는 비웃음을 띠며 말했다.
“사실은… 알고… 크흑… 알고 계시지 않으셨습니까….”
“…….”
“제가 단 한 순간도… 마마를 연모한 적이 없… 흑…!”
단우의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무성이 그의 목을 틀어쥔 손에 힘을 준 탓이다. 그러나 입 밖으로 뱉지 못하는 말이라고 하여 그 뜻마저 전해지지 않는다는 법은 없었다.
실핏줄이 다 터진 눈으로 단우를 노려보던 무성이 그의 어깨에 박아 넣은 칼을 뒤틀었다.
“아악…!!”
끔찍한 고통에 짧은 비명을 지른 단우가 곧 입술을 깨물며 신음을 참았다. 그 모습이 신음조차도 무성에게는 허락하지 않겠다는 매정함처럼 느껴졌다.
이에 짓이겨진 연약한 입술에서는 금방 피가 배어 나왔다. 그러나 단우는 오히려 더 단호한 표정으로 무성을 향해 말을 씹어뱉었다.
“연심도… 충심도… 제 모든 것은 처음부터 지금까지 단 한 분의 주군만을 모시고 있었으니….”
“이… 이…!”
“이제 그만 저를 죽이시지요.”
마지막 말은 심지어 고통에 떨고 있지도 않았다. 단우는 바라던 바를 전부 다 이루었다는 듯 홀가분한 표정으로 눈을 감았다.
단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세자 저하의 고운 얼굴을 마지막으로 눈에 담을 기회가 없다는 것뿐. 대계의 성공이 눈앞에 있는 지금 죽음 따위는 조금도 두렵지 않았다.
세자 저하. 저의 하나뿐인 주군이자 정인이시여. 부디 모자란 사람의 죽음은 짧게 그리워하시고 성군이 되시옵소서.
단우는 눈을 감은 채로 언제나 제게 봄볕처럼 따스하게 웃어 주시던 주군의 얼굴을 그렸다.
그러나 죽음마저 초월한 단우의 얼굴을 보는 무성은 움직일 수 없었다.
이대로 그의 심장에 칼을 꽂아 넣든, 가느다란 목을 분질러 버리든 자신을 배신한 서단우의 목숨을 빼앗는 건 너무나도 쉽고 간단한 일이건만 이토록 분노한 와중에도 차마 그럴 수가 없었다.
눈앞에 있는 사내의 마음이 정녕 제게 있지 않음을 알면서도, 어찌하여 이토록 질긴 감정은 끊어지지가 않는 건지.
무성은 입술을 깨물었다. 아니, 참담한 심정으로 입술을 깨문 건 한재우였다.
한 번도 그대를 연모한 적이 없다 말하는 단우의 얼굴에서, 그 목소리에서 재우는 유준을 사랑한다고 말하던 순간의 윤사영을 떠올렸다.
제 사랑에 매달리던 건 오히려 윤사영이었는데. 단 한 순간도 상대를 사랑한 적이 없는 사람은 사영이 아닌 자신인데. 어째서 재우는 강무성이 느끼는 고통을 제 것인 양 느끼는 걸까.
강무성이 말했다.
“나는 너를 죽이지 않을 것이다. 이대로 너를 죽이면 너는 기꺼이 혼령이 되어 강무준 곁으로 떠나겠지. 내가 그걸 놓아둘 성싶으냐!”
여기서 한재우가 한 발자국만 물러나면. 원래 원치도 않았던 윤사영의 마음 따위 누구에게 가든 무슨 상관이냐고 넘겨 버리면 질긴 악연은 마침내 끝이 난다.
이혼한 부부들이 으레 그러하듯 재우와 사영은 이제 각자의 자리에서 각자의 삶을 살아가게 될 것이다.
“네 다리를 부러트려 아무도 알지 못하는 곳에 가두겠다. 남은 생에 네가 볼 수 있는 건 오로지 나 하나뿐일 테니, 내가 만일 강무준의 손에 죽는다면 너는 홀로 그곳에서 아무도 알지 못하는 비참한 죽음을 맞이하게 될 것이야.”
문제는, 한재우의 마음이 그걸 원치 않는다는 점이었다. 강무성의 대사를 이 악물고 뱉어 내며 재우는 본능적으로 외면해 온 자신의 마음을 깨달았다.
“나는 절대로… 너를 놓아주지 않아, 서단우.”
한재우는, 윤사영의 사랑을 되돌리고 싶었다. 우습게도.
***
한재우는 피곤한 얼굴로 빈집에 들어왔다. 적막한 거실의 공기는 마치 사람이 아주 오랫동안 살지 않았던 것처럼 차가웠다.
재우는 낮게 가라앉은 눈동자로 텅 빈 거실을 훑어보았다. 시선의 끝이 소파에 닿는 순간, 재우는 반가운 얼굴로 그 자리에서 일어나 자신에게 다가오는 이의 환영을 보았다.
‘재우 씨, 왔어요? 오늘도 고생했어요. 피곤하죠. 밥은 먹었어요?’
이름도 지겨운, 윤사영의 망령이었다.
제대로 대답해 주는 법이 없어도 그는 늘 지극한 환대로 재우를 대했다. 늘 진심으로 재우를 걱정하고, 행운을 빌었다.
재우의 오래된 폭력으로 언젠가부터는 전처럼 반짝이지 못하고 늘 주눅 들어 눈치를 봤지만 그 와중에도 언제나 자기 자신보다 재우를 먼저 생각했다.
재우는 작게 한숨을 내쉬고 무거운 걸음을 옮겨 가장 구석진 곳에 있는 방으로 향했다. 문을 열자 채 사라지지 않은 녹음의 향이 코끝을 스쳤다.
‘재우 씨, 제발… 천, 천천히….’
침대에서는 울먹임에 가까운 윤사영의 목소리가 들렸다. 흥분과 쾌감이라고는 조금도 느낄 수 없던, 오로지 두려움과 굴종만이 스민 목소리를 하고서도 재우를 거부하지 못하던 애처로운 몸짓이 고스란히 떠올랐다.
그럴 때마다 재우는 사영을 안아서 달래 주긴커녕 오히려 더 강압적으로 그를 찍어 눌렀다. 보란 듯이 더 폭력적으로 굴었다. 사영은 어느 순간부터 재우에게 비는 것조차 하지 않았다.
재우는 홀린 사람처럼 걸어 사영의 침대에 걸터앉았다. 마지막으로 재우가 이 방에 들어온 건 술에 취한 채 들어와 잠든 사영을 깨워 엎어 놓고 반강제로 안았던 날이었다.
웬만한 일에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게 되었던 사영은 그날 아주 오랜만에 울었다. 차마 훌쩍이지도 못하고 입술을 깨물며 눈물만 흘리는 사영의 엉망이 된 몸을 만족스럽게 감상했던 기억이 났다.
이 넓은 집의 어디에도 윤사영이 행복했던 기억은 남아 있지 않았다.
“마지막까지 진짜 마음에 안 들게….”
재우는 앉은 채로 허리를 굽히며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장례를 치르는 동안 가짜 울음을 너무 많이 연기해서일까, 아니면 오늘까지도 배우자를 잃은 불쌍하고도 처연한 남자의 모습을 너무 열심히 꾸며 내서일까. 이상하게 그 감정이 다 떨어지지 않은 기분이었다.
오늘은 윤사영이 죽은 지 49일째 되는 날이었다.
깜깜해진 시야로 자꾸만 사영의 얼굴이 떠올랐다. 처음 그를 만났을 때 보았던 찬란한 모습부터 자신의 곁에서 점점 말라 가던 모습까지. 모든 날들이 빠짐없이 재우의 기억 속에 있었다.
홀가분해야 하는데. 홀가분한 줄 알았는데. 더 신경 쓸 필요도 없이 죽어 버린, 이제는 제가 어떤 말을 해도 반박조차 돌아오지 않는 이 상황이 오히려 반갑고 좋아야만 하는데.
어째서 재우는 이 집으로 돌아올 때마다 이렇게 찝찝하고 짜증스러운 기분을, 적막함을, 쓸쓸함이나 그리움과 닮아 있는 감정 따위를 느끼고 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죽음이란 게 본디 이런 걸까. 너무나도 강렬한 일이라 생각지도 않은 방식으로 남은 사람의 마음에 깊은 흔적을 남기는 걸까.
그래서 윤사영 따위의 죽음에도 이제 와 지난날을 자꾸만 곱씹어 보게 될 정도로.
죽음이 가진 무게라는 게 원래 그런 걸까.
그게 아니면 도대체 왜 재우는 어울리지도 않게 사영의 방까지 찾아와 이토록 비통한 감정에 잠겨 있는 걸까.
숨소리조차 내지 못하고 눈물만 뚝뚝 흘려 대던 사영의 얼굴이 다시 떠올랐다.
만약 그가 이렇게 갑자기 죽어 버릴 줄 미리 알았다면. 이렇게 허무하게 제 눈앞에서 완전히 사라질 줄 알았다면.
그랬다면 지난날이 어떤 식으로든 달라질 수 있었을까.
무의미한 수많은 가정 속에 불면의 밤들이 흘렀다. 그날들 속에 한재우가 얼마나 외로워했는지, 고독했는지, 그리하여 끝끝내 어떠한 후회를 마음속에 담았는지.
윤사영의 죽음을 겪지 못한 한재우는 영영 알 길이 없었고 그는 영영 두 번째 기회 같은 건 얻을 수가 없었다. 얻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