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5
“인터뷰요…?”
볼이 볼록해지도록 입 안 가득 물고 오물거리던 햄버거를 꿀떡 삼킨 사영이 조금 놀란 얼굴로 물었다. 콜라를 입에 물고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유준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네. 연예 프로그램인데… 명목상으로는 영화 홍보 인터뷰라고 하는데 사실은 그냥 우리 둘 연애 이야기 듣고 싶은 거겠죠.”
“아….”
“그래도 나는 뭐, 괜찮을 것 같은데 윤사영 씨는 어때요?”
포장이 반쯤 벗겨진 햄버거를 양손으로 쥔 채 사영은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인터뷰 자체는 피할 이유가 없긴 했으나 이렇게 본격적으로 연예 프로그램과 인터뷰를 한 게 너무 오랜만이라 긴장이 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정작 먼저 말을 꺼낸 유준은 딴생각 중이었다. 인터뷰야 어느 쪽으로 생각해도 이득이니 결국 사영도 수락할 것이다. 만약 사영이 아직 준비가 안 됐다고 한다면 안 하면 그만이었다.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인 인터뷰보다 지금 유준에게 더 중요한 건 햄버거를 먹는 사영이었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좀처럼 먹는 것에 관심이 없던 사영은 요즘 부쩍 먹고 싶은 음식이 많아졌다.
오늘만 해도 같이 식사를 하자고 찾아온 유준에게 사영은 유명 패스트푸드 체인의 햄버거가 먹고 싶다고 먼저 말을 해 왔다.
그간 밥을 같이 먹을 때마다 메뉴와 식당을 정하는 건 유준의 몫이었다.
사영은 마치 먹을 것에 대한 개인적인 호오나 욕구가 하나도 없는 사람처럼 늘 수동적으로 유준의 제안에 무조건 좋다고만 말했다.
그랬던 사영이 최근에 와서는 가끔이지만 먹고 싶은 걸 먼저 말하곤 했다. 우종에게 따로 물어보니 원래 사영은 우종이 챙기지 않으면 끼니조차 그냥 넘어가는 사람이라고 했다.
“맛있어요?”
생각에 잠긴 얼굴을 하고서도 입을 벌려 햄버거를 가득 무는 사영에게 유준이 물었다. 인터뷰와는 전혀 상관없는 질문이었지만 사영이 귀엽고 사랑스러워 묻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었다.
그게 뭐 중요한 질문이나 된다고 사영은 고개까지 끄덕여 가며 대답했다.
“네. 원래 햄버거 같은 거 잘 안 먹었는데… 오늘따라 생각이 나서….”
“먹고 싶으면 먹어야지.”
“유준 씨도 얼른 드세요.”
문득 저만 열심히 먹고 있단 생각이 들었는지 사영이 가운데 놓인 감자튀김을 슬쩍 유준에게 밀어 주며 말했다.
“나도 잘 먹고 있어요.”
유준은 혹시나 사영이 괜히 눈치를 보며 먹는 속도를 늦추기라도 할까 내려놓았던 햄버거를 서둘러 다시 손에 들었다.
사실 유준은 햄버거를 좋아하지 않았다. 특히나 이런 프랜차이즈 패스트푸드 햄버거는 제 돈 주고 사 먹는 일은 거의 없었다.
하지만 사영이 햄버거를 먹고 싶다고 한 순간 유준은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사영을 데리고 근처의 패스트푸드 가게로 달려왔다.
사영은 굳이 사람들 눈에 띄어 가며 가게에서 먹지 않아도 된다고 했지만 유준은 그래서 오히려 더 가게에서 먹어야 한다고 고집을 부렸다.
둘이 소박하게 데이트하는 모습을 보이는 게 사영의 이미지 쇄신에 도움이 될 거라는 핑계를 댔지만 유준은 그냥 사영에게 금방 나온, 조금이라도 더 맛있는 음식을 먹여 주고 싶었다. 그뿐이었다.
부지런히 입을 움직이는 사영을 보자 절로 배가 부르고 기분이 좋아졌다.
팬들이 자신을 두고 늑대니 강아지니 하는 동물에 비유할 때는 왜 사람을 동물로 표현하며 좋아할까 신기한 기분이었는데 눈앞의 사영을 보니 그게 어떤 심정인지 알 것도 같았다.
유준은 볼을 부풀리며 열심히 음식을 먹는 사영이 다람쥐 같다고 생각하며 흐뭇해하는 중이었다.
“전에는….”
사영이 다소 무거워진 목소리로 말을 꺼낸 건 그 순간이었다. 다리를 꼰 채 비스듬하게 앉아 사영을 감상하던 유준이 그 무게에 저도 모르게 자세를 고쳐 앉았다.
시선을 살짝 내린 채로 사영은 말했다.
“음식 맛을 잘 못 느꼈어요.”
사영의 그 한마디가 말랑말랑하게 풀어져 있던 유준의 심장에 비수가 되어 꽂혔다. 그 찰나에 유준이 얼마나 끔찍한 통증을 느꼈는지 짐작도 하지 못한 채 사영은 말을 이었다.
“아무리 비싸고 맛있다는 음식을 먹어도 그랬어요. 맛이 있다, 없다 이런 게 아니라 그냥… 그냥 정말 아무런 맛이 느껴지질 않아서… 점점 먹는 걸 별로 즐기지 않게 되었던 것 같아요.”
“…….”
“그런데 요즘은 음식 맛이 느껴져요. 무언가 먹고 싶은 게 떠오르기도 하고… 이런 기분이 너무 오랜만이라 너무 신기한데….”
영화 촬영을 시작할 때까지만 해도 사영은 죽지 않기 위해 의무감으로 식사를 챙겼다. 우종이 매니저가 된 후에는 그가 챙겨 주는 정성을 무시할 수가 없어 억지로 입에 밀어 넣곤 했다.
그래서 사영은 지금 느끼는 모든 감각이 신기했다. 입 안에서 느껴지는 달고 짠 맛이 낯설면서도 반갑기까지 했다. 비로소 정말로 ‘사는’ 기분이었다.
“이렇게 변하기까지 유준 씨 도움을 정말 많이 받은 것 같아요. 새삼스러운 말이지만 고마워요.”
“하….”
거기까지 들은 유준은 저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푹 숙였다. 그의 입에서는 ‘미치겠네’, ‘진짜’ 등등의 말이 끊임없이 쏟아져 나왔다.
유준은 당장 사영을 데리고 나가 이깟 햄버거가 아니라 진수성찬이 차려진 식탁 앞에 앉혀 놓고 싶은 충동을 참느라 안간힘을 쓰는 중이었다.
아니, 그 정도가 아니다. 생전 요리에 관심을 두지 않고 살아온 유준이었건만 당장 사영에게 제 손으로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 주고 싶었다.
동시에 한편으로는 인간으로서의 가장 기본적인 욕구마저도 잃어버릴 정도로 망가졌던 그의 삶이 애달프고 안쓰러워 견딜 수가 없었다.
세상의 모든 산해진미를 맛보게 해 줘야지.
새삼스러운 열의가 타올랐다. 음식뿐만이 아니라 모든 삶의 기쁨을, 그가 응당 가졌어야 할 위치를, 한재우 같은 새끼 때문에 사영이 잃어버린 모든 것들을 되찾게 해 주고야 말 것이다.
“인터뷰는….”
그사이 잠시 가라앉았던 기분을 털어 낸 사영이 다시 입을 열었다. 유준이 얼마나 강렬한 열망에 타오르는지 짐작도 하지 못한 얼굴이다.
“좋아요. 해도 될 것 같아요.”
잠시 망설이는 것 같더니 거부하지 않고 제안을 받아들이는 사영의 모습에 유준이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잘 생각했어요. 그러려면 좀 더 구체적인 연애 스토리를 좀 만들어야겠네요.”
“연애 스토리요?”
“과한 질문은 넘긴다고 하더라도 어떻게 연애를 시작했는지, 누가 먼저 좋아했고 고백했는지, 고백은 어떻게 했는지 뭐 이런 기본적인 건 말을 맞춰 놔야죠.”
“아… 그렇겠네요.”
사영은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본격적으로 유준의 도움을 받게 된 이후로 사영은 종종 자신이 지금껏 얼마나 주먹구구식으로 일을 해 왔는지 실감했다.
제 일이니 유준보다는 자신이 더 치밀하게 생각해야 하는데 말이다. 괜히 민망한 마음이 들었다.
유준은 한층 심각해진 사영의 얼굴을 귀엽다는 듯 바라보다가 이내 입을 열었다.
“일단은 먹어요. 자세한 이야기는 돌아가서 해도 되니까.”
“네. 그럴게요. 유준 씨도 드세요.”
확실히 밖에서 할 이야기는 아닌지라 사영은 다시 손에 든 햄버거를 먹기 시작했다. 예전 같았으면 절반이나 겨우 먹었을까 싶은 크기였지만 오늘은 이상하게 잘 들어갔다.
“잠깐. 여기….”
그때, 불쑥 유준의 손이 사영의 얼굴로 향했다. 의도가 무엇인지 사영이 채 파악하기도 전에 유준의 엄지손가락이 사영의 입가를 문질렀다.
당황한 사영이 눈만 깜빡거리고 있자 유준은 태연하게 웃으며 말했다.
“뭐가 묻었길래.”
정말로 입가에 무엇을 묻혔는지 사영은 알 길이 없으니 그냥 믿는 수밖에 없었다. 애써 모른 척 외면하고 있던 물음이, 장면들이 사영의 머릿속을 다시 헤집기 시작했다.
여전히 해답을 찾지 못한 사영은 태연함을 가장하며 ‘고마워요’ 하고 겨우 인사를 되돌려주었다.
당연하게도 그날 두 사람이 함께 있는 사진은 온 커뮤니티와 SNS를 뜨겁게 달구었다. 당장이라도 꿀이 떨어질 것 같은 눈빛을 한 김유준의 얼굴만으로도 그 파급력은 상당했다.
거기다가 유준이 사영의 얼굴에 손을 대는 사진이 떴을 때는 그야말로 나라가 들썩였다. 평범한 연애 상대여도 그럴 판에 하물며 상대가 윤사영이니, 난리가 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어떤 이들은 다른 사람도 아니고 김유준이 이렇게 유난스럽게 연애하는 걸 놀라워했고, 어떤 이들은 한재우에 이어서 김유준까지 죽고 못 살게 만든 사영의 수완을 대단하게 여겼다.
누군가는 마치 유준이 부도덕한 연애를 하는 것처럼 화를 내다가 욕을 먹었고, 누군가는 ‘윤사영의 여우짓 모음’이라는 제목의 동영상으로 조회수를 긁어모았다.
반응은 제각각이었지만 모두가 김유준과 윤사영에 대해 말했다. 그 요란한 반응 사이에서 ‘불쌍한 한재우’를 이야기하는 사람의 수는 점점 줄어들고 있었다.
***
“그런데….”
“네?”
“내 질문에 대한 답은 생각해 봤어요?”
유준의 질문에 방 안에는 짧은 적막이 흘렀다. 다소 뜬금없는 질문이었지만 가만히 유준을 쳐다보는 사영의 표정은 그 질문이 나올지 알고 있었다는 듯 담담했다.
식사를 마친 후 두 사람은 호텔로 돌아와 대외적으로 밝힐 둘의 적당한 연애 스토리를 짜는 중이었다. 대략적인 이야기가 거의 끝나 가는 차였는데 유준이 불현듯 질문을 던진 것이다.
유준은 제 질문에 대해 더 이야기하지 않고 가만히 사영의 눈빛을 똑바로 마주했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어 금방이라도 입 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았지만 겉으로는 필사적으로 태연한 척을 했다.
사영의 눈에 너무 절박하게 보이고 싶지 않았던 탓이다. 자존심이 상한다든가 하는 문제가 아니었다. 다만 너무 무겁고 절절해 보이면 사영이 부담스러워 물러날까 걱정됐을 뿐이다.
침묵이 이어졌다. 사영의 머릿속에는 그날, 그 밤에 유준이 했던 질문이 맴돌았고 유준은 사영의 대답을 묵묵히 기다렸다.
칼자루를 쥔 건 사영이었다. 칼을 뽑을지 말지는 전적으로 사영의 손에 달려 있었다.
“저는 그때….”
한참 만에 사영은 입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