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6
짧은 첫머리를 꺼내 놓고도 사영은 입술을 달싹거리며 다시 말을 골랐다. 유준은 긴장으로 숨이 멎을 것 같았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사영은 천천히, 아주 조심스럽게 말을 이어 갔다.
“저는 그때… 그냥 유준 씨랑 키스를 하고 싶었어요.”
키스. 별것도 아닌 그 단어가 단지 윤사영의 입에서 나왔다는 것만으로 기묘한 파동을 만들어 냈다.
그냥 키스를 하고 싶었다고 말하는 사영의 말은 단언컨대 유준은 여태껏 받아 왔던 그 어떤 유혹보다도 색정적이었다. 사영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말이다.
유준은 입을 꾹 다문 채 주먹을 쥐었다 펴길 반복했다. 손끝이 저릿저릿한 느낌은 그래도 사라지지 않았다.
“아마… 아마 유준 씨한테 계속 몸이 달아 있었나 봐요. 제 실수고 사고였기는 해도 유준 씨와 여러 번 페로몬을 섞기도 하고, 전에도 입을 맞춘 적이 있으니까요.”
“…….”
“어쩌면 그냥 유준 씨한테 본능적으로 끌렸는지도 모르죠. 오메가라면, 아니 오메가뿐만이 아니라 그 누구라도 유준 씨를 보면 입을 맞추고 몸을 섞고 싶어질 테니까 저도 아마… 네. 그런 것 같아요.”
분석이라도 하듯 구구절절 늘어놓고 있지만 결국 사영의 말은 자신이 유준에게 성적으로 끌렸다는 소리였다.
모든 욕망을 거세당한 사람처럼 굴던 그간의 모습과 비교해 보면 썩 어울리지 않는 말이었다.
“흐음….”
유준은 숨을 내쉬며 턱을 괴고 말을 마친 사영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사영은 언제 유준의 시선을 똑바로 마주했냐는 듯 살짝 시선을 내렸다.
단순히 보기 좋은 알파에게 몸이 동했을 뿐이다, 라는 사영의 대답 자체가 만족스러운 건 아니었다.
그러나 유준은 실망하지 않았다. 오히려 자꾸만 웃음이 나오려고 해서 입꼬리를 애써 끌어 내려야 할 정도였다.
사영의 입에서 대놓고 당신이 나를 성적으로 흥분하게 했다는 말이 나온 것부터가 엄청난 발전이다. 몸이 동했든 마음이 동했든, 사영이 제게 특별한 감정을 느꼈다는 게 중요했다.
긴장이 조금씩 설렘으로 뒤바뀌기 시작했다. 솔직히 말해 유준은 당신이 원하는 것 같아서 응한 것뿐이다, 라는 대답까지 각오하고 있었다.
도움을 받았으니 대가를 지불하고 싶었다고. 윤사영이라면 충분히 그렇게 말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 대답을 들어도 상관없다고 마음의 준비를 했는데 이런 대답이라니 뜻밖이었다.
유준은 너무 들뜬 티가 나지 않도록 마음을 가다듬으며 입을 열었다.
“그럼 나는?”
“네?”
“나는 그날 왜 그런 것 같아요? 내가 왜 그랬을지 생각해 봤어요?”
집요한 유준의 물음에 사영은 테이블 아래에서 두 손을 가만히 모았다.
짐작 가는 바가 전혀 없는 건 아니지만 사영은 굳이 그걸 대놓고 입 밖으로 내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사영이 대답했다.
“…지금은 그 이유가 별로 궁금하지 않아요.”
“궁금하지 않다고? 사영 씨가 먼저 물어봤잖아요. 왜 키스한 거냐고.”
“네. 그때는 그랬는데… 지나고 보니까 별로 의미를 둘 만한 일은 아닌 것 같아서요.”
유준이 한쪽 눈썹을 슬쩍 올렸다가 내렸다. 이 또한 예상한 대답은 아니었다.
“의미를 둘 만한 일은 아니다….”
“사람들은 가끔 분위기에 취해 평소라면 하지 않을 일들을 하곤 하잖아요. 그냥 그런 건데 이유를 찾는 것도 우스운 것 같아서요.”
사영의 목소리는 침착했다. 솔직히 느낀 바를 말하고 있는 것 같은 얼굴이었다.
어느 정도는 진심이었다. 유준이 어째서 제게 키스한 건지 치열하게 고민했지만 결국 다다른 답은 그가 무슨 의도로 했든 알고 싶지 않다는 것이었다.
어차피 끝이 정해져 있는 관계였다. 그들의 연인으로 불리는 날도 오랫동안 지속되진 않을 것이다. 그 결말을 바꿀 마음이 없는데 의도니 뭐니 하는 것들을 짐작해 봐야 무슨 의미가 있을까.
“저는 벌써 잊었으니까 유준 씨도 마음에 담아 두지 마세요.”
“그래요?”
하지만 이어진 유준의 대답에 사영은 긴장했다. 되물어보는 목소리는 조금도 사영의 말에 동의하지 않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뭐, 윤사영 씨가 그러고 싶다면야….”
턱을 괴고 있던 팔을 내리고 어깨를 가볍게 으쓱하며 말하는 유준의 태도에서 짐작은 확신이 됐다. 유준은 사영의 말을 믿지 않는 모양이었다.
사영은 달리 반박하지 않고 입을 다물었다. 이야기가 이어져 봤자 유리할 게 없다는 판단이었다.
유준은 제 방으로 돌아가려는 듯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영은 이 불편한 대화가 끝난 것에 안심하며 그를 배웅하기 위해 함께 몸을 움직였다. 그러나 유준은 아직 할 말이 남은 모양이었다.
“머지않아… 외면하고 싶어도 더는 외면할 수 없는 순간이 올 거예요.”
“…….”
“내 마음도, 윤사영 씨 당신 마음도 똑바로 들여다봐야 할 때가 올 겁니다.”
사영은 고개를 들어 유준을 보았다. 그는 절대적인 진리를 말하는 사람처럼 자신만만해 보였다.
순간 두근, 하고 사영의 심장이 뛰었다. 아주 미약한 박동이었으나 스스로 알아채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까짓것, 그때까지 내가 조금 더 기다리지, 뭐.”
“…….”
“쉬어요, 그럼.”
유준은 사영의 의견은 중요하지도 않다는 듯 제 할 말만 남기고 방을 떠났다. 사영은 그 자리에 서서 유준이 사라진 곳을 멍하니 바라보며 한참이나 그의 말을 곱씹을 뿐이었다.
물론 그토록 당당해 보이던 유준이 복도로 나가 문을 닫자마자 후들거리는 다리로 벽에 기대 심장을 부여잡았던 건, 사영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
“일은 제대로 처리했어?”
“네.”
은성은 긴장한 표정으로 대답하며 재우의 눈치를 살폈다. 날이 갈수록 예민해지는 그는 최근 들어 은성에게 윽박지르고 폭언을 하지 않는 날이 없었다.
은성은 요즘 피가 마르는 게 어떤 기분인지 실감했다.
“가 봐.”
재우는 문을 향해 고갯짓하며 말했다. 살이 빠져 더 날카로워진 인상은 절로 상대를 움츠러들게 했다. 유준과 사영의 열애설이 사실로 밝혀진 후 재우는 하루하루가 다르게 어두워졌다.
“뭐야. 할 말 있어?”
피곤한 듯 감은 눈 위를 꾹꾹 누르던 재우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의 앞에는 쭈뼛거리며 서 있는 은성이 있었다.
평소라면 재우를 오래 마주하고 싶지 않아 용건이 끝난 후 곧바로 돌아갔을 은성이었지만 오늘은 이상하게 발길이 떨어지질 않았다.
관여하고 싶지 않아도 자꾸만 떠오르는. 이제는 악몽이 되어 은성의 밤을 괴롭히기도 하는. 윤사영 때문이었다.
재우의 지시를 받은 은성은 평소 친분을 다져 놓은 기자에게 제보를 했다. 사실 제보라고 이름 붙이기에도 민망한 일이긴 했다.
은성이 한 건, 근거 없는 말을 마치 사실인 양 기자에게 전달하는 일이었다.
그 탓에 내일이면 애초에 사영이 유준을 구했던 일이 전부 의도된 사건이었으며 그 일을 위해 사영이 사람을 고용해 그날 그 자리에서 바이크가 유준을 덮치도록 했다는 의혹을 제기하는 기사가 뜰 예정이었다.
어차피 기자는 이런 의혹이 있다고 소개한 것에 불과하다, 는 방패로 빠져나가면 그만이니 조금이라도 더 자극적인 기사를 원하는 이에게 이보다 더 좋은 ‘제보’는 없을 것이다.
“할 말 있으면 빨리 하고 가. 피곤하니까.”
쉽게 입을 열지 못하고 쭈뼛거리는 은성의 태도에 재우가 짜증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은성은 연신 입술을 물었다 놓길 반복했다. 공손하게 앞으로 모든 두 손엔 식은땀이 흥건했다.
은성의 할 일은 이미 끝났다. 재우가 시킨 대로 따랐고 그것으로 끝이다. 은성은 자신이 한 일이 어떤 결과를 불러일으킬지, 타인의 인생을 얼마나 망가트릴지, 그런 것들은 굳이 생각하지 않았다.
내 삶도 힘드니까, 팍팍하니까, 돈을 벌어야 하는 나 같은 사람은 어쩔 수 없으니까.
그런 말들로 방패를 세우고 그냥 그 뒤에서 숨을 죽이고 있었다. 윤사영이 홀로 메말라 가던 시간 내내.
그런데 오늘은 무슨 바람이 불어 이렇게 입 안이 쓰고 가슴에 돌덩이가 얹힌 것처럼 무겁기만 한 건지.
결국 그 답답함을 견디지 못한 은성이 아주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에둘러 말을 꺼냈다.
“그… 지금은 이런 식으로 윤사영 씨를 다시 끌어내리기가 어렵지 않을까요….”
은성으로서는 이게 최선이었다. 안 그래도 작은 꼬투리만 생기면 자신을 쥐 잡듯 잡아 대는 재우에게 차마 대놓고 이런 짓은 이제 그만하면 안 되겠냐는 말 같은 건 할 수 없었다.
재우가 서늘하게 가라앉은 얼굴로 은성을 노려보았다. 심장이 뛰고 등 뒤로 식은땀이 흘렀다. 오랫동안 한재우와 함께하며 몸에 새겨진 눈치와 두려움이 은성의 입을 막았다.
하지만 오늘따라 내게 그래서는 안 되는 거 아니었냐고 묻던 사영의 음성이, 은성 씨가 당하는 일들이 결코 온당한 일이 아니라고 말해 주던 사영의 얼굴이 머릿속을 떠나질 않아서.
은성은 마른침을 삼키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지금 상황에서 혹시… 역효과가 나지는 않을까 걱정이 돼서….”
단순히 제 본심을 숨기기 위해 꾸며 낸 말은 아니었다. 은성이 보기에 한재우는 계속 잘못된 선택을 내리고 있었다. 이런 조작된 기사로 뒤집기엔 상황이 그다지 좋지 못했다.
게다가 한재우는 요즘 상태가 나빴다. 그의 장점이자 매력으로 꼽히던 여유는 사라지고 전에 없이 초조하고 불안정해 보였다.
걱정스러울 정도로 말이 없다가 별것도 아닌 일에 불같이 화를 냈다. 은성으로서도 그 변덕을 맞추기가 쉽지 않았다.
은성에게만 그런 것도 아니다. 스태프나 다른 배우들을 대하는 태도는 더욱 심각했다. 이런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처음에는 유준과 사영의 소식을 감안해 재우를 이해하고 넘어가던 사람들의 시선도 점점 변해 갔다. 늘 재우의 옆에 있는 은성에게는 그 변화가 너무나도 선명하게 느껴졌다.
평소라면 그런 변화에 누구보다 예민하게 반응하고 대처했을 한재우지만 지금은 그들의 평가 따윈 안중에도 없다는 듯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
“상관없어.”
은성은 재우가 네까짓 게 뭘 아냐고 화를 내고 물건을 집어 던질 거라고 예상했지만 의외로 재우는 딱딱한 목소리로 짧게 대답했다. 그 반응에 오히려 놀란 은성이 눈만 깜빡거리자 재우가 곧바로 말을 더했다.
“김유준 머릿속에 한 줌의 의심이라도 심어 줄 수 있으면 그걸로 족해.”
“아….”
그제야 은성은 재우의 목적이 무엇이었는지를 깨달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