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복수하는 회귀자를 사랑하는 법-146화 (146/193)

#146

충동적인 물음이긴 했지만 사실은 내도록 사영이 가지고 있던 궁금증이기도 했다. 유준은 정말로 세상에 그 무엇도 두려운 게 없는 사람 같았다.

사영이 두려워했던 모든 것들은 유준의 앞에서는 지극히 하찮은 것들이 됐다. 세상의 눈도, 한재우도, 유준과 함께 있으면 전부 아무것도 아니었다. 누군가를 짝사랑하는 일마저도.

사영은 과연 이 남자를 겁먹게 만들 수 있는 존재가 세상에 있기는 할까 진심으로 궁금했다.

“뭔 소리야….”

사영의 질문을 들은 유준은 황당하다는 얼굴을 했다. 사영은 그럼 그렇지, 하는 심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처럼 부족한 것 없이 잘난 남자가 무서워하는 게 있을 리가 없지 싶었다.

유준이 말을 이었다.

“내가 지금 윤사영 씨 때문에 잔뜩 겁먹은 거 안 보입니까?”

“…네?”

“참나. 내가 왜 생전 하지도 않는 짓을 하고, 말을 하면서 어떻게든 윤사영 씨 옆에 붙어 있으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는데.”

전혀 짐작도 하지 못한 말을 늘어놓는 유준의 표정은 진심으로 억울해 보였다. 사영이 멀뚱멀뚱 눈만 깜빡이고 있자 유준이 손을 들어 제 머리카락을 거칠게 쓸어 넘겼다.

“윤사영 씨 마음을 끝끝내 못 얻어 낼까 봐 내가 지금 안달하고 있잖아요.”

“그건….”

“나 요즘 잠도 못 자서 다크서클 여기까지 내려온 거 안 보여요? 진짜 너무하네. 나는 진짜 윤사영 씨한테 버림받을까 봐 매일 덜덜 떨고 있는데 무서운 게 없냐니.”

“그, 그게… 아니 제 말은….”

“내가 지금 정말로 아무렇지 않아서 이러고 있는 게 아닙니다.”

유준의 목소리가 갑자기 진지해졌다. 일변한 분위기가 순식간에 숨을 막고 심장을 거칠게 뛰게 했다. 깊어진 유준의 눈동자가 흔들림 없이 올곧게 사영을 응시했다.

“나는 지금 필사적이에요. 윤사영 씨가 그만큼 간절해서요.”

“…….”

“내가 두려워하는 건 윤사영 씨라고요.”

사영은 한재우가 두려웠다. 그의 폭력적인 언행이나 학대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보다 더 근본적인 문제는 사영이 그를 너무나도 사랑했기 때문이었다.

재우에게 버림받을까 봐, 그가 끝끝내 자신을 떠나버릴까 봐, 사영은 늘 재우를 사랑하는 동시에 무서워했다.

그런데 김유준이 그런 마음을 가지고 자신을 대하고 있다니 듣고서도 쉬이 믿을 수가 없었다. 사영은 자신을 사랑한다는 유준의 마음이 이토록 무거울 거라고는 조금도 생각하지 못했다.

그냥 흐르는 시간에 조금 놓아두면 흘러가 버릴, 그럴 마음이라고 여겼다.

사영이 침묵하며 유준의 말을 곱씹는 동안 등받이에 기대고 있던 몸을 일으켜 세운 유준이 슬쩍 사영에게로 가까이 다가왔다.

“내 마음이 단순한 흥미라고 여기지 말아요.”

유준이 낮아진 목소리로 사영의 귓가에 주문처럼 속살거렸다.

“윤사영 씨 자신을 그 정도로 별 볼 일 없는 사람이라 여기지도 말고.”

차근차근 거리가 가까워졌다. 사영은 유준의 몸짓이 무엇을 원하고 있는지 알아챘다.

피하려면 피할 수 있었다. 모르는 척 고개를 돌리고 소파에서 일어서면 끝날 일이다. 사영은 알고 있었다.

“나는 정말 윤사영 씨의 마음을 얻기 위해 내 모든 걸 다 걸고 있으니까.”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유준이 사영을 향해 몸을 기울였다. 사영에게는 여전히 그를 거부할 수 있는 힘과 여유가 있었다.

“…….”

그저, 스스로 그러지 않기로 결정했을 뿐.

뜨거운 입술이 성급하게 부딪혀왔다. 익숙하지 않은 타인의 체온에 사영은 잠시 멈칫했지만 유준은 찰나조차 기다려 주지 않았다.

닫힌 입술 사이를 혀끝이 집요하게 파고들었다. 뺨을 감싸온 손은 결코 강제적이지 않았지만 사영은 마치 속박당하기라도 한 것처럼 고개를 돌려 피할 수 없었다.

타인의 강요로 인한 게 아니었다. 사영 그 자신의 의지였다. 익숙하지 않은 낯선 욕구가 서서히 열기가 되어 전신으로 뻗어갔다.

끝끝내 사영의 입술을 연 유준의 혀가 기다렸다는 듯 입 안을 점령했다. 부드럽게 입천장을 핥았다가 거칠게 사영의 혀를 핥고 빨아 대기도 했다.

때로는 미지의 세계를 정복하는 사람처럼, 때로는 더없이 소중하고 애틋한 보물을 쓰다듬는 사람처럼. 유준은 사영의 안쪽 살결을 남김없이 범하고 매만지기를 멈추지 않았다.

“흐… 흐읍….”

오랫동안 집요하게 이어진 입맞춤에 견디기 힘들 만큼 숨이 차오른 사영이 살짝 고개를 틀며 틈을 벌렸다.

유준은 그 짧은 떨어짐을 용납하지 않고 따라와 다시금 사영의 숨을 집어삼켰다.

사영은 그 여유 없는 몸짓을 마주하고 나서야 비로소 유준이 말한 두려움의 실체를 확인할 수 있었다.

조급하고 절박한 그의 행위에서는 그간 사영이 느낀 여유로움과 당당함 같은 건 조금도 찾을 수 없었다.

유준은 제가 조금이라도 힘을 빼면 영영 사영을 놓치기라도 할까 봐 두려운 사람처럼 필사적으로 매달려왔다.

그 사실을 깨달은 순간 사영이 느낀 감정은 놀랍게도 안도였다. 만족감이었다. 미묘한 불편함과 그보다 몇 배는 더 큰 희열이었다.

누군가가 이토록 간절하게 자신을 원하고 있다는 감각이 짜릿하게 사영의 말초신경을 자극했다.

숨조차 마음대로 쉴 수 없을 만큼 속박당하고 있는 건 사영이었지만 이 관계에서 우위를 차지하고 있는 건 바로 자신임을, 사영은 느낄 수 있었다.

타인의 감정을 제 것처럼 손에 쥐고 있다는 그 감각이 낯설어서. 낯선 만큼 짜릿해서. 그만큼 부담스럽고, 그보다 더 만족스러워서.

“으응….”

결국 사영은 옅은 신음을 흘리며 유준의 목을 끌어안았다. 이 순간이 유준에게 헛된 기대감을 심어줄 수도 있다는 사실은 굳이 떠올리지 않기로 했다.

***

“…….”

울리지 않는 휴대폰을 한참이나 노려보던 재우는 곧 허탈한 웃음을 터트리곤 들고 있던 잔에 담긴 술을 단숨에 목으로 넘겼다.

창밖으로 아직 해가 높이 떠 있는 환한 낮이었지만 집안에는 이미 술 냄새가 가득했다.

대외적으로 재우는 건강상의 이유로 잠시 휴식을 취하는 중이었다. 과로로 쓰러져 병원에 입원했다가 퇴원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다.

그런 한재우가 요즘 매일 같이 집에서 술에 절어 있을 거라고는 아무도 짐작하지 못할 것이다.

텅 비어있는 재우의 눈동자는 연신 과거의 어느 날들을 헤맸다.

윤사영을 실제로 처음 마주쳤던 그 날을, 사영이 제게 사랑한다고 수줍게 고백해왔던 순간을, 부부로서 함께했던 모든 날을 재우는 몇 번이나 곱씹고 있었다.

병원에 입원한 건 최근 지나치게 재우에게 불리한 쪽으로 쏠리는 여론을 반전시킬 의도이긴 했지만 내심 재우는 그 소식을 접한 사영에게 연락이 오진 않을까 기대했다.

제 몸에서 피가 나는 건 참아도 재우의 손끝이 작은 가시에 찔리는 건 못 견뎌 하던 사영이었으니까.

다른 것도 아니고 아파서 병원에 입원했단 소식을 들으면 안부 연락 정도는 오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러나 입원한 지 며칠이 지나고 퇴원할 때까지도 사영에게서는 아무런 연락도 없었다.

그저 성공을 위한 발판에 지나지 않았던 윤사영이 제 삶에 남길 흔적은 아무것도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길다면 길었던 결혼생활 탓일까. 어느 순간부터 재우는 너무 많은 순간에 윤사영을 떠올렸다.

반기는 이 아무도 없는 집으로 들어올 때, 아침 일찍 적막한 집을 나설 때, 고단할 때, 아플 때, 심지어 화가 나거나 기쁜 순간까지도 재우는 자꾸만 사영을 떠올렸다.

윤사영은 한재우를 너무나도 필사적으로 사랑해서 재우가 모질게 굴었던 모든 순간에조차 사랑을 갈구하는 모습으로 그 자리에 있었다.

그래서 재우는 이제 와 망령처럼 남은 윤사영에 대한 기억을 도저히 피할 수가 없었다.

“후회 같은 거 안 해….”

재우는 잔뜩 취한 눈동자를 번뜩이며 중얼거렸다. 오기 가득한 목소리였다.

“윤사영을 먼저 버린 건 나야. 후회 같은 걸 내가 왜 해? 씨발, 그 새끼가 뭐라고!”

고요한 공간에 분노로 가득한 재우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 목소리에 담긴 감정이 사실은 분노보다 회한과 더 닮아있다는 걸 재우는 알지 못했다. 아니, 인정하지 않았다.

“나를 우습게 만들고 지들끼리만 잘 지내겠다? 그렇게는 안 되지.”

이건 다만 복수일 뿐이다. 제 앞에서 자신을 농락하고 제 이미지를 망친 이들을 향한 대갚음에 불과했다.

“두고 봐, 윤사영….”

한재우가 윤사영을 되찾고 싶어 한다는 건 절대로 벌어질 수 없는 일이었으므로. 재우는 그냥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

“나중에 무대 인사 할 때는 어쩔 수 없겠지만 그전에는 최대한 한재우와는 스케줄이 겹치지 않게 조율할 거예요.”

“으응.”

“대표님 말씀으로는 한재우 회사 쪽에서도 가급적 두 분과는 어떤 일정도 같이 하지 않길 원한다고 하더라고요.”

뒷좌석에 앉은 사영은 우종이 사다 준 김밥을 입에 넣고 우물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일찍부터 잡힌 화보 촬영 일정 때문에 아침을 먹지 못하고 나왔더니 배가 고팠다.

사영은 전과 달리 부쩍 밥을 먹고 싶어 해서 우종도 요즘은 샌드위치나 빵 대신 쌀이 들어간 간편한 식사를 챙기는 편이었다.

순간적으로 한재우에 관한 이야기를 해놓고 아차 싶었던 우종은 혹시나 사영이 그 때문에 입맛이 떨어지면 어쩌나 걱정했지만 다행히 사영은 우종의 이야기를 들으면서도 열심히 볼을 우물거렸다.

요즘 우종은 무언가를 먹는 사영을 보면 밥을 먹지 않아도 배가 부르다는 기분이 뭔지 알 것 같았다. 얼마 전 조금이지만 체중이 늘었다는 말을 들었을 때는 얼마나 뿌듯했는지 모른다.

단순히 맡은 일을 열심히 하는 걸 넘어서서 이토록 진심으로 아끼고 챙기게 되는 연예인이 생긴 게 신기할 지경이었다.

“그러니까 형도 너무 걱정하지 마시고… 아마 <하지>와 관련된 대부분의 일정은 유준이 형과 함께하게 될 거예요. 도율 씨도 종종 같이할 거고….”

“도율이랑 자주 만났으면 좋겠다.”

한재우보다 오히려 도율의 이름에 더 반응하는 사영의 모습에 우종의 입가에 한층 더 흡족한 미소가 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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