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8
집으로 들어와 촬영용 메이크업을 지우고 샤워를 마친 사영은 그대로 침대에 누웠다. 아침 일찍부터 움직였더니 피곤이 몰려오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사영은 그 피로감을 만끽했다. 무기력해서 기운 없이 늘어져 있던 때와는 달랐다. 좋아하는 일을 열심히 하고 나서 얻는 피로는 사영에게는 그 무엇보다도 귀하고 소중했다.
느릿하게 깜빡이는 사영의 눈동자에 작고 휑한 침실의 풍경이 어렸다. 사영은 침실로 나온 큰 방을 두고 일부러 작은 방에 침대를 놓고 자리를 잡았다.
액정이 깨진 휴대폰을 그냥 들고 다녔던 것도 그렇고, 이 방도 그렇고, 지난날 자신이 얼마나 망가져 있었는지를 최근 사영은 매일같이 느끼고 있었다.
좁고 꽉 막혀 있던 시야가 하루하루 넓어지는 게 느껴졌다. 보면서도 인지할 수 없었던 색채가 이제야 눈에 들어왔다.
유준의 도움을 받고 함께 연예계 활동을 지속하며 사영은 조금씩 망가진 감각들을 회복하고 있었다.
죽기 전의 삶에서도 연기를 놓아 버리지 않았다면 그렇게까지 망가지진 않았을 거란 뒤늦은 후회가 없었던 건 아니다.
하지만 이미 지나간 일을 두고 부정적인 감정으로 시간을 소모하고 싶진 않았다. 그럴 시간에 어렵게 얻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도록 더 노력하고 싶었다.
사영은 조금 시간적 여유가 생기면 방을 옮겨야겠다고 다짐했다. 휑한 집을 좋아하는 분위기로 꾸미고 직접 요리해 먹는 습관도 길러야지.
한재우에게 빼앗겼던 걸 되찾는 일에는 연기뿐만이 아니라 일상도 포함되어 있었다. 유준의 손을 잡고 사영은 그렇게 길을 찾아 나가는 중이었다.
깜빡이던 눈이 점점 더 느리게 움직였다. 샤워 덕분에 따뜻해진 몸이 부드러운 이불의 감각에 점점 더 노곤해졌다. 몸이 침대 아래로 스며드는 느낌 속에서 사영은 천천히 눈을 감았다.
사영은 잠들 때마다 죽음을 반복해서 경험하는 것 같은 서늘함에 휩싸이곤 했다. 실제로 죽음을 겪지 않았을 때조차 그랬다.
하지만 밀려드는 수마에 편안하게 몸을 맡긴 사영은 더 이상 그런 기분에 잠식되지 않았다.
유준의 스케줄이 지체되는 일 없이 끝났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사영은 이내 단잠에 빠져들었다.
***
“……!”
사영은 갑작스러운 소음에 소스라치게 놀라며 눈을 떴다. 몇 번이나 눈을 깜빡인 뒤에야 사영은 자신이 집에서 잠들었음을 기억해 냈다.
아직 해가 떠 있을 때 침대에 누웠는데 제법 깊이 잠든 건지 창밖이 어두웠다. 사영은 찌뿌듯한 몸을 가볍게 스트레칭하며 천천히 일어났다.
“아…!”
그런 사영이 갑자기 무언가를 깨달은 얼굴로 외마디 탄성을 지르며 황급히 침대에서 내려와 거실로 나갔다. 자신이 초인종 소리에 눈을 떴다는 걸 깨달은 것이다.
유준이 온 게 틀림없었다. 출발하기 전에 먼저 연락을 준다고 했지만 잠든 바람에 확인을 못 한 모양이었다. 아니면 유준이 연락하지 않고 곧장 왔거나.
어느 쪽이든 잠이 깬 후 이미 시간을 제법 지체되었는데 더 기다리게 할 순 없었다.
사영은 어두운 거실에 불을 켜고 현관까지 단숨에 달려갔다. 머리까지 감고 바로 자다 일어난 터라 분명 부스스한 몰골일 거고 옷도 갈아입지 못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손으로 대충 머리를 쓱쓱 빗어넘기며 인터폰 앞에 선 사영의 얼굴에는 옅은 쑥스러움과 그보다 더 진한 반가움이 어려있었다.
“왜….”
하지만 인터폰 화면을 확인한 사영의 얼굴을 금세 딱딱하게 굳었다. 흔들리는 눈동자에서 사영이 지금 느끼는 당황스러움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 사영의 집 문 앞에 서 있는 사람은 김유준이 아닌 한재우였다.
설렘으로 두근거리던 심장이 이번에는 다른 방식으로 뛰었다. 불안함과 곤란함, 난감함과 실망스러운 모든 감정이 복잡하게 얽혀들었다.
그때 초인종이 다시 요란한 소리를 내며 울었다. 사영은 어깨를 크게 들썩이며 눈을 질끈 감았다.
마지막으로 한재우와 대화를 나누었을 때 그가 할 말이 있으니 제게 시간을 달라고 말하긴 했지만 이렇게 막무가내로 찾아올 줄은 몰랐다.
사영은 두 손을 들어 가만히 제 심장께를 꾹 누르며 심호흡했다. 그리고 겨울이 이미 지나가고 있음을, 제게로 불어오는 삭풍을 막아 주겠다며 곁에 있어 주는 사람들이 존재함을 떠올렸다.
이윽고 눈을 뜬 사영이 인터폰의 마이크를 누르고 입을 열었다.
“왜 왔어요?”
이제는 굳이 애쓰지 않아도 차가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를 향한 분노의 감정마저 더는 사영을 뒤흔들 수 없었기 때문이다.
대신 이제는 한재우가 언제 사영을 향해 날카롭고 서늘한 기운을 내뿜었냐는 듯 절절한 목소리로 말을 건네왔다.
- 사영아. 할 말이 있어서 왔어.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매니저를 통해서 하자고 내가… 말했을 텐데요.”
- 제발 사영아… 꼭, 꼭 해야 하는 말이야.
반복되는 냉담한 대답에 분명 자존심이 상했을 텐데 재우는 오늘도 한결같이 애타게 매달리고만 있었다. 불편한 걸 떠나 사영은 이 상황이 너무나 낯설었다.
심지어 이곳은 다른 보는 눈이 있는 것도 아니니 연기할 필요가 전혀 없었다. 완벽하게 자신을 꾸며내던 시절에도 사영과 단둘이 있을 때는 민낯을 고스란히 보이던 재우가 아니었던가.
그러던 사람이 왜 갑자기 안 하던 짓을 하는 건지 짐작이 가지 않았다.
사영은 한숨을 깊이 내쉬었다. 순탄하게 나아가는 연예계 생활과는 다르게 영화 촬영이 끝난 이후 한재우를 향한 복수는 지지부진하게 이어지는 중이었다.
복수에 회의를 느껴서라기보단 삶에서 한재우보다 더 중요한 존재를, 순간을 찾느라 그랬던 거였다. 복수를 포기할 마음은 결단코 없었으니 어떤 식으로든 새로운 도화선이 필요했다.
“…잠깐 기다려요.”
결국 사영은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리고 바로 문을 열지 않고 거실에 놓아두었던 휴대폰을 찾아 우종에게 서둘러 메시지를 남겼다.
「우종아」
「이유는 나중에 설명할 테니까 15분 후에 전화 좀 줄래?」
「만약 내가 안 받으면 집으로 바로 와줘 부탁할게」
한재우는 믿지 못할 사람이었고 제 목표를 위해서는 얼마든지 악독해질 수 있는 사람이었다. 괜한 짓이 되더라도 대비책을 세워 두는 게 맞았다.
다시 인터폰을 향해 걸어가는 사이 손에 든 휴대폰이 짧게 진동했다.
「네 15분 후에 전화할게요!」
다행히 우종이 곧바로 메시지를 확인하고 답을 보내 준 덕분에 사영은 한결 편안해진 마음으로 문을 열었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오는 한재우의 꼴은 말이 아니었다. 이런 모습을 본 적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초췌한 모습이었다.
살이 빠져 인상이 날카로워졌고 잠을 제대로 못 자는지 눈 밑이 거뭇했다. 깔끔하고 여유로운 이미지를 고수하기 위해 노력하던 사람의 낯선 모습에 사영이 저도 모르게 긴장했다.
“나한테 기회를 줘서 고마워, 사영아.”
집 안으로 들어와 완전히 세상과 단절된 후에는 원래의 한재우로 돌아갈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던 사영의 예상은 완전히 빗나갔다.
사영에게 본모습을 드러낸 후에는 절대로 뱉은 적이 없는 ‘고맙다’는 말을 하는 재우의 목소리와 표정은 오히려 전보다 더 절박하고 진실해 보였다.
사영은 동요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 애쓰며 대답했다.
“하고 싶은 말이 뭔데요?”
“…….”
“길게 말하고 싶지 않으니까… 용건만 간단히 하고 가줬으면 좋겠어요.”
전에는 왜 단 한 마디도 그에게 반박하지 못했을까 싶을 정도로 사영의 입에서는 차가운 말들이 자연스럽게 흘러나왔다.
전생은 물론이고 불과 몇 달 전까지만 하더라도 사영은 재우의 앞에서 아무렇지 않은 척 할 말을 쏟아 내는 게 너무나도 힘들었다.
그런데 지금 사영은 연기를 하는 것도 아니다. 그의 앞에서 당당하고 무심해 보이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지도 않았다.
지난번 재우를 보며 느낀 귀찮다는 감정이 다시금 생생하게 떠올랐다. 일시적인 감정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사영의 평정은 곧 깨질 수밖에 없었다.
“사영아….”
한재우가 다시 한번 울음을 삼킨 듯한 목소리로 이름을 부르며 사영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
사실 한재우도 그렇게까지 할 계획은 아니었다. 윤사영 따위에게 무릎을 꿇다니. 아무리 목표한 바가 있다고 하더라도 그 정도로 자존심을 내려놓고 싶진 않았다.
재우는 그저 어떻게든 사영을 뒤흔들고 싶었을 뿐이다. 감히 제 앞에서 김유준을 사랑한다는 소리를 지껄인 사영이 제 마음을 되돌아보게 만들고 싶었다.
그걸 위해서라면 적당히 사영에게 다시 매달리는 척, 후회하는 척하는 연기 정도는 얼마든지 해 줄 수 있었다.
하지만 정작 사영을 마주쳤을 때, 재우는 지금껏 자신을 향해 중얼거렸던 알량한 핑계들이 전부 산산이 조각나는 것을 느꼈다.
이제 정말로 제게 아무런 미련도 남지 않은 것 같은 사영의 차가운 말 한마디 한마디가 비수처럼 심장에 박혀 왔다.
진짜로 아플 리가 없는데. 그냥 분하고 억울해서 갚아주려는 것뿐이지 그를 진심으로 다시 원하게 되었을 리가 없는데.
그런데도 재우는 마치 사영의 말에 상처받기라도 하는 것처럼 자꾸만 명치 아래가 욱신거렸다.
제게 있는지도 몰랐던 그리움이 밀려들었다. 티 하나 없이 맑은 얼굴로 웃으며 제게 사랑한다고 속삭여주던 윤사영을, 사실은 그리워하고 있었다.
그것이 사랑인지, 아니면 단순히 가지고 놀던 장난감을 빼앗겨버린 어린아이의 분노와 같은 감정인지는 알 수 없었다.
확실한 건 사영을 마주한 순간 관계를 되돌리고 싶다는 마음이 너무나도 절박하게 들었다는 점이었다.
“왜, 왜 이래요…!”
놀란 사영이 비명처럼 외쳤다. 그와 동시에 재우의 눈에서 눈물이 후두둑 떨어졌다. 사영이 놀란 만큼 한재우 자신도 경악할 만한 일이었다.
재우는 분명 오늘 적당히 후회하는 척을 하려고 했을 뿐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통제할 수 없는 감정이 날뛰었다.
더는 사영의 무심한 목소리를 듣고 싶지 않았고, 김유준을 사랑하는 윤사영을 받아들이고 싶지도 않았다. 그가 다시 제 곁으로 돌아오기를 간절하게 원했다.
인정하고 싶지 않았으나, 그게 지금 이 순간 한재우가 느끼는 진실된 감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