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복수하는 회귀자를 사랑하는 법-152화 (152/193)

#152

“미친 새끼….”

집으로 돌아온 재우는 욕실 거울에 제 얼굴을 비춰보며 욕설을 내뱉었다. 매끈하고 잘난 얼굴에 제대로 상처가 남았다. 터지고 부어오른 입술은 누가 봐도 주먹으로 맞은 꼴이었다.

똑같이 그 얼굴을 후려쳐주지 못한 건 아쉬웠지만 한번 참은 덕분에 남들 눈에 보일 좋은 상처를 얻었으니 나쁠 건 없었다.

상처에서 느껴지는 통증을 가만히 만끽하던 재우는 거실로 돌아와 그대로 소파에 누웠다. 한차례 밀려왔던 흥분이 가라앉자 피곤이 밀려왔다.

눈을 감는 순간 오늘 사영의 앞에 무릎까지 꿇고 절절하게 고백하던 제 모습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재우는 그 순간 제가 느낀 감정을 가만히 곱씹어보았다.

후회한다고, 내 실수였다고, 그러니까 제발 내가 한 번만 더 기회를 달라고.

나는, 너를, 사랑한다고.

제 입으로 분명히 내뱉은 말들이 낯선 파동이 되어 귓가를 맴돌았다.

애초에 그럴 의도로 윤사영을 찾아간 거다. 사영을 비웃거나 겁박하거나 무시하는 것으로는 더 이상 윤사영이 동요하지 않았으니까.

재우는 사영을 흔들기 위한 마지막 수단으로 이 방법을 택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무릎을 꿇고 눈물을 흘리며 이렇게까지 간절하게 매달릴 생각은 정말로 없었다.

“…….”

결과적으로 사영의 반응 자체는 무척이나 만족스러웠으나 재우에게도 혼란스러움은 남아 있었다.

사영에게 매달리던 순간, 간절한 마음을 토해 내던 바로 그 순간.

재우는 잠깐이었지만 자신이 연기를 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를 잊어버렸다. 너무나도 절박해서, 정말로 윤사영을 되찾지 못하면 죽어 버릴 것 같은 두려움이 턱끝까지 차올라서.

머릿속으로 다음으로 해야 할 말을, 행동을 떠올리지 않아도 절로 눈물이 흐르고 울먹임과 애원이 터져 나왔다.

그 감정은 도대체 무엇이었을까. 어째서 그렇게까지 몰입해 마치 진짜인 것만 같은 고통을 느꼈나. 곱씹어 생각해 보아도 해답을 찾을 수 없는 물음이 끊임없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뭐… 상관없겠지만….”

속에 가득한 의혹을 애써 외면하듯이 재우는 일부러 가벼운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 감정이 진실이었든 단지 순간적으로 제 연기에 너무 몰입하여 그렇게 된 것이었든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건 분명 사영이 오늘 자신의 고백에 흔들렸다는 사실이고 그의 마음속에 여전히 자신을 향한 감정이 남아 있다는 사실이었다.

이제 와서 제게 왜 이러냐고 소리치던 사영의 모습을 떠올리자 혼란스러운 감정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필사적으로 재우의 말을 막던 사영은 어떻게 보아도 한재우에게 여전히 짙은 미련을 가진 사람 같았다.

김유준과 윤사영이 꼴 같지도 않은 연애를 시작한 뒤로 줄곧 재우를 괴롭히던 분노와 고통이 한순간에 사라졌다.

이대로 두 사람을 갈라놓고 사영을 되찾을 수만 있다면 그깟 무릎은 몇 번이고 더 꿇어줄 수도 있었다.

“잘해 줘야지….”

여전히 미소가 남아 있는 입술 사이로 만족스러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처음 재우가 세웠던 계획은 김유준으로부터 사영을 되찾은 뒤 그를 다시 버리는 것이었다. 그렇게 하여 그간 자신을 짜증나게 했던 사영에게 벌을 줄 생각이었다.

하지만 계획의 첫 단계를 실행에 옮긴 지금, 재우는 다른 미래를 꿈꿨다.

감히 먼저 이혼을 통보한 것도 모자라 한재우가 오랫동안 공들여 무너트려 놓았던 것을 다시 가지려 하는 게 괘씸했지만.

싸구려 오메가처럼 김유준을 유혹해 급기야 연인 놀이를 한 것 역시 쉽게 용서해 주기 힘들 만큼 화가 났지만.

그래도 그가 다시 제게로 돌아온다면 그간 부부로 살아온 정을 생각해 받아 주겠다고. 그뿐만이 아니라 재회 이후에는 그래도 조금쯤 사영을 어여삐 여기고 아껴 주어야겠다고.

다시는 자신을 떠날 생각을 하지 못하게. 다른 마음을 먹지 못하고 이번에야말로 평생토록 한재우만을 사랑하게. 딱 그만큼의 애정을 쏟아부어 주겠다고.

재우는 한결 여유로워진 마음으로 자신의 계획을 수정했다.

오래전 그날처럼 화사한 얼굴로 제게 사랑한다고 말하는 윤사영과 그런 그를 따스하게 품에 안아 주는 제 모습이 떠올랐다. 재밌게도 그건 꽤 행복한 상상이었다.

***

야 진짜 김유준이 한재우 팸????

상처가 진짜 누가 봐도 한대 맞은 얼굴인데 ㄷㄷ 둘다 여태 반박도 안하는 거 보면 진짜 맞은 거 아님?? 왜 때렷지? 윤사영때매 먼일있었나? 대박이다 진짜.....

└ 진실은 알수없지......

└ 깡패야 뭐야 왜 사람을 때려? 진짜면 개실망....

└└ 사실인지 아닌지도 모르는데 뭔 벌써 실망이야 ㅋㅋㅋㅋ

└└ 그러니까 진짜면 이라고 말했잖아 글자 못읽음???

└└ 글자만 안쓰면 안보이는줄 아나ㅋㅋㅋㅋㅋㅋ

└ 아무튼 ㅇㅅㅇ때매 여럿 고생한다 ㅋ....

└└ 오늘도 난데없이 머리채 잡히는 ㅇㅅㅇ... 제일 고생하는건 ㅇㅅㅇ인듯? ㅋㅋㅋㅋ

└└ 2222 누가 때리고 맞았는지 그것도 뭐가 사실인지 모르는 판국에 갑자기 윤사영 탓을 한다? 투명하조 ㅋㅋㅋㅋㅋㅋ

└ 김유준 진짜 자기가 뭐 왕인줄 아나봐 저러고도 다들 자기편 들어줄 줄 아랏나

└└ 응 나 김유준편

└└ 응 나 김유준편2222

└└ 응나김

└ ㅎㅈㅇ는 요즘 맨날 들리는 소리가 저런 거네 피곤하다....

***

사영은 휴대폰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고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답지 않게 오랫동안 휴대폰 화면을 들여다보고 있었더니 목이 다 뻐근했다.

사영은 저녁을 먹고 난 뒤 줄곧 온종일 인터넷을 뜨겁게 달군 김유준과 한재우에 관한 이야기들을 살펴본 참이다.

유준이 한재우를 때린 거야 사실이라지만 단순히 한재우 얼굴에 ‘맞은 것 같은’ 상처가 생겼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이 정도로 자세한 소문이 돈다는 게 마음에 걸렸다.

자극적인 이야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여럿 떠들다 보니 우연히 얘기가 맞아떨어졌을 수도 있다고, 그렇게 순진하게 생각하기엔 사영이 한재우를 알고 지낸 시간이 너무 길었다.

직접적으로 제보했든, 간접적으로 여론을 몰아갔든 사영은 이 난리에 한재우가 분명히 연관되어 있을 거라 확신했다. 한재우는 절대로 이런 기회를 썩힐 위인이 아니었다.

손가락 끝으로 테이블 위를 톡톡 치던 사영의 시선이 이번에는 휴대폰 옆에 놓인 작은 기계로 향했다. 한재우의 폭언을 수차례 녹음해 둔 녹음기였다. 사영의 눈동자가 어둡게 가라앉았다.

당장 터트리자면 못할 것도 없었다. 어떤 상황에서 어떤 식으로 공개하든 녹음된 내용은 분명 엄청난 파급력을 불러일으킬 것이다.

그러나 모든 목표가 한재우에게 고정되어 있던 때와 달리 지금 사영은 염두에 두어야 할 것들이 늘었다.

공개적으로 김유준과 깊게 엮여버린 이상 일을 진행할 때 그와 상의해야 하는 건 당연했고, 무엇보다 사영은 이제 복수 이후의 삶을 고려해야만 했다.

한재우를 끌어안고 벼랑으로 함께 떨어지는 건 더 이상 사영의 목표가 아니었다. 이 모든 일들이 끝난 후에도 사영은 여전히 연예계 활동을 해야만 했다.

단순히 ‘하고 싶은’ 욕구가 아니라 ‘해야만 하는’ 책임감이었다.

거듭 실망만 안겨 주었던 자신을 다시 믿어 주고 응원해 주는 팬들을 비롯해 처음부터 제게 너무 잘해 주었던 우종, 다시 자신을 받아 준 회사 등 보답하고 싶은 이들이 너무나도 많았다.

사영이 재우와 함께 다시 나락으로 빠진다면 그들 모두의 믿음을 또다시 배반하는 것이다. 그럴 순 없었다.

파급력을 떠나 영화 <하지>가 무사히 개봉하고 좋은 성적을 얻을 때까지는 진창 싸움을 하는 건 되도록 미루고 싶었다.

사영의 손이 작은 녹음기를 쥐고 의미 없이 만지작거렸다. 이 녹음본을 공개하는 건 나중에 될지라도 언제 어떤 상황이 닥칠지 알 수 없으니 준비는 미리미리 해두는 게 나았다.

그동안엔 유준에게도 모욕적인 언사가 담겨있는 녹음본을 유준과 공유하는 걸 망설여왔지만 이제는 정말 그에게 말할 때가 된 것 같았다.

한재우와 단둘이 만날 때마다 대화를 몰래 녹음해두었다는 걸 유준이 알게 된다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순간 그가 자신을 소름 끼치는 사람이라고 여기면 어쩌나 싶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 걱정은 곧바로 사영의 머릿속에서 사라졌다. 왠지 유준이라면 오히려 잘했다고 칭찬해 줄 것 같았다.

그리고 아마도, 한재우에게 이런 폭언을 들으며 홀로 견뎠을 자신을 안타깝다 여기겠지.

거기까지 생각이 닿자 순간적으로 애틋한 감정이 밀려왔다. 망설임 없이 윤사영 씨를 사랑한다고 고백하던 남자가 느끼게 될 자책과 아픔이 손에 잡힐 듯 선명하게 그려졌다.

사영은 유준의 감정을 이 정도로 강하게 확신하는 자신이 낯설었다. 사영 스스로 찾은 확신이 아니었다. 유준이 사영에게 보여 준 진심이 그만큼 확고했다는 뜻이다.

김유준 같은 사람이 나를 사랑할 일은 절대로 없을 거라고 생각해서 차라리 그에게 모든 치부를 밝히는 걸 선택했던 사영이다.

그런 사영에게 유준이라면 다른 무엇보다 제 마음을, 상처를 더 중요하게 여겨 보듬어줄 거라고 믿게 만들다니.

너무나도 강렬하고 선명해 도무지 모른 척할 수가 없었던 유준의 고백을 되새기며 사영은 어느새 휴대폰 화면에 띄운 유준의 연락처를 내려다보았다.

사영의 손가락 끝이 연락처에 적힌 유준의 이름 세 글자 위를 배회했다. 손끝을 타고 번지는 감정은 분명 그리움이었다.

불과 며칠 전에도 봤는데. 하루에도 몇 번씩 연락하고 있는데. 도대체 그리움이란 감정이 어느 틈에서 새어 나왔는지 알 수 없었다.

손끝으로 통화 버튼을 누른 사영은 휴대폰을 들어 귀에 가져다 댔다.

- 네, 사영 씨.

연결음이 몇 번 울리지도 않았는데 유준이 전화를 받았다. 고작해야 이름을 부른 것뿐인데 그 음성에는 너무나도 선명한 애정의 기운이 어려있었다.

머릿속이 복잡하고 혼란스럽다가도 이렇게 목소리를 들으면 어지러운 심사와는 달리 입가에 자연스럽게 미소가 어렸다.

마치 누가 보기라도 하는 양 서둘러 표정을 관리한 사영이 입을 열었다.

“유준 씨, 통화 가능하세요?”

- 물론이죠. 무슨 일 있어요?

“아니요, 그건 아니고… 혹시 오늘 저녁때 시간 있으신가 해서요.”

질문이 끝나자 잠시 정적이 흘렀다. 사영은 그 침묵 속에서 유준이 설렘과 기대감을 느끼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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