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복수하는 회귀자를 사랑하는 법-161화 (161/193)

#161

유준은 몇 번이나 심호흡을 했다. 그러고도 쉽게 진정이 안 되는지 주먹을 쥐었다 펴길 반복했다.

무슨 말을 하면 좋을지 쉽게 결심이 서지 않아 입술을 달싹이던 유준이 이내 입을 열었다.

“거절이라면 어차피 무시할 거니까 굳이 입 아프게 할 필요 없어요.”

사영은 대꾸하지 않고 그냥 은은하게 미소만 지었다. 그 얼굴이 희망을 말하는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해 유준은 도무지 그가 제게 들려줄 대답을 짐작하기 어려웠다.

괜히 헛된 기대를 하다가 또다시 거절하는 말을 들으면 조금 기운이 빠질 것 같았다. 그렇다고 포기할 생각은 없지만 유준도 사람이니 매번 타격받을 때마다 아무렇지 않을 순 없는 법이었다.

하지만 유준은 곧 생각을 고쳐먹었다. 지금 무엇보다 중요한 건 제가 들을 말보다 사영이 해내야 하는 일이었다. 유준은 다시 말을 덧붙였다.

“아니, 거절이든 뭐든 일단 다 들어 줄 테니까 아무튼 나한테 전화해요.”

“…….”

“한재우랑 무슨 일이 있든, 어떤 감정이 들었든, 내게 어떤 말이 하고 싶든 상관없이 무조건. 무조건 나한테 와요.”

“…네. 그럴게요.”

잠시 입술을 깨물었다 놓은 사영이 대답했다. 사영이 홀로 감당해야 할 아픔을 나눠 가질 수만 있다면 설령 자신을 아프게 할 말을 듣게 되더라도 기꺼이 감수하겠다는 남자의 마음이 귓가를 무겁게 울렸다.

“유준 씨한테 꼭 전화할게요.”

덕분에 사영은 복잡하고 어지러웠던 마음을 다스릴 수 있었다.

***

「오늘 밤, 집으로 갈게요」

재우는 벌써 몇 번째 같은 문자를 반복해서 보고 또 보았다. 사영에게 온 문자였다.

기나긴 기다림의 시간이었다. 영화의 성적이 안정권에 접어들고 사영이 생각을 정리할 때까지 기다리기로 약속했지만 하루에도 몇 번씩 당장 사영을 찾아가 언제까지 기다려야 하냐고 따지고 싶은 욕구를 느꼈다.

다른 것보다 가장 참기 힘들었던 건 혼자 초조하게 결과를 기다리는 동안 윤사영이 김유준 그 새끼와 시시덕거리는 걸 봐야 했다는 점이었다.

영화가 엄청나게 흥행한 데에다가 두 사람이 극 중에서도, 실제로도 연인이다 보니 둘을 함께 찾는 방송이 유독 많았다.

보통의 상황이었다면 영화를 함께 이끌어 가는 주축인 한재우까지 함께하는 스케줄이 많았겠지만 세 사람 간의 특수한 관계가 있다 보니 재우를 그들과 함께 캐스팅하는 경우는 드물었다.

재우 역시 몸값이 올랐으며 쇄도하는 광고와 방송 출연 요청으로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나날들을 보내긴 했다.

그러나 조금 과장해서 온 나라가 김유준과 윤사영의 연애에 대해 떠드는 꼴을 보는 게 쉽지는 않았다.

그런데 드디어, 사영에게 연락이 온 것이다. 단순히 만나자는 단 한 줄의 문장이었지만 재우는 그 안에 담긴 사영의 결심을 느낄 수 있었다.

“후….”

재우는 좀처럼 진정되지 않는 호흡을 정리하려 애쓰며 길게 숨을 내쉬었다. 자꾸만 입꼬리가 올라갔다.

오늘이 지나면 윤사영은 다시 제 사람이 될 것이다. 김유준이 아닌 한재우의 연인으로 사람들 앞에 서게 될 것이다.

당연히 세간의 눈총이 있겠지만 사영을 다시 제 것으로 만드는 데에서 오는 만족감에 비하면 그 정도는 감수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 사영이 결국 다시 자신을 선택했다는 걸 알게 되었을 때 김유준이 과연 어떤 표정을 지을지, 어떤 모욕감과 패배감을 느낄지 상상하면 참지 못할 일이 없을 것 같았다.

사영이 무슨 말을 하려고 만나자고 한 건지 아직 알 수 없는데도 재우는 그가 자신을 거절할 거란 가정은 조금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단시간에 털어 낼 수 있는 감정이었다면 그토록 오랫동안 사영이 제 옆에서 고통을 감내했을 리가 없었다.

거절할 거면 굳이 지금까지 시간을 끌 필요도 없었다. 재우가 고백했던 그때 단호하게 끊어 냈으면 될 일이다.

영화에 영향이 가는 걸 걱정한 걸 보면 다시 자신에게 돌아오려고 마음을 먹은 게 분명했다. 그러니까 안 좋은 여론이 일어 영화에 피해를 끼칠까 걱정한 거 아니겠느냔 말이다.

재우는 모처럼 여유로운 얼굴로 소파에 느긋하게 기댔다. 밤이 기다려졌다.

***

“형, 정말 괜찮겠어요?”

아무래도 마음이 놓이지 않는지 사영을 따라 내린 우종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두 사람은 막 한재우의 집 앞에 도착한 참이었다.

사영은 대답하기 전 길게 숨을 내쉬었다. 가뿐하게 괜찮다고 대답해 주고 싶었지만 아무렇지 않은 척을 할 수 있을 만큼 여유롭진 못했다. 사영은 긴장하고 있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솔직히 나도 긴장되긴 하는데….”

“형….”

“그래도 네가 여기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괜찮을 거야. 잘하고 올게.”

잔뜩 굳은 얼굴을 하고서도 안 하겠다는 말은 하지 않는 사영을 보며 우종은 한숨을 포옥 내쉬곤 고개를 끄덕였다.

“꼭 필요한 일이라고 하니까 말리진 않을게요. 대신 1시간 안에 안 나오면 경찰에 신고할 거니까 그런 줄 알아요.”

원래 약속은 사영이 1시간 안에 나오지 않으면 우종이 한재우 집으로 직접 찾아가는 거였다. 사영은 우종이 긴장을 풀어 주려 농담한 거라 생각해 작게 웃음을 터트렸지만 단순한 농담을 했다기엔 우종의 표정은 매우 비장했다.

“금방 나올게. 같이 와 줘서 고마워, 우종아.”

“고맙긴요. 당연히 제가 해야 하는 일인데.”

“스케줄도 아니고 내 사적인 일로 온 건데 당연한 건 아니지.”

“형이랑 제 사이에는 당연한 거예요.”

한 마디도 지지 않고 사영의 마음을 편하게 해 주려 노력하는 우종의 배려에 마음이 따뜻해졌다. 긴장으로 차갑게 식어 가던 손끝에 비로소 조금 피가 도는 것 같았다.

“그럼… 이따가 봐.”

“네, 형. 원하는 대로 속 시원하게 다 하고 오세요.”

우종은 사영이 한재우와 정확히 무슨 이야기를 나누려고 하는지 알지 못했다.

다만 한재우와 단둘이 만나는 건 아마도 오늘이 마지막일 거라던 사영의 말에서 길고도 질긴 인연에 종지부를 찍으려 하는구나 짐작했을 뿐이다.

만약 정말 그렇다면 사영에게는 의미 있는 날이 될 것이다. 영화 개봉 이후 전보다는 확실히 여론이 좋아졌지만 사영은 여전히 한재우와 관련된 추문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윤사영이 한재우에게 어떤 짓을 했는지, 그런 주제에 지금 얼마나 뻔뻔하게 또다시 한재우에게 상처를 주고 있는지, 마치 직접 보고 들은 양 집요하게 떠들어 대는 사람들이 아직도 많았다.

이런 상황에서 사영이 마음으로나마 한재우라는 존재를 완전히 끊어낼 수 있다면 우종은 한 시간이 아니라 열 시간이라도 이 자리에서 기다릴 수 있었다.

“다녀올게.”

한 번 더 심호흡을 한 사영이 마침내 몸을 돌려 내도록 그의 삶을 지배하고 있던 악몽을 향해 걸었다. 지겹도록 이어진 긴긴 꿈을 이제는 완전히 떨쳐 낼 차례였다.

***

사영은 현관 앞에서 잠시 걸음을 멈췄다. 반사적인 행동이었다.

숨이 막혔다. 자그마치 7년의 세월을 갇혀 살았던 곳이다. 바로 이 공간에서 사영은 철저히 길들고, 학대당하고, 망가지고, 끝끝내 버림받았다.

극복했다고 생각했던 것이 무색하게 거대한 두려움이 사영을 집어삼켰다. 이 안으로 한 발자국 들어서면 다시 밖으로 나갈 수 없을 것 같은 공포가 밀려들었다.

도망치고 싶었다. 복수고 뭐고 이대로 도망쳐 두 번 다시 한재우를 마주하고 싶지 않았다. 이 집의 모든 공간에 윤사영의 피눈물이 스며들어 있었다. 여기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집에는 오랜만에 오네.”

그 순간 뒷걸음질 치는 사영의 움직임을 막은 건 어울리지도 않는 다정함으로 말을 건넨 한재우였다.

그 자리에 우뚝 선 사영이 멍한 표정으로 한재우를 쳐다보았다. 재우는 지금 사영이 속으로 어떤 공포를 느끼는지 전혀 모르는 사람 같았다. 아니, 관심조차 없어 보였다.

내가 잘못했다고, 후회한다고, 다시 너와 함께하고 싶다고. 그렇게 말했으면서도 한재우는 사영이 가진 깊은 상처 따위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사영은 살짝 입술을 벌려 숨을 길게 내쉬었다. 두려움에 벌벌 떨리던 감정이 거짓말처럼 가라앉았다.

“…그러네요.”

사영은 뒤돌아 도망치는 대신 거실 쪽으로 걸음을 내디디며 차분하게 대답했다.

제게 남은 저주와도 같은 과거를 몰아내려 사영은 지금 자신이 두 발을 디디고 있는 현재를 떠올렸다.

지금도 사영을 걱정하며 밖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우종을, 소문만 믿고 자신에게 욕을 하는 사람들에게 제 일처럼 반박해 주고 사영의 편을 들어주는 팬들을.

그리고, 지금까지 사영을 믿어 주고, 지지해 주고, 급기야 진심을 담은 마음을 전해 주기까지 한 김유준을.

사영은 더 이상 혼자가 아니었다. 한재우가 세상의 전부였던 과거의 윤사영은 죽고 없었다.

재우를 따라 천천히 안쪽으로 걸어 들어온 사영은 차분한 시선으로 넓은 거실을 둘러보았다.

이곳에서 하염없이 한재우를 기다리며 홀로 눈물을 삼켰던 과거의 제 모습이 선명하게 그려졌지만 더는 두렵거나 도망치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다.

기억은 과거일 뿐이다. 사영은 이미 제 안에 깃든 망령을 뒤로한 채 미래를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그때, 사영이 어떤 감정을 느끼는지 짐작도 하지 못한 재우가 사영을 돌아보며 입을 열었다.

“잠깐 앉아 있어. 커피 줄게.”

“아니요. 필요 없어요.”

사영은 곧바로 대답했다. 한재우와 사이좋게 마주 보고 앉아 커피 따위를 마실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사영은 그저 하고 싶은 말을, 해야 하는 말을 빨리 건네고 돌아가고 싶었다.

차가운 사영의 말투에 재우가 눈썹을 살짝 일그러트렸다. 그제야 재우는 사영의 얼굴을 주의 깊게 바라보았다. 서늘하게 가라앉은 얼굴이 낯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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