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3
“너도 아직 나를 사랑하잖아. 사영아…. 나 때문에 김유준 그 새끼랑 연애한 거 다 알아. 다시… 다시 나한테 돌아오고 싶어서 그런 거잖아!”
한재우는 이런 상황에서도 한재우였다. 이 정도로 후회하고 흔들리면서도 그의 말에서는 단 하나의 진심도 느껴지지 않았다.
사영의 눈에 비친 한재우는 그저 윤사영에게 졌다는 걸 인정하기 싫어 발악하는 패배자 같았다.
그가 정말로 후회한다면. 정말로 사영에게 했던 짓을 후회하고 있다면 적어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무엇보다 온 마음을 다해 사과부터 해야 했다.
그래 봤자 너는 아직 나를 사랑하지 않느냐고 소리치는 게 아니라 사영이 얼마나 아팠을지, 힘들었을지, 그 시간을 견디며 얼마나 많은 눈물을 흘렸는지를 먼저 살펴야 했다.
한재우가 정말로 죄를 뉘우치고 참회했다고 해서 사영이 이제 와 흔들리는 일은 없었겠지만 마지막까지 뻔뻔하고 이기적인 모습을 보자니 이런 남자를 사랑하다 죽어 버린 생이 허탈했다.
그와 동시에 사영의 머릿속에 선명하게 떠오르는 사람이 있었다. 아니, 단순히 떠올랐다고 표현하는 건 맞지 않았다. 그리웠다. 보고 싶었다.
순식간에 자신을 잠식한 감정을 거부하지 않은 채 사영은 초라하고 한심한 한재우를 향해 입을 열었다.
“김유준 씨가 나한테 사과를 한 적이 있어요.”
“뭐?”
“당신에게 이용당하고, 가진 모든 걸 빼앗기고, 비참하게 살아왔다는 걸 알았을 때 유준 씨는 나한테 진심을 다해 사과했어요. 미안하다고.”
“…….”
“그 힘든 시간을 혼자 겪게 해서. 아무것도 해 주지 못해서 미안하다고.”
한재우는 멍청한 표정으로 사영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저를 볼 때는 무심하기만 했던 눈동자에 어느새 온기가 어려 있었다.
그것은 명백히 애정이었다. 사영의 그 눈빛을 누구보다 많이 받아 보았던 한재우는 알 수 있었다. 그런데 지금 사영은 김유준에 대해 이야기하며 그런 눈을 하고 있었다.
“한재우 씨 당신의 사과는… 적어도 그보다는 더 진실되고 절박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
사영은 제 손목을 붙들고 있는 한재우의 손목을 가볍게 뿌리쳤다. 재우는 아무런 반응도 할 수 없었다. 무엇이, 어디서부터 잘못된 건지 혼란스러웠다.
윤사영의 입에서 김유준을 사랑한다는 말을 들었을 때도 재우는 그 말을 온전히 믿지 않았다.
그런데 정작 사랑이란 단어는 입에 담지도 않은 이 순간에, 그저 사영의 눈빛을 본 것만으로도 강렬한 확신이 한재우를 강타했다.
윤사영은, 김유준을 사랑하고 있었다.
“이제 와 당신의 마음이 진심이라고 해도 필요 없어요.”
사영을 향해 너의 사랑 따위 내게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퍼붓던 독설이 아주 머나먼 길을 돌고 돌아 한재우에게 되돌아왔다.
“한재우 씨.”
홀가분해 보이지도, 통쾌해 보이지도 않는 담담한 얼굴을 한. 한재우를 사랑하지 않는 윤사영이 말했다.
“이제 내 인생에서 꺼져요.”
질기고 아팠던 사랑은, 그것으로 마지막이었다.
***
유준은 창백한 얼굴로 집 안을 이리저리 서성였다. 살면서 이렇게 초조했던 적이 있었나 싶었다. 온종일 이런 상태였다.
일할 때만큼은 무슨 일이 있어도 잡념을 깨끗이 비우고 일에만 집중하는 유준이었지만 오늘만큼은 그조차 쉽지 않았다.
간단한 지면 촬영이 아니었다면 그답지 않은 실수를 했을지도 몰랐다. 그 정도로 유준은 오늘 온 신경을 다른 곳에 빼앗겼다.
한재우와 사영이 만나기로 했다는 시간이 다가오자 감정은 더 날뛰기 시작했다. 아무리 우종이 앞에서 대기하기로 했다지만 재우의 집에서 단둘이 만나기로 한 것도 마음에 걸렸다.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는 건 이해했다. 하지만 머리로 이해하는 것과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건 다른 일이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차라리 내 집에서 만나라고 할걸.
말도 안 되는 생각을 떠올리며 유준은 아까부터 손에서 놓지 않고 있던 휴대폰을 다시 쳐다보았다. 그곳에는 조금 전 사영에게 받은 메시지가 떠 있었다.
「얘기 끝났어요」
「유준 씨 집으로 갈게요」
담담하게 적힌 메시지에서는 어떤 감정도 읽어 낼 수 없었다. 유준은 그저 한재우와의 이야기가 무사히 끝났다는 것만으로 일단 안심했다.
기다리는 동안 우종과 몇 번이나 통화했는지 모른다. 행여 중요한 순간을 방해하게 될까 봐 사영에게는 직접 전화하지 못하고 우종과 친한 친구라도 되는 것처럼 계속 연락을 주고받았다.
사영의 메시지를 받은 후, 그에게 전화할 수 있었지만 유준은 하지 않았다. 아니, 할 수 없었다는 것이 더 옳은 표현일 것이다.
사영과 자신이 대화할 차례가 되자 이번에는 사영의 안위를 걱정하던 것과는 다른 불안감이 순식간에 유준을 집어삼켰다.
한재우와 윤사영은 과연 어떤 대화를 나누었을까. 세세한 내용은 알 길이 없었지만 두 사람의 관계에 종말을 고하는 일이라는 건 확신할 수 있었다.
하지만 유준은 지금 자신에게 오고 있는 사영이 준비한 말이 무엇일지는 좀처럼 확신할 수 없었다. 지금 유준이 느끼는 불안함의 근원이었다.
사영이 자신에게 특별한 감정을 품었다는 건 이미 알고 있었다. 그게 사랑에 가까운 감정일 거라고 제법 자신 있게 말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설령 윤사영이 자신을 사랑한다고 해도 그게 사영이 자신을 받아 줄 거란 뜻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영은 얼마든지 김유준을 거부하고 자신의 마음을 외면할 수 있었다.
물러나지 않을 것이다. 사영에게 호언장담한 대로 그의 마음이 제게 있는 걸 아는 한 상처받은 가련한 사람처럼 나약하게 울며 돌아설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사랑하는 사람이 저를 밀어내는 경험을 유쾌하게 받아들일 수는 없는 일이었다.
“…뭐 얼마나 됐다고.”
연신 불안을 곱씹던 유준이 자조적인 목소리로 중얼거린 건 바로 그 순간이었다.
다 알고 시작한 마음이었고 절대로 먼저 지쳐 물러나는 일은 없을 거라고 큰소리친 사람은 자신이었다. 그런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사영의 반응 하나하나에 일희일비하는 자신이 참으로 우스웠다.
아닌 척하면서도 답을 주겠다는 사영의 말에 내심 기대했던 모양이다. 이번에야말로 사영이 자신을 받아 줄지도 모른다는 기대 말이다. 그러니 이토록 겁이 나는 거겠지.
“후….”
유준은 제 안의 쓸데없는 생각을 토해 내듯 깊은숨을 내쉬었다. 지금 유준이 걱정해야 할 사람은 자신이 아니라 사영이었다.
쓰레기 같은 한재우를 마주하느라 상처 입었을 사영의 마음을 다독여 주는 게 훨씬 더 중요했다.
설령 사영이 또 한 번 제 사랑을 거부한다고 해도 동요하지 않으리라. 태연하게 웃어 주고, 괜찮다고 말하고, 여전히 당신을 사랑한다고, 기다리겠다고, 그러니까 내게 기대라고 말해 줄 것이다.
유준이 다시 한번 제 안의 다짐을 되새겼을 때, 초인종이 울렸다.
***
두 사람은 잠시 말없이 서로를 쳐다보고만 있었다. 집 안의 공기가 팽팽하게 부풀어 올랐다. 사영의 눈가가 조금 발개진 것 같아 보여 유준은 입술을 깨물었다.
울었을까. 고통스러웠을까. 한재우 때문에 저물어야 했던 다른 생의 자신이 떠올라 서글펐을까. 마음이 찢어질 듯 아팠다.
한편으로는 대견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유준이 처음 사영을 만났을 때 그는 수동적이었고, 영혼이 메말라 있었다. 복수를 읊조리는 인형과 다를 바 없었다.
사랑에서 복수로 마음이 바뀌었을 뿐 윤사영의 인생은 여전히 한재우라는 사람으로 가득 차 있었다.
“윤사영 씨.”
유준은 조심스럽게 침묵을 깨고 그의 이름을 불렀다. 단순히 세 글자를 입에 담은 것뿐인데 감정이 널뛰었다.
그랬던 사람이 이제 새로운 삶을 개척하고, 과거를 이겨 내고, 아픔을 뒤로한 채 제 앞에 스스로 와 서 있었다.
“…수고했어요.”
그래서 유준은 가장 먼저 그렇게 말했다. 다른 무엇보다 그 말을 해 주고 싶었다. 모진 시간을 끝끝내 버텨내고 여기까지 온 사영을 다독여 주고 싶었다.
그 말에 마찬가지로 얼어 있던 몸을 움직이기 시작한 사영이 유준에게 한 걸음 한 걸음 다가오며 대답했다.
“내가 한재우한테 무슨 말을 했는지도 모르잖아요….”
“무슨 말을 어떻게 했든 윤사영 씨가 고생한 건 달라지지 않죠.”
“내가 한재우한테 다시 돌아가겠다고 말했다고 해도?”
유준은 가볍게 웃음을 터트리며 말했다.
“이제 와 다시 나를 시험하는 겁니까? 안 그랬을 거 아니까 이리 와요.”
유준은 사영의 걸음을 재촉했다. 유준이 먼저 다가갈 수도 있었으나 일부러 그러지 않았다. 사영이 온전히 스스로 제 앞까지 걸어와 주길 바랐다.
헛된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는 걸 알았다. 알면서도 고집을 부리고 싶었다. 이 순간이 유준에게도 그만큼 중요한 순간이라는 뜻이었다.
사영이 바로 앞까지 다가왔을 때, 유준은 그를 향해 두 팔을 벌리며 씨익 웃었다. 사영이 언제, 어떤 순간에도 믿고 의지할 수 있을 만큼 당당하고 자신만만한 얼굴이었다.
유준은 사영이 고민할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지만 사영은 단 한 순간도 걸음을 멈추지 않고 다가와 그대로 유준의 허리에 팔을 감으며 품에 안겨들었다.
불안하게 헤매던 두 심장이 서로의 진동에 속도를 맞췄다. 등을 단단히 안아 오는 유준의 힘을 느끼며 사영은 그 품에 얼굴을 묻었다.
유준의 다정한 체향이 사영을 포근하게 감싸 안았다. 그러자 한재우를 생각하고, 마주하고, 그와 대화를 나누며 몸에 쌓였던 독이 유준의 온기에 전부 다 밀려 나가는 것 같았다.
사영은 유준의 향이 자신을 가득 채우도록 그냥 내버려두었다. 기나긴 방랑의 길을 돌고 돌아 종착역에 도착한 기분이기도 했다.
“김유준 씨.”
목적도, 뚜렷한 이유도 없이 사영은 유준을 불렀다. 입 안에서 뱉어지는 발음이 좋았다. ‘네’ 하고 대답하는 유준의 낮은 목소리를 듣는 것도 기분을 들뜨게 했다.
사영은 곧바로 말을 잇지 않고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이곳으로 오는 동안에도 사영은 마지막에 마지막까지 과연 유준에게 대답을 돌려주는 게 맞는 건지 고민하고 또 고민했다.
이 선택이 훗날 또다시 비참함으로, 외로움으로, 상처로 되돌아오지 않을까 무서웠다. 딱 한 번만 더 용기를 내 보고 싶은 마음과 이대로 도망치고 싶은 마음이 수도 없이 부딪혔다.
하지만 유준의 품에 안긴 순간, 사영은 어떠한 확신이 제 가슴에 가득 차오르는 걸 느꼈다.
유준에게 말해야 했다. 지금이어야 하고, 이 대답이어야만 한다. 소중한 것을 지켜낼 노력조차 하지 못하고 빼앗기는 경험은 한 번이면 족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