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복수하는 회귀자를 사랑하는 법-164화 (164/193)

#164

사영은 유준의 품에서 조심스럽게 몸을 떼어 내고는 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예정된 고난에도 흔들리지 않고 올곧게 제게로 걸어와 준 남자의 애정이 바로 거기에 있었다. 사영이 말했다.

“유준 씨도 알겠지만 저는 최악의 사랑을 했고, 이미 실패해 본 사람이에요. 그 실패의 흔적이… 내도록 발목을 잡을 수도 있어요. 그래도 상관없어요?”

흔한 고백은 아니었다. 그러나 명백한 방향성을 가진 사영의 말에 유준이 표정이 아주 미미하게 일그러졌다 제자리를 찾았다.

거칠게 흔들리는 눈동자를 하고서도 유준은 시선을 피하지 않고 말했다.

“그 정도 각오도 안 하고 윤사영 씨를 사랑했을 것 같습니까?”

“…….”

불시에 유준의 입에서 나온 ‘사랑’이라는 단어에 사영이 입을 다물었다. 사영의 삶에서 사랑을 말했던 사람은 늘 자신이었다. 그래서 유준이 말하는 사랑이 사영은 낯설고 어렵기만 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속절없이 빠져드는 마음을 어찌할까.

두 번 다신 사랑 따윈 하지 않을 거라 다짐하고 또 해 보아도 내 사랑은 다를 거라 말하는 유준의 말을 믿고 싶어지는 마음을.

사영은 저도 모르게 손을 뻗어 유준의 옷자락을 쥐었다. 눈에 보일 만큼 덜덜 떨리는 사영의 두 손은 안쓰럽고 가련해 보였다. 울음처럼 사영이 말했다.

“나한테 약속해 줘요.”

“네. 뭐든지.”

“언젠가 나에 대한 마음이 변한다면 솔직하게 말해 주세요. 나한테 절대로 거짓말하지 말아요. 나를 더 이상 사랑하지 않아도, 다른 사랑하는 사람이 생겨도, 무슨 일이든 좋으니 다 말해 줘요.”

사영이 하는 말 하나하나가 화살처럼 유준의 심장을 아프게 찔렀다. 유준은 겨우 옷자락이나 붙들고 있는 사영의 떨리는 두 손을 꼭 감싸 쥐었다. 그리고 불안한 눈동자를 똑바로 마주 보고 대답했다.

“그럴 리는 없겠지만 네. 약속할게요. 뭐가 되었든 윤사영 씨한테 절대로 거짓말 안 합니다.”

사영은 숨도 쉬지 않고 곧바로 말을 쏟아부었다.

“나를 혼자, 혼자 외롭게 하지 말아요.”

“아마 내가 너무 안 떨어지려고 해서 귀찮게 될걸요.”

“내가 실수해도, 마음에 들지 않는 행동을 해도 윽박지르거나 욕하지 말아요. 나한테… 제발 나한테 욕하지 말아요.”

사영은 필사적이었다. 마치 내가 이렇게 막무가내로 굴어도 정말 나와 함께할 거냐고 묻는 것 같았다.

기실, 사영이 내건 조건은 연인 사이에서 당연히 지켜야 하는 일임에도 말이다.

유준은 잡은 손을 조심스럽게 끌어당겨 사영과의 거리를 줄인 뒤 한쪽 손을 들어 사영의 눈가와 뺨을 조심스럽게 쓸어 주었다.

이렇게 닿아 있는데도 애가 탔다. 할 수만 있다면 사영이 가진 아픈 기억을 전부 제 것으로 가져오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가 없으니까. 있었던 일을 없던 것으로 만들 수도, 기억을 지울 수도, 가져올 수도 없으니까. 그래서 김유준은 윤사영을 있는 힘껏 사랑하기로 했다. 유준이 대답했다.

“마음껏 실수해요. 내 마음에 들지 안 들지 그런 건 생각하지 말고 마음대로 행동해요. 나 역시 어떤 날은 실수할 수도 있고, 사영 씨를 속상하게 하는 날도 오겠지. 하지만 맹세할게요.”

“…….”

“윤사영 씨를 춥고 외롭게 두지 않을 겁니다. 혼자 아프게 만들지 않을게요. 나는 절대로 당신을 배신하지 않아. 그러니까, 사영아.”

사영아, 하고 그의 이름을 부르는 유준의 목소리는 어느새 한없이 연약해져 있었다.

실패는 염두에 두지도 않는 사람처럼 자신만만한 척했지만 사실 누구보다 불안하고 초조한 사람은 유준이었다.

누구도 미래를 확신할 수 없는 불안한 삶에서 사랑의 영원을 맹세하는 일이란 얼마나 부질없고 초라한가.

또한 그걸 알면서도 영원을 맹세하고 싶을 만큼 간절히 원하는 상대를 만나는 일은 또 얼마나 위대하고도 아름다운가.

유준은 눈물이 가득 차오른 사영의 얼굴을 두 손으로 조심스럽게 감싸며 말했다.

“제발… 제발 한 번만 나를 믿어 줘.”

유준의 손등을 타고 눈물방울이 떨어졌다. 사영은 젖은 뺨으로 유준이 얼마나 떨고 있는지를 적나라하게 느꼈다.

아무것도 아닌 자신의 마음을, 얻어 봤자 이득 될 거 하나 없는 윤사영의 사랑을 이토록 갈구하는 김유준의 진심이 어느새 사영의 온몸과 마음을 가득 채웠다.

그래서 결국 사영은.

“나는… 나는….”

말뿐인 맹세는 거짓과 하나 다를 바가 없다는 걸 삶 하나를 희생하여 깨달았던 윤사영은.

“사랑합니다, 윤사영 씨.”

또다시 같은 아픔을 반복해서 겪을 수 있다는 위험을 감수하고서라도 눈앞의 이 남자를 믿어 보고 싶어서. 결국 그만큼의 마음을 품게 되어 버려서.

“…사랑해요, 유준 씨.”

어떤 미래가 있을지 모른다는 두려움 속에서도 결코 막을 수 없었던 애정이 터져 나왔다. 사영은 제 목을 강하게 끌어당겨 거칠게 입술을 부딪쳐 오는 유준을 느끼며 눈을 감았다.

입 안을 파고드는 살덩이는 천 년이라도 능히 타오를 것처럼 뜨거웠다. 마침내, 새로운 삶의 첫사랑이었다.

***

“미친….”

아침 일찍 잠에서 깬 유준은 제 품에 안겨 곤히 잠들어 있는 얼굴을 보고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조금만 고개를 숙이면 입술이 닿을 수도 있을 만큼 가까운 거리에 윤사영이 있었다.

동시에 지난밤 있었던 일들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제발 나를 한 번만 믿어 달라고 애원하다시피 매달린 기억 역시 또렷했다.

보통의 경우라면 민망하고 부끄럽다는 생각이 먼저 들 것이다. 하지만 유준은 달랐다. 오히려 다시 생각해도 본인이 매우 잘했다는 뿌듯함만 들었다.

그렇게 매달린 결과, 유준은 결국 지금 눈앞에 있는 이 사랑스러운 남자의 사랑을 얻게 되었으니 말이다.

유준의 입술이 사영의 이마 위에 짧게 머물렀다. 그러자 사영이 몸을 살짝 뒤척이며 유준의 품으로 더 깊이 파고들었다. 뭐라 말할 수 없는 희열이 폭죽처럼 터졌다.

절절했던 고백과 깊고도 애틋한 키스가 이어졌던 것치곤 그 후로 이어진 두 사람의 밤은 다소 허무하게 마무리가 되었다.

한재우를 상대하고 곧장 유준에게 달려와 또 한 번 격렬한 감정의 동요를 느낀 사영이 거의 탈진하다시피 했던 탓이다.

완전히 지친 사영은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유준의 집에서 하룻밤 신세를 지게 되었으나 거기까지였다.

안색이 창백해져서 당장 기절이라도 할 것 같은 몰골의 사영을 두고 유준은 차마 다른 생각을 할 수 없었다.

한 가지 위안이라면 사영이 자신과 한 침대에서 자는 걸 마다하지 않고 오히려 품으로 파고들었다는 점이었다. 천하의 김유준이 이런 걸로 기뻐하다니 남들이 보면 까무러칠 일이었다.

심지어 윤사영은 유준의 옷을 입고 있었다. 아이를 달래듯 사영의 등을 다독여 주던 유준이 피식 웃으며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이 꼴이 새어 나가면 김유준 고자설이 사실이 되겠네.”

하지만 그렇게 말하는 유준의 얼굴은 조금도 불편한 기색이 아니었다. 유준은 오히려 이 경험이 몹시도 새롭고 흥미로웠다.

유준의 일생에서 함께 몸을 섞지도 않을 상대와 침대에서 이렇게 많은 시간을 보낸 건 처음이었다.

누군가와 그저 가슴을 마주 대고 함께 잠들고 일어나는 게 이렇게 행복하고 만족스럽다는 것도 처음 알았다. 중요한 건 행위가 아니라 함께하는 사람이 누구냐였다.

유준은 진심으로 사영과 함께할 수 있다면 무엇이든 좋았고, 심지어 그 사영이 ‘김유준을 사랑하는 윤사영’이라면 팥으로 메주를 쑤느라 밤을 새워도 좋을 것 같았다.

늦게 배운 도둑질에 날 새는 줄 모른다더니 지금 유준이 딱 그 짝이었다. 예전이었다면 유치하고 멍청하다고 비웃었을 감정들이 전부 다 신기하고 좋기만 했다.

이번에는 유준의 입술이 사영의 눈가에 닿았다. 쪽, 소리가 나게 여러 번 입을 맞추는 행동에는 거침이 없었다.

사실 유준은 오늘 아침 일찍 스케줄이 있었고, 사영 역시 점심때쯤 일이 있다고 했으니 집에 들렀다 가려면 일어나야 할 시간이긴 했다.

유준의 입술이 사영의 뺨을 타고 내려와 입가에 다다랐다. 유준은 사탕을 핥듯 혀를 내밀어 사영의 입술 위를 할짝대기 시작했다.

“으음….”

사영은 그제야 살짝 인상을 찌푸리며 작게 신음을 흘렸다. 유준은 아랑곳하지 않고 사영의 아랫입술을 부드럽게 머금으며 속삭였다.

“윤사영 씨, 일어나요.”

“으응….”

“잠 깨는 거 도와줄까요?”

그리곤 사영이 정신을 차리고 뭐라 반응하기도 전에 신음을 흘리느라 살짝 벌어진 사영의 입술 사이로 혀를 그대로 밀어 넣었다.

갑작스러운 침입에 사영이 눈을 뜨고 반사적으로 몸을 물렸지만 이미 늦었다. 사영의 허리를 꽉 끌어안은 유준은 오히려 고개를 틀어 더 깊숙이 파고들며 사영의 입 안을 핥기 시작했다.

막 잠에서 깬 사영의 안쪽 살은 따뜻하고 부드러웠다. 혀끝을 세워 천장을 훑자 품에 갇힌 사영의 몸이 바르르 떨리는 게 느껴졌다.

힘이 잔뜩 들어간 사영의 두 팔은 유준을 밀어 내지도, 그렇다고 마주 끌어안지도 못하고 어정쩡하게 주먹을 꽉 쥔 채 얼어 있었는데 그마저도 귀엽기가 그지없었다.

유준은 한 손을 움직여 주먹 쥔 사영의 한쪽 손을 풀어내곤 그대로 손가락을 얽어 깍지를 꼈다. 손가락 사이사이로 스치는 부드러운 살결의 감각이 온몸을 저릿하게 만들었다.

몸에서 이는 열기가 전신을 가득 채웠을 무렵이 되어서야 유준은 정말 내키지 않는다는 듯 간신히 사영의 입술을 놓아주었다.

그리곤 숨을 헐떡이며 멍하니 눈을 깜빡거리는 사영을 향해 웃으며 말했다.

“잘 잤어요?”

“네? 네. 아, 네….”

“이제 잠 좀 깨죠?”

“아… 네, 네….”

고장이라도 난 것처럼 반응하는 사영의 대답은 유준의 미소를 한층 더 깊어지게 만들었다. 헝클어진 사영의 머리카락을 다정하게 쓸어 넘겨주며 유준이 말을 이었다.

“어제 일… 기억납니까?”

“어제 일이요…?”

“네. 어제 우리 사이에 있었던 일이요.”

술을 마신 것도 아니고 사영이 기억하지 못할 리는 당연히 없겠지만 그래도 유준은 물었다. 그냥 그의 입으로 한 번 더 확답을 듣고 싶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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