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복수하는 회귀자를 사랑하는 법-165화 (165/193)

#165

‘어제 일…’ 하고 다시 한번 그 말을 곱씹던 사영의 얼굴이 일순 붉어졌다. 사영은 곧바로 유준의 시선을 피해 고개를 숙이고 몸을 웅크렸다. 하지만 대답을 회피하진 않았다.

“…네. 기억나요.”

“다행이네요. 사실 나는 잘 기억이 안 나거든.”

이어진 유준의 대답은 사영이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말이었다. 당황한 사영이 금세 다시 시선을 들어 유준을 쳐다보았다.

사영의 눈동자에 장난스러운 미소를 가득 머금은 유준의 얼굴이 비쳤다. 그 표정에 사영이 본능적으로 안심하는 사이, 유준이 말을 이었다.

“그래서… 어제 윤사영 씨가 뭐라고 했는지 다시 한번 말해 줬으면 좋겠는데.”

사영은 입술을 삐죽였다. 찰나였지만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던 게 억울했다.

“…저도 기억 안 나는데요.”

“방금 기억난다면서요.”

“아니요. 안 나요.”

단단히 삐진 듯한 목소리가 여간 잔망스러운 게 아니었다. 윤사영과 자신이 이렇게 편하고 친밀한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다는 게 우스꽝스럽게도 또 좋기만 해서 유준의 얼굴에선 미소가 떠나질 않았다.

“그러지 말고 다시 말해 줘요.”

“왜 사람을 놀라게 해요?”

“알았어요. 내가 잘못했으니까… 응? 빨리.”

잘못했다고 말하면서도 유준은 주눅 든 기색 하나 없이 사영을 조금 더 당겨 안고선 코끝을 비벼 왔다. 사영은 상상도 하지 못한 간질거리는 스킨십에 가슴이 찌르르 울렸다.

외면하고 있던 마음 하나를 인정했을 뿐인데 하루아침에 세상이 뒤바뀐 기분이었다. 연기를 시작하고, 한재우를 극복했을 때와는 또 다른 희열이었다.

만약 끝끝내 두려움을 극복하지 못해 이 마음을 받아들이지 않았다면 영영 이런 기분은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그걸 상상하니 등골이 다 오싹했다.

“빨리 다시 말해 봐, 사영아.”

유준이 이번에는 사영의 귓가에 입술을 가까이 가져다 대며 속삭였다. 어떻게 하면 철없이 조르는 것 같은 말을 이렇게 야하게 할 수 있는지 모를 일이다.

생경한 감각에 어깨를 살짝 떤 사영이 결국 유준의 뜻대로 입을 열었다.

“…사랑한다고 했어요.”

“누구를?”

“…제가, 김유준 씨를 사랑한다고요.”

유준이 졸라서 할 수 없이 하는 것 같은 상황이 되어 버렸지만 사영은 그 고백을 다시 입에 담으며 제 마음이 다시금 행복으로 가득 차는 걸 느꼈다.

사영의 대답을 들은 유준은 전기에 감전이라도 된 듯 몸을 떨더니 그대로 대답을 돌려주었다.

“알고 있겠지만… 나도 사랑합니다, 윤사영 씨.”

사영은 유준의 품으로 숨듯이 고개를 더 파묻었다. 눈을 뜨자마자 서로를 끌어안고 이런 대화를 나누고 있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이토록 따뜻하고 행복한 아침이 있을 수 있다는 것도.

그걸 깨닫자 꼴사납게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사영은 서둘러 마음을 가라앉히며 다시 입을 열었다.

“유준 씨 오늘 일찍 나가야 한다고 하지 않았어요…?”

“네. 그런데 지금 고민 중이에요.”

“무슨 고민이요?”

“그냥 땡땡이치고 윤사영 씨랑 하루 종일 이렇게 뒹굴까 하는 고민.”

그 뻔뻔한 소리에 허, 하고 헛웃음을 터트린 사영이 오히려 냉큼 유준을 밀어 내며 몸을 일으켰다. 그리곤 허망하고 아쉬운 표정의 유준을 내려 보며 가볍게 웃은 뒤 말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고 얼른 일어나요.”

유준은 바로 일어나지 않고 사영의 손을 잡고 만지작거리며 간지러운 장난을 걸었다. 정말로 일을 빼먹을 생각은 없었지만 이 순간을 조금 더 즐기고 싶은 건 사실이었다.

부드러운 눈빛으로 사영을 올려다보며 유준이 다시 말했다.

“내 촬영이 먼저 끝날 것 같으니까 사영 씨 보러 촬영장 놀러 갈게요.”

“피곤한데 뭐 하러 그래요. 먼저 집에 와서 쉬어요.”

“뭐 하러 그러냐니. 애인 일하는 곳에 놀러 가지도 못해요?”

“아니 그….”

“이제 정식 애인이니까 그동안 참았던 거 다 해야지. 두고 봐요.”

유준의 목소리는 소풍을 앞둔 어린아이처럼 들떠 있었다. 정식 애인이라는 말이 귀엽고, 유치해서 또 웃음이 났다.

사영이 느끼기엔 계약 연애를 할 때도 딱히 못 했던 일은 없었던 거 같은데 뭘 더 하고 싶어서 저렇게 신이 났나 싶다. 유준이 말을 이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지금 윤사영 씨랑 하는 게 첫 연애거든?”

“아….”

“하나에서부터 열까지 하고 싶은 게 참 많단 말이죠.”

첫 연애라는 말이 사영의 심장을 들쑤셨다. 김유준이라면 당연히 연애 경험도 많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자신이 그의 첫 연애 상대라니.

첫사랑, 첫 연애 같은 풋풋함에 의미를 둘 나이는 이미 한참 전에 지났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그 말을 들으니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게 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결혼과 이혼까지 한 마당에 나도 서로 진심을 나누는 연애는 처음이라고 하는 건 조금 양심이 없는 것 같아 굳이 말하진 않았어도 서로의 첫 번째라는 게 마냥 좋았다.

사영은 제 손을 조몰락거리는 유준의 손길에 맞춰 손가락을 움직이며 물었다.

“뭐가 그렇게 하고 싶었는데요?”

유준은 눈동자를 반짝이며 대답했다.

“두고 봐요. 기대해도 좋을 겁니다.”

지금 서로를 사랑한다고 해도 먼 미래에는 반드시 불행해질 거라는 생각에 유준을 밀어냈던 사영은 이제 진심으로, 유준과 함께할 그 모든 날이 기다려졌다.

***

김유준이랑 윤사영이랑 반지 맞췄나봐

둘이 악세사리 고르는 거 본 사람들이 있다는데?? 혹시 결혼하나? 결혼하기엔 너무 이르지? 걍 커플링 맞춘 건가 아 존나 설레발치게 된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카메라 이런 거 없었고 걍 사적으로 갔다온 것 같다는데... 물론 반지가 아닐수도 있긴 하겠지만 반지였음 좋겠다 ㅋㅋㅋㅋㅋ 근데 걍 다른 거 선물해 줬어도 좋을 것 같긴 함

하지 보고 존나 과몰입해서 무준단우는 말할 것도 없고 본체 망붕질까지 할뻔했는데 본체들이 이미 연애질하고 있어서 존나행복 ㅋㅋㅋ 이래서 커플덕질 하는구나 처음 깨달았다

존나 비싸고 예쁜 커플링 끼고 인증하는 날까지 나 오늘부터 숨참는다 시작

└ 결혼은 ㅈㄴ 오바인것 같긴 한데 그래도 거기까지 간 거면 뭘 사긴 샀것지? 개조아

└ 내가 망붕인데 망붕이 사실은 공식이라니 이게 무슨 말이오

└ 약혼이라도 먼저 갈겨 시발 ㅠㅠ

└ 반지 했으면 진짜 비싸고 좋은 거 했겠지? 궁금하다..... 김유준은 애인한테 얼마짜리 선물해 주려나

└ 이렇게 유난 떠는 커플치고 오래가는 애들을 못봄 그리고 윤사영같은 애들은 절대 안바뀜 딱 보면 알아 김유준도 머지않아 이용당하고 가스라이팅 당하고 버려질듯?

└└ 야 너는 진짜 못됐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

└└ 냅둬 요즘 쟤네 걍 미쳐 가지고 김유준 윤사영 글마다 저럼 ㅉㅉ

└└ ㅇㅇ 윤사영 지금 개잘나가니까 그 꼴 못 견뎌가지고 단체정병상태임 2차가해프레임도 안 통하고 이제 ㅋㅋㅋㅋㅋ

└ 둘이 작품 또 같이 해 줬으면 좋겠는데 이제 안 하겠지?ㅠㅠ 둘이 사겨서 아쉬운 거 딱 그거 하나야 사귀는 거 때매 오히려 같이 뭐 안 할까봐..... 저 케미 썩히지말지ㅠㅠ

└└ 야나두

***

- 도대체 한재우 그 새끼 요즘 진짜 왜 그 지랄이야!

휴대폰 너머의 남자가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상대는 재우의 소속사 대표였다. 거실에서 통화를 하던 은성은 혹시라도 방에 있는 재우가 듣기라도 할까 황급히 현관까지 달려 나왔다.

집에 들어올 때 이미 만취 상태였던 한재우는 그대로 곯아떨어진 것 같았으나 안심할 수는 없었다. 아무리 대표라고 해도 이렇게 욕하는 걸 재우가 직접 들으면 난리가 날 것이다.

“그게 요즘… 대표님도 아시잖아요, 상황이 좀 그런 거….”

- 상황이 뭐! 도대체 뭐가… 설마 윤사영 연애 때문에 그러는 거야 걔?!

은성은 차마 그렇다고 대답하지 못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너머에서 ‘참 나…’하고 어이없이 중얼거리는 대표의 목소리가 들렸다.

대표가 이렇게 노발대발하는 건 오늘 있었던 재우의 광고 촬영장에서 벌어진 일 때문이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재우는 며칠 전부터 그야말로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처럼 예민하게 굴었다.

밤에 윤사영과 만나기로 했다고, 이제야 일이 제대로 흘러갈 모양이라고 모처럼 기분이 좋아졌던 날 이후 갑자기 이렇게 변한 걸 보니 윤사영과 무슨 일이 있었던 게 분명했다.

정확히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물어볼 정도로 담이 크지는 못했지만 말이다.

문제는 그날부터 한재우가 은성에게 화풀이하는 것으로도 모자라 어떤 자리에 가서도 감정을 좀처럼 컨트롤하지 못했다는 데에 있었다.

개인 스태프들에게 틈만 나면 꼬투리를 잡고 화를 내는 건 차라리 양반이었다.

촬영장에서 일하는 중에도 재우는 조금만 제 감정이 상하면 나를 무시하는 거냐고 목소리를 높이고 성질을 부렸다. 감독이든 동료 배우든 상대를 가리지 않았다.

오늘만 해도 그랬다. 함께 촬영하는 신인 배우가 있었는데 도대체 뭐가 그렇게 마음에 들지 않은 건지 재우는 사사건건 시비를 걸고 짜증을 냈다. 누가 봐도 이유 없이 화풀이하는 모양새였다.

위험을 무릅쓰고 은성이 몇 번이나 말려 보았지만 소용없었다. 남들 앞에서는 소름 끼칠 정도로 철저하게 이미지를 관리하던 사람이 맞는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한재우의 태도는 급기야 촬영에 방해가 될 정도로 심해졌고 참다못한 감독이 나서서 한 소리 하는 사태가 벌어지고 말았다.

문제는 감독을 상대로도 한재우가 성질을 죽이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결국 촬영장은 분위기가 엉망진창이 되었고 평소 대표와 친분이 있던 감독이 직접 대표에게 전화해 따진 모양이었다.

- 아니! 누가 억지로 이혼시킨 것도 아니고 걔도 윤사영이랑 살기 싫어했잖아! 이혼하자마자 바로 김유준이랑 만나서 속이야 좀 쓰릴 순 있겠지만 그렇다고 하루아침에 이렇게 돌아 버리는 게 말이 돼? 뭐 딴 이유 있는 거 아니야?!

“…그냥 이리저리 말들이 많으니까 스트레스가 많은 모양이에요.”

은성은 고개를 숙이며 한숨 쉬듯 대답했다. 대표는 재우가 사영을 탐탁지 않게 여긴다는 걸 알고 있는 몇 안 되는 사람 중 하나였지만 이혼 이후 달라진 재우의 감정에 대해서는 알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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