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6
하나 도움 될 게 없는 은성의 대답에 대표는 좀처럼 열이 가라앉지 않는지 숨을 씩씩거렸다. 비단 오늘의 일만이 문제가 아니었다. 최근 연예계에는 부쩍 한재우의 태도에 관한 뒷말이 나오고 있었다.
그간 워낙에 평판 관리를 잘해 왔고 윤사영과 관련된 특수한 상황이 있다 보니 아직은 큰 문제가 될 정돈 아니었지만 한재우가 계속 이런 식이라면 머지않아 문제가 생길 수도 있었다.
- 연예인 똑바로 관리해라, 은성아. 알겠냐?
겨우 감정을 가라앉힌 대표가 경고하듯 말했다. 결국 만만한 사람은 매니저였다.
대표님도 한재우 성격 뻔히 아시면서 제가 무슨 힘이 있다고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은성은 그렇게 말하고 싶었다. 대표님도 어쩌지 못하는 사람을 저보고 어떻게 하라고요! 하고 소리를 지르고 싶었다.
한재우가 제 기분이 좋지 않으면 은성에게 폭언을 서슴지 않는다는 사실을 대표도 알고 있었다. 알면서도 모르는 척을 하고 있을 뿐이다. 지금 나는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는 핑계로 말이다.
한재우가 밖에서 문제없이 행실할 수 있다면 은성이 받는 화풀이 따위는 아무래도 상관없을 것이다.
아니, 오히려 은성에게 더 적극적으로 화를 내길 바라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기분을 풀면 중요한 현장에서는 문제를 일으키지 않을 테니 말이다.
한재우가 윤사영에게 화를 내고 나면 제게는 덜 화를 낼 거라고 은성이 내심 안심했던 것처럼. 그래서 윤사영에게 가해지는 학대를 은성이 알면서도 모른 척했던 것처럼.
“…네. 알겠습니다.”
결국 은성은 어떠한 반항도 하지 못하고 얌전히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을’이 고를 수 있는 선택지는 애초에 정해져 있었다.
제가 잘못한 것도 아닌데 잘못했다고 굽신거리며 통화를 마친 은성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돌려 재우가 잠들어 있을 방을 쳐다보았다.
“최은성…!”
그때, 잠든 줄 알았던 재우가 은성을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화들짝 놀란 은성이 재빨리 방으로 달려갔다.
재우는 아직 술이 다 깨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는 건 제정신일 때보다 몇 배로 더 조심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부르셨습니까, 형님.”
언제 일어난 건지 재우는 침대 끝에 걸터앉아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은성은 복잡한 머릿속을 의식적으로 비우며 깍듯이 대답했다. 지금부터는 정말로 조심히 행동해야 했다.
“내가… 내가 생각을 해 봤는데 말이야….”
고개를 숙인 채로 재우가 입을 열었다. 그가 입을 열 때마다 방 안의 술 냄새가 더 짙어지는 것 같았다. 재우가 이렇게까지 술에 취했던 게 언제인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은성아… 이대로 물러나는 건 너무 자존심이 상해, 내가. 윤사영 그 새끼한테 내가 어떻게….”
‘윤사영’이라는 이름을 입 밖으로 내는 순간 재우는 흐릿하던 정신이 또렷해지는 것 같은 감각을 느꼈다. ‘그날’ 이후 좀처럼 갈무리하지 못한 분노가 다시금 전신을 가득 채웠다.
아니, 그건 분노가 아니었다. 윤사영에게 끝을 선고받은 후 한재우가 느낀 감정은 오히려 슬픔에 더 가까웠다. 절망이었다.
정말로 윤사영을 잃었다는, 다시는 되돌릴 수 없다는 끔찍한 상실감이 한재우를 전부 집어삼켜 정신을 차릴 수 없도록 만들었다.
무명일 때 느꼈던 패배감이나 좌절과는 달랐다. 애초에 가져 본 적이 없는 것과 제 손에 온전히 쥐고 있다가 놓쳐 버린 대상에 대한 감정이 같을 수는 없었다.
재우는 인정할 수 없었다. 윤사영 따위로 인해 이런 깊고도 막막한 슬픔과 절망을 느끼고 있다는 걸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그래서 한재우는 자신이 느끼는 감정을 단지 분노라고 여기기로 했다. 지금 자신이 이렇게까지 괴로운 건 자존심에 너무 큰 타격을 입었기 때문이라고 합리화했다.
단순히 화가 난 것뿐이라면 사영에게 되갚아 주면 그만이지만 이게 슬픔이라면, 후회라면, 자신의 지난날에 대한 회의라면 그 감정은 어떻게 해도 되돌릴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한재우는 그걸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건방진 게 감히… 감히 날 우롱해…? 어디 그 잘난 김유준이 언제까지 너를 사랑해 주는지 보자, 씨발….”
그래서 재우는 결심했다.
“은성아, 잘 들어.”
복수를 하기로.
“윤사영? 줘도 안 가져, 이제. 무릎 꿇고 빌어도 받아 줄 것 같아?”
사실은 그의 앞에서 빌고 싶은 생각이 간절했다. 그 발등을 핥아서라도 용서받고 싶었다. 그의 마음을 되돌리고 싶었다.
사랑한다고 속삭이는 윤사영의 얼굴이 그리워 가슴이 미어지는 것만 같았다. 한재우로서는 절대로 인정할 수 없는 마음이었다.
한재우는 이미 윤사영을 한번 제 앞에 굴복시켰다. 이제 와 패배를 인정한다는 건 용납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니까 최은성 너는 내가 시키는 대로 잘해. 알겠어?”
위험하게 눈빛을 빛내며 재우가 은성에게 제 계획을 말했다. 그걸 듣는 은성의 표정이 파랗게 질렸지만 이미 자신만의 세계에 잠식된 재우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사영의 죽음 이전에도, 이후에도 한재우에게는 여러 번의 기회가 있었다.
어떤 기회는 사영의 사랑을 한재우가 오래도록 가질 수 있도록 했을 거고, 어떤 기회는 사영에게 진심으로 용서를 구해 제 이름과 명예를 진창에 처박지 않을 수 있도록 만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한재우는 그 무수히 많은 기회 중 어떤 것도 선택하지 않았다. 노력조차 하지 않았다.
한재우는 늘 제 잘못을 외면했고, 모든 게 윤사영 탓이라 핑계만 댔다. 저 자신을 똑바로 마주하지 않았고, 제 마음 깊은 곳에 도사린 진실된 감정이 무엇이었는지조차 들여다보지 않았다.
모든 건 결국 한재우 그 자신의 선택이었으니 결과 역시 전부 한재우가 감당해야 했다. 그렇게 될 것이다. 한재우는 기억하지 못하는 이전 삶에서도, 그리고 지금도.
***
“뭐, 뭐야…?”
우종이 미리 집 앞에 댄 차에 타기 위해 문을 연 사영은 안에서 난데없이 나타난 얼굴을 보고 놀라 저도 모르게 말을 내뱉었다.
그런 사영의 반응에 만족스러운 미소를 짓고 있는 남자는 유준이었다. 그는 우아한 몸짓으로 다리를 꼬며 말했다.
“이제 그냥 편하게 반말하려고?”
“아, 아니요, 그게, 그게 아니라…!”
사영이 수습하려 서둘러 입을 열었지만 당황한 탓에 제대로 말이 이어지질 않았다. 크게 웃음을 터트린 유준이 제 옆자리를 툭툭 치면서 입을 열었다.
“일단 타요. 일하러 가야지.”
“유준 씨가 여길 왜… 왜 여기 있어요…?”
유준의 말대로 차에 올라타면서도 사영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우지 못한 채로 더듬거리며 말했다.
갈피를 잡지 못하고 흔들리는 시선이 해답을 구하듯 운전석에 앉은 우종을 보았지만 우종은 룸미러를 통해 슬쩍 뒤를 쳐다보며 웃을 뿐이다.
영문 모를 얼굴로 어정쩡하게 차에 올라탄 사영을 의자에 앉히고 안전벨트를 매 준 뒤 그가 원하는 답을 내어 준 사람은 이번에도 유준이었다.
“나 오늘 쉬는 날이라고 했잖아요.”
“그런데 왜….”
“그래서 내가 오늘 하루 윤사영 씨 특별 매니저 노릇 해 주려고 왔지.”
“매, 매니저요…?”
유준이 고개를 끄덕이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사영은 이해할 수 없다는 듯한 표정으로 유준을 보며 말했다.
“모처럼 휴일인데 쉬어야지 왜, 왜….”
“왜는 왜야. 애인이 바빠서 얼굴 보기 힘드니까 이렇게라도 데이트해야지.”
“아….”
뻔뻔하게 이어진 유준의 말에 사영이 슬쩍 앞에 있는 우종의 눈치를 보았다. 다 아는 사이라고 하지만 사영은 여전히 남들 앞에서 하는 애정행각이 익숙하지 않았다.
우종은 능숙한 매니저답게 아무것도 모르는 척 운전에만 집중했다. 사영의 시선을 따라 마찬가지로 우종을 슬쩍 쳐다본 유준은 이내 손을 뻗어 사영의 손을 조심스럽게 잡았다.
엄지손가락이 사영의 손가락 마디마디를 부드럽게 문질렀다. 그 느낌이 낯설어 오싹한 기분이 들면서도 싫지 않아 사영은 손을 빼지 않고 괜히 눈동자만 이리저리 굴렸다.
유준은 사영의 왼쪽 네 번째 손가락을 만지작거리며 입을 열었다.
“우리 반지 맞춘 것 같다는 기사 뜬 거 봤어요?”
“…네.”
“반지 낀 사진이 같이 떴으면 더 임팩트 있고 좋았을 텐데.”
그렇게 말하는 유준의 목소리에는 장난기가 가득했다. 두 사람은 얼마 전 커플링을 맞추고 왔다. 유준이 강력하게 밀어붙인 일이었다.
굳이 비밀스럽게 진행할 필요가 없는 일이라 대놓고 다녔다. 먼저 소문이 돌았다 해도 크게 상관은 없었다.
유준의 아쉬움은 사실 빨리 같은 디자인의 반지를 나눠 끼고 싶은 마음에서 비롯된 일종의 투정이었다.
그 말을 들은 사영의 시선이 유준이 만지작거리는 손가락에 닿았다.
오랫동안 결혼반지를 끼고 있었던 탓에 반지를 뺀 후에도 옅은 흔적이 남아 있던 손가락에는 이제 지난날의 흔적이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
불현듯 유준과 함께 반지를 고르며 느꼈던 생경한 감각이 떠올랐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사영에게는 마냥 설레고 즐겁기만 할 수는 없는 시간이었다.
한재우와 커플링을, 결혼반지를 고르던 때 사영은 세상 누구보다 행복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미련하게도 그 행복이 영원에 가깝게 지속될 거라고 믿었다.
유준과 반지를 보고 디자인을 고르는 시간은 사영에게 그 시절을 떠올리게 했다. 통제할 수 없는 불안이 밀려온 건 당연한 일이었다.
오늘의 이 행복이 과연 언제까지 갈까. 혹시 나는 그때처럼 또, 미련하고 멍청한 행동을 반복하고 있는 건 아닐까. 그러지 않으려고 아무리 애를 써도 마음 한구석 의심이 피어올랐다.
“…빨리 반지 왔으면 좋겠다.”
잠시 말없이 생각에 잠겨 있던 사영이 가만히 중얼거리며 고개를 돌려 유준을 바라보았다. 유준은 사영이 먼저 그런 말을 할 거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는지 조금 놀란 얼굴을 했다.
사영은 그런 유준을 향해 부드럽게 웃어 주며 유준의 손을 꼭 마주 잡았다.
같은 불행이 다시 나를 집어삼킬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밀려올 때마다 사영을 붙들어 준 건 바로 유준이었다.
마치 사영이 어떤 두려움을 느끼는지 알고 있다는 듯, 유준은 사영이 흔들릴 때마다 손을 잡아주고 누가 보든 상관없이 사영을 당겨 안고 다독여 주었다.
말로 약속을 상기시켜 줄 필요도 없었다. 닿아 오는 온기와 다정한 시선만으로도 사영은 빠르게 안정을 찾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