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복수하는 회귀자를 사랑하는 법-167화 (167/193)

#167

감정이 벅차오르는 얼굴로 사영의 시선을 받아 내던 유준이 곧 장난스러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꼴사납게 눈물이 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요즘 유준은 사영과 있으면 시도 때도 없이 울고 싶었다. 정말 어디가 고장 나도 단단히 고장 난 것 같았다.

그렇지 않다면 신인상을 비롯해 각종 시상식에서 큰 상을 탈 때조차도 눈물을 보인 적이 없어 팬들로 하여금 언젠가 꼭 감동의 눈물을 흘리는 걸 보고 말겠다는 다짐을 하게 만드는 유준이 이럴 리가 없었다.

고작 연애 따위에 눈물 콧물 질질 짜는 사람들을 보면 한심하다고 비웃었는데 그 업보를 제대로 받는 것 같았다.

“나중에 같이 반지 끼고 사진 찍어서 어디 큰 건물에 걸어 버릴까?”

“…무슨 소리예요, 그게.”

“자랑하고 싶은데.”

“비싼 반지라서요?”

사영의 악의 없는 공격에 유준이 허, 하고 바람 빠지는 소리를 냈다. 아무리 연애 쪽으로는 둔한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이렇게 눈치 없는 소리를 할 줄은 몰랐다.

“그게 비싸긴 뭐가 비쌉니까?”

절반쯤은 진심으로, 절반쯤은 장난으로 유준은 서운한 표정을 지으며 삐죽 대답했다. 사영은 아마도 ‘그럼 왜 자랑해요?’라고 되물을 거라 예상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사영은 그런 유준을 귀엽다는 듯 쳐다보며 말했다.

“자랑은 내가 해야죠. 김유준 씨 같은 잘난 애인을 얻었는데.”

“……?”

“왜 그렇게 쳐다보세요? 저도 농담할 줄 아는 사람이에요.”

한 마디 한 마디 이어지는 말마다 놀랍지 않은 게 없었다. 설마 지금 윤사영이 나를 놀려먹은 건 아니겠지, 하고 현실을 외면하던 유준의 입이 벌어졌다.

사영의 입에서 ‘잘난 애인’이라는 단어가 나왔다는 것과 사영이 제게 이렇게 시답잖은 농담을 해왔다는 사실과 심지어 그걸 가지고 유준을 놀리기까지 했다는 사실 중 무엇에 가장 놀라야 하는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유준은 얼마 지나지 않아 이다음에 해야 할 행동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그때까지도 사영의 손가락을 매만지고 있던 유준의 손이 곧 사영의 손목을 붙들고서는 힘주어 제게로 당겼다. 사영의 몸이 자연스럽게 유준에게로 기울어졌다.

“나한테 장난도 치고. 다 컸네요, 윤사영 씨.”

“…유준 씨한테 많이 배웠거든요.”

마지막까지 한 마디도 지지 않는 사영의 대답이 유준의 얼굴에 미소를 만들어 냈다. 서로의 입술이 끈적하게 부딪힌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

“헉…!!”

은성은 소스라치게 놀라며 눈을 뜨고 몸을 벌떡 일으켰다. 눈앞이 깜깜했다. 뭐가 어떻게 된 건지 바로 파악이 되지 않았다. 밭은 숨을 몰아쉬며 은성은 혼란스러운 정신을 수습하려 애썼다.

조금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은성은 자신이 자다가 깼다는 걸 깨달았다. 갑자기 깬 이유가 악몽 때문이라는 것도.

“후….”

절로 깊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눈이 서서히 어둠에 적응하기 시작하자 방 안의 풍경이 어렴풋이 보이기 시작했다. 동시에 제가 꾸었던 꿈 역시 기억났다.

꿈에서 은성은 윤사영을 만났다. 그가 나오는 꿈을 꾼 건 꽤 오랜만이었다.

사영이 한재우에게 어떤 대우를 받으며 사는지 알게 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은성은 자주 그가 나오는 꿈을 꾸곤 했다.

아마도 죄책감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때, 은성은 지금보다 어렸고 경험도 부족한 매니저였다.

한재우의 매니저 역할을 하는 것만으로도 벅찬 상황에서 원했든 원하지 않았든 윤사영을 학대하는 일에 동조하게 되었으니 아무렇지 않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은성의 꿈속에서 윤사영은 때때로 화를 내기도 했고, 어떤 날은 도와 달라고 빌기도 했다. 그러면 은성은 미안하다고, 나도 어쩔 수가 없다고 변명하다가 식은땀을 흘리며 깨어나곤 했다.

하지만 사람은 적응의 동물이고 죄책감이나 미안함 같은 감정에도 적응하기 마련이었다.

은성은 서서히 사영의 괴로움을 모른 척 외면하는 데에 익숙해졌고 어떤 날은 한재우의 폭언이 자신이 아닌 그를 향한 것에 안심하기도 했다.

어느 순간부터 은성은 더 이상 꿈에서 윤사영을 보지 않았다.

“…….”

그런데 오늘, 은성은 아주 오랜만에 꿈에서 사영을 보았다. 그는 전처럼 은성에게 화를 내지도, 빌지도 않았다. 그저 가라앉은 눈동자로 말없이 한참 동안 은성을 바라보기만 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꿈은 그간 꾼 어떤 꿈보다도 은성을 괴롭게 했다. 마치 내가 말로 하지 않아도 네 죄는 네가 이미 다 알고 있지 않냐고 묻는 듯한 시선이었다.

오늘 꿈에서 만난 사영은 피해자가 아닌 심판자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는 너 따위에게는 동정조차 받지 않겠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은성은 두 손을 들어 땀으로 젖은 제 얼굴을 쓸어내렸다. 꿈이라는 걸 아는데도 안도감이 밀려오지는 않았다.

오히려 마음은 더 불안하고 찝찝했다. 꿈에서 깨어났지만 현실의 일은 무엇 하나 해결된 게 없었던 탓이다.

‘윤사영은 절대로 행복해질 수 없어.’

미친 사람처럼 눈동자를 번뜩이며 중얼거리던 한재우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가 자신에게 내리던 지시 사항도 귓가에 선명하게 맴돌았다.

한재우가 윤사영과 이혼하게 된 이후 더는 이런 일은 하지 않아도 될 줄 알았는데. 자신도 이제는 이 오래된 죄책감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한재우는 여전히 윤사영을 놓아줄 생각이 없어 보였고 자신 역시 그 일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만약 당시에 자신이 행동했다면. 어쩔 수 없다는 핑계를 대는 대신 옳은 일을 하기 위해 노력했다면. 그랬다면 이 질긴 인연에서 벗어날 수 있었을까.

윤사영은 물론이고 최은성 그 자신의 삶도 더 나아질 수 있었을까.

숨이 막혔다. 억울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내가 무슨 잘못을 했다고. 나도 어차피 시키는 대로 할 수밖에 없던, 철저한 ‘을’일 뿐이었는데 내가 뭘 어떻게 더 할 수 있었다고. 그런 마음이 드는 것도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런 핑계를 대 봤자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다. 비참한 기분은 오히려 더 심해졌다. 얼굴에서 손을 뗀 은성이 제 두 손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몇 년 전으로 돌아간 것 같았다. 한재우에게 처음으로 윤사영에 대한 안 좋은 여론을 만드는 걸 도우라는 명령을 받았던 그때로 말이다.

이번에도 은성은 그 시절과 다를 바 없는 선택을 내릴 수 있었다. 핑계는 언제나 존재했다. 은성에게는 여전히 책임져야 하는 가족이 있었다. 이번에도 자신은 그저 시키는 대로 할 뿐이다.

이건 내가 계획한 일이 아니고, 나쁜 건 한재우지 자신이 아니라는 허울 좋은 핑계 뒤에 숨어 아무것도 몰랐다고 변명할 수 있었다. 은성의 떨리는 두 손이 이불을 꽉 움켜쥐었다.

은성 씨 역시 그런 대우를 받아서는 안 된다고 말해 주던 윤사영의 얼굴이 자꾸만 떠올라서.

그 밤이 다 가도록 은성은 그 어떤 그럴듯한 핑계 뒤에서도 다시 잠들 수가 없었다.

***

“최은성…?”

일과를 마치고 잘 준비를 하던 사영은 휴대폰 화면에 뜬 이름을 보고 인상을 찌푸렸다.

자정을 넘은 새벽이었다. 갑자기 울린 휴대폰 벨 소리를 듣고 당연히 유준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최은성이라니, 상상도 못 한 이름이었다.

“이 시간에 왜….”

최은성은 이제 사영에게 연락할 일이 없는 사람이었다. 하물며 이 시간에는 더더욱 그랬다.

본능적인 의심이 사영의 머릿속을 스쳤다. 한재우가 시켜서 연락한 게 분명했다. 그게 아니고서야 은성이 제게 연락할 일이 없었다.

제대로 마지막을 고하고 온 뒤 한재우는 종종 사영에게 전화를 해 왔지만 사영은 한 번도 그의 연락을 받지 않았다. 메시지도 전부 무시했다.

윤사영은 더 이상 한재우와 나눌 말이 없었다. 사영이 고민하는 건 한재우에게 처벌을 더 가할지 말지를 결정하는 일뿐이었다.

사영이 무너지고 힘들었던 만큼 되갚아 주려면 아직 멀었다. 실제로 한재우는 전보다 평판이 조금 나빠진 걸 제외하면 아무것도 잃지 않았다.

유준과 사영이 워낙에 독보적인 인기를 끌고 있어서 스스로 만족스럽지는 못하겠지만 영화가 잘되면서 한재우가 얻은 이익 역시 적지 않았다. 한재우는 더 잃고, 더 나락으로 떨어져야 했다.

사영이 다음 단계를 망설이고 있는 건 이제 와 마음이 약해졌다거나 하는 이유 때문은 아니었다.

다만 사영은 지금이 너무 좋아서. 지금 유준과 함께하는 평화로운 일상이 너무 행복하고 소중해서 한재우 따위 때문에 이 안온함을 망치고 싶지 않을 뿐이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최은성의 연락이라니. 사영은 잠시 그 이름을 내려다보며 생각에 잠겼다.

이대로 한재우와의 모든 악연을 끊을 생각이라면 굳이 이 연락을 받을 필요는 없을 것이다.

한재우라는 존재를 자신의 삶에서 완전히 지우고, 더 행복한 삶을 살기 위해 노력하면 그만이었다. 그것 역시 나쁘지 않은 결말이라는 걸 사영도 알았다.

하지만 사영의 기억 속에는 여전히 한겨울 속에 갇힌 삶 하나가 남아 있었다.

앞으로 사영이 단 하나의 불행도 더 겪지 않고 행복한 날들을 보낸다고 해도 그날 죽어 버린 가련한 삶을 돌이킬 순 없었다.

그렇다면 그 죽음을 딛고 살아나 행복을 되찾은 자신은 적어도 죽은 윤사영의 복수만큼은 제대로 해 주어야 하는 거 아닐까.

한재우가 또 무슨 수작을 부리려고 은성을 통해 연락을 한 건지 알 수 없으나 그가 먼저 무언가 행동하기 시작했다면 늘 그랬듯 사영에게도 기회일 수 있었다.

거기까지 생각을 마친 사영은 끈질기게 울리는 전화를 받았다.

“네, 최은성 씨. 무슨 일이시….”

- 지금 시간이 없으니 일단 제 말을 들어 주세요.

그러나 휴대폰 너머에서 들려온 은성의 목소리는 사영이 예상한 것과는 전혀 달랐다. 그는 누구에게 쫓기듯 매우 다급해 보였다. 들키면 안 되는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목소리까지 낮춘 채였다.

이건 또 무슨 새로운 수작인가 싶어 사영이 다시 말을 건네려는데 그보다 빠르게 은성이 말을 쏟아 냈다.

- 형님이 지금 집 앞으로 갈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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