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01
컷 소리와 함께 촬영장이 소란스러워졌다. 오늘의 마지막 신이었다. 사영은 연신 ‘수고하셨습니다’, ‘조심히 들어가세요’를 외치며 감독님, 스태프와 인사를 나누었다.
현재 사영은 복귀 후 처음으로 드라마를 촬영 중이었다. 대중이 예상치 못한 노선이었다.
<하지>에 이어 찍은 차기작도 영화였던지라 사영이 이대로 영화판에 자리 잡을 거라 예상한 이들이 많았다. 그 때문에 드라마 캐스팅이 발표되었을 때 꽤 크게 이슈가 됐었다.
하지만 당연한 선택이다. 사영은 드라마로 데뷔했고, 그로 인해 이름을 알리며 큰 사랑을 받았다.
좋은 작품을 만날 때까지 기다렸던 것뿐이지, 영화만 하겠다는 생각은 한 적이 없었다. 드라마를 좋아하는 팬들에게 좋은 작품으로 보답하고 싶단 생각은 줄곧 하고 있었다.
캐스팅 발표 후 인터뷰에서 사영의 이런 생각을 알게 된 팬들, 특히 데뷔 작품을 좋아하는 팬들은 엄청나게 감동할 수밖에 없었다.
드라마 촬영 현장은 영화와 비교해 더없이 열악했고,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할 정도로 바쁜 일정이 이어졌지만 사영은 그것조차 좋았다.
제 잘못으로 사라진 시간을 보상받는 기분이기도 했다. 또한 사영은 이 작품이 오래전 윤사영이라는 배우를 응원해 준 팬들에게도 위안이 되었으면 했다.
사영이 그렇게 새삼 감회에 젖어 촬영장을 잠시 둘러보고 있으려니 마지막 신을 함께 촬영했던 배우 신해인이 다가와 말을 걸었다.
“와, 자정 전에 촬영 끝나는 게 얼마 만인지 모르겠네.”
“그러게요. 오늘 고생 많았어요. 힘들었죠, 선배.”
사영은 서둘러 상념을 거두고 상냥하게 인사를 건넸다. 마지막 촬영 장면에서 오열하는 연기를 펼쳤던 탓에 해인의 눈가는 아직도 발갛게 물들어 있었다.
이번 드라마 <수난>은 사건이 중심이 되는 미스터리 장르물이었다.
사영은 이 같은 현대 배경 장르물을 찍어 본 적이 없어 원 톱 주인공을 맡아서 작품을 잘 이끌어 갈 수 있을지 고민이 많았다.
그때 사영의 결정에 큰 영향을 미친 게 바로 신해인이었다. 해인은 꾸준히 장르물을 찍어 오며 내공을 쌓은, 때때로 주연보다 더 빛나는 조연으로 명성이 자자한 배우였다.
사영은 개인적으로 그런 해인의 팬이기도 했는데 그가 주인공 다음으로 비중 있는 역에 캐스팅되었다는 소식에 더 고민하지 않고 역을 수락했다.
실력이 출중하고 사영보다 경력도 긴 해인이 함께 극을 이끌어 준다면 확실히 의지가 되면서도 배울 수 있는 게 많을 거라는 판단이었다.
실제로 해인은 감탄을 금치 못할 연기를 이어 갔다. 해인과 연기 합을 맞추는 게 즐거워 사영은 고단한 일정에도 촬영장에 가는 길이 늘 설레고 기대됐다.
늘 변함없이 예의 바르고 사랑스러운 태도로 촬영장 분위기를 좋게 만드는 일등 공신인 사영의 염려를 받은 해인이 얼굴 가득 시원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힘들긴, 뭘. 요즘은 밥을 안 먹어도 배가 안 고파.”
“저도 그렇긴 해요.”
농담 반 진담 반인 해인의 말에 사영 역시 밝게 웃으며 대답했다.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아마 두 사람뿐 아니라 감독을 비롯해 모든 배우와 스태프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드라마 <수난>은 첫 방송부터 올해 최고의 첫방 시청률을 기록하더니 매 회차 시청률을 큰 폭으로 경신했다.
단순히 시청률이 높은 것만이 아니라 화제성도 압도적이라 방송이 끝나면 온갖 SNS의 실시간 검색어를 장악할 정도였다.
빠른 속도로 드라마 팬덤이 생기면서 각종 이벤트와 엄청난 규모의 서포트가 쏟아졌다. 일반인들이 드라마를 실시간으로 리뷰하는 영상까지도 큰 인기를 끌었다.
극 중 사영이 걸친 옷, 신발, 모자 등등은 방송이 끝나기가 무섭게 품절 현상을 겪었으며, 대형 OTT 플랫폼에 드라마가 서비스되면서 해외 팬의 규모 역시 기하급수적으로 늘고 있었다.
사영이 맡은 주인공 ‘이재현’은 작은 체구로도 거칠고 예민한 기질을 가진, 지금껏 사영이 보여 주었던 모습과는 전혀 다른 캐릭터였다.
윤사영은 연약하고 눈물 바람을 일으키는 캐릭터가 아니면 매력을 보여 줄 수 없는 배우라고 혹평하던 이들이 입을 싹 다문 건 당연한 일이었다.
평소 모습에서는 상상하기 힘든 역을 일말의 위화감도 없이 소화해 낸 사영의 연기를 두고 어떤 평론가는 ‘윤사영의 재발견’이라는 칼럼을 쓰기도 했다.
드라마가 잘된 건 좋은 각본과 연출, 연기의 삼박자가 잘 맞아떨어진 결과이기도 하겠지만 해인은 그 중심에서 말도 안 되는 연기력을 보여 주는 주인공, 윤사영의 힘이 가장 크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드라마를 이끌어 가는 주연 배우가 현장에서 앞장서 좋은 분위기를 만들고 있으니 도무지 예뻐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해인은 요즘 어딜 가나 입에 침이 마르도록 사영을 칭찬하느라 바빴다.
자연스럽게 사영과 나란히 대기실 쪽으로 걸어가며 해인이 말을 이었다.
“내 오랜 팬들이 요즘 윤사영을 인생의 은인으로 삼겠다고 난리야.”
“아, 선배. 제발 농담이라도 그런 이야기 절대, 절대 하지 마세요. 선배야말로 제 은인이죠. 선배 아니었으면 이 작품 할 용기를 아예 못 냈을지도 몰라요.”
사영은 기겁하는 표정으로 두 손을 저었다. 해인이 이런 말을 한 게 처음도 아닌데 매번 이런 반응을 보이는 게 귀여워서 더 장난을 치게 된다는 건 아마 끝까지 모를 것이다.
해인의 말 자체는 농담이 아니었다. 그간 해인은 믿고 보는 배우 이미지가 강하긴 했어도 딱히 열정적인 팬들이 많다거나 흥행 배우의 이미지는 아니었다.
그런데 이 드라마를 통해 충성도가 높은 팬의 수가 빠르게 늘었고, 덕분에 인기뿐만 아니라 들어오는 시나리오의 급이 달라졌다.
주로 비중 있는 주·조연 역을 맡아 왔는데 최근엔 주인공 역을 제안하는 시나리오를 부쩍 받기 시작한 것이다. 해인이나 팬들이나 그야말로 연일 즐거운 비명을 지르는 중이었다.
“있는 사실도 얘길 못 하나?”
“선배, 제발요.”
사영은 거의 울 듯한 얼굴로 사정했다. 단순히 가벼운 농담으로 치부하기엔 해인은 이미 몇몇 인터뷰에서 거의 사영을 칭송하다시피 한 전적이 있었다. 들어도 들어도 적응이 안 됐다.
그제야 ‘알았어, 알았어’ 하고 웃으며 사영을 다독여 준 해인이 다시 입을 열었다.
“모처럼 자정 전에 끝났는데 간단하게 뭐라도 먹고 들어갈까?”
그리고 해인의 제안에 사영이 다소 곤란한 표정으로 막 대답하려는 순간, 거절의 목소리는 전혀 다른 곳에서 흘러나왔다.
“죄송해요, 선배. 윤사영 씨는 오늘 선약이 있어서.”
귀에 익은 목소리에 두 사람의 시선이 한곳으로 향했다. 거기엔 훤칠한 외형을 뽐내며 성큼성큼 걸어오는 우아한 미남자가 있었다.
“와, 이게 누구야. 그렇게 대단하다던 윤사영 씨 애인 아니세요?”
먼저 아는 척을 한 건 해인이었다. 유준과 해인은 이전에 같은 작품을 한 적이 있었다. 따로 연락하며 가깝게 지내는 사이는 아니었으나 마주치면 어색한 사이도 아니었다.
유준이 가볍게 묵례하며 해인의 농담을 받았다.
“네, 제가 바로 그 윤사영 씨의 애인입니다. 소문대로 잘났죠?”
해인은 웃음을 터트렸고 사이에서 얼떨떨한 표정을 짓고 있는 건 사영뿐이었다. 둘이 오늘 만나기로 한 건 사실이지만 이렇게 촬영장으로 찾아올 줄은 몰랐던 거다.
“유준 씨, 여긴 어떻게….”
“왜 이렇게 놀라요? 내가 못 올 데라도 왔어요?”
“아, 아니 그건 아니지만….”
사영은 연신 눈을 깜빡이면서 유준의 얼굴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유준이 촬영장에 오는 게 처음 있는 일도 아닌데 사영은 여전히 이토록 갑작스럽게 유준을 마주할 때면 현실감이 없어 멍한 기분이 들었다.
말 그대로 ‘이 남자가 내 남자라니’ 하는 감상이었다.
그런 사영의 반응을 사랑스럽게 바라보던 유준이 해인을 향해 다시 말했다.
“그럼 저 먼저 윤사영 씨 좀 데리고 가도 될까요? 식사는 다음에 저도 같이 해요.”
“그럼요, 그럼요. 당연히 데리고 가셔야죠. 사영아, 조심해서 들어가고 내일 보자.”
“네? 아! 네, 선배. 오늘 고생하셨어요. 조심해서 들어가세요!”
정신을 차린 사영이 해인에게 허리를 굽혀 인사했다. 그리고 사영의 허리가 채 다 펴지기도 전에, 유준이 사영의 허리를 낚아채 끌어안다시피 이끌었다.
“어떻게 내가 촬영장에 나타날 때마다 이렇게 놀라요?”
사영의 귓가에 고개를 기울이며 유준이 속삭였다. 매번 이렇게 놀라는 게 너무 귀엽고 사랑스러워 깜짝 등장 하는 걸 멈출 수가 없었다.
그제야 자연스러움을 되찾은 사영이 입술을 장난스럽게 삐죽이며 대답했다.
“그러게, 누가 그렇게 멋있게 등장하래요? 내 애인이 어떻게 저렇게 잘났나 싶어서 매번 깜짝깜짝 놀란다고요.”
갑자기 솔직하게 찔러 오는 대답에 유준의 표정이 굳었다. 그러곤 굳은 표정 그대로 입을 열었다.
“조용히 해요.”
“…….”
“진짜 여기서 키스해 버리고 싶으니까.”
세트장을 완전히 빠져나와 차에 탈 때까지 사영은 얌전히 입을 다물고 조용히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