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03
본능적으로 일어난 유준의 페로몬이 사영의 향과 얽혀 서로의 성기를 자극했다. 진심으로 서로를 사랑하는 알파와 오메가의 페로몬은 이 순간만을 기다렸다는 듯 서로에게 엉겨 붙었다.
“씨발… 씨발, 윤사영….”
연이은 욕설조차도 끈적하게 사영의 귓가에 들러붙었다. 사영은 두려워 몸을 움츠리는 대신 숨을 참았다. 욕이 야하게 들릴 수도 있다는 것 역시 사영은 유준을 만나고 처음 알았다.
사랑하는 사람이 제게 욕하는 게 싫어서 사랑을 고백하는 순간에 제발 내게 욕하지 말라고 약속을 얻어 냈을 정도였건만, 이제 사영은 유준의 욕을 들으면 아랫배가 조여들었다.
이렇게 서로를 애무하고 자극하는 상황이 아니면 유준은 절대로 사영에게 욕을 흘리지 않았는데 그 탓에 오히려 욕설을 일종의 성적 제스처로 받아들이도록 훈련된 기분이었다.
“유준 씨….”
“안 돼. 내 이름 부르지 마…. 제발. 가만히 있어.”
상황과 어울리지 않게 유준이 애원했다. 고개를 천천히 숙여 사영의 어깨에 이마를 대고 숨을 고르는 유준은 고통스러워 보였다.
사영은 저도 모르게 피워 냈던 페로몬을 갈무리하려 애쓰며 유준의 부탁대로 미동도 하지 않고 가만히 기다렸다. 귓가와 목, 어깨로 뜨거운 숨이 하염없이 쏟아졌다.
유준의 옷자락을 쥔 사영의 손에도 힘이 들어갔다. 유준이 어째서 이토록 고통스러워하는지 아는 사영으로서는 언제 흥분했냐는 듯 참담한 기분이었다.
“…후, 미안. 내가 너무 흥분했어요. 적당히 멈췄어야 했는데….”
한참 만에 겨우 입을 연 유준이 건넨 말은 사과였다. 사영은 울 것 같은 얼굴을 했다.
사과는 자신이 해야 하는데. 유준은 자신을 위해 많은 것을 참고 있는데. 그런데도 사영을 원망하거나 탓하기는커녕 미안하다고 말하는 유준이 가진 마음의 깊이를 가늠조차 할 수 없었다.
“케이크도 다 망가졌겠네. 다음에 다시 사 줄게요.”
유준은 흥분 따위 이미 다 사라진 사람처럼 가벼운 얼굴로 바닥에 떨어진 케이크 상자를 집어 들었다. 사영은 그런 유준을 가만히 쳐다보기만 했다.
사실은 하나도 괜찮지 않다는 걸 사영은 알았다. 열감이 그대로 남아 있는 얼굴과 이마에 맺힌 땀, 당장이라도 사영을 덮칠 듯 넘실거리는 그의 페로몬과 양감이 뚜렷하게 느껴지는 아래까지.
어디 하나 지금 유준이 느끼는 욕구를 드러내지 않는 곳이 없었다.
“들어가서 얼른 쉬어요. 오늘도 고생했고… 집에 도착해서 연락할게요.”
그런데도 유준은 사영의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추곤 미련 하나 남지 않았다는 듯 말하는 것이다.
사영은 숨을 헐떡였다. 지금 느끼는 감정을 뭐라고 형용하면 좋을지 알 수 없었다.
서로가 흥분했음이 명백한데도 유준이 아무렇지 않은 척 돌아가려는 것도, 시도 때도 없이 사영의 집에 머물려고 갖은 핑계를 대던 그가 더 이상 사영의 집에서 자려 하지 않는 것도.
전부 같은 이유 때문이었다. 유준은 사영이 트라우마를 이겨 내고 진심으로 유준과의 잠자리를 원할 때까지 기다리는 중이었다.
사영은 성관계와 관련해서 심각한 트라우마를 가지고 있었다. 사영이 겪은 일을 감안하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사영은 스스로 그것을 명확히 인지하지 못했다.
김유준이니까. 서로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이니까. 유준은 절대로 사영을 아프게 하지 않을 거라는 걸 믿으니까.
사영은 진심으로 자신이 괜찮다고 생각했다. 유준과의 잠자리에 엄청난 거부감을 느끼지도 않았고, 어떤 날은 유준과 나누는 스킨십에 흥분해 그와 자고 싶다고 생각한 적도 여러 번이었다.
그래서 제대로 된 연애를 시작한 후 유준이 자신을 침대에 조심스럽게 눕혔을 때 기꺼이 반기며 그를 끌어안았다.
먼저 이상함을 느낀 건 늘 그랬듯 유준이었다. 사영이 적극적으로 애무를 받아들이고, 다리를 벌리고, 심지어 아래를 적시는 와중에도 유준은 무엇인지 모를 이질감을 느꼈다.
사영이 신음을 흘리고 허리를 들썩이며 유준이 주는 자극에 호응할수록 무언가 잘못됐다는 걸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그러면서도 자극적인 사영의 페로몬에 취해 머리끝까지 차오른 흥분을 어쩌지 못하고 사영의 젖은 구멍을 벌려 성기를 밀어 넣으려던 순간.
유준은 머리에서 발끝까지 차가운 물을 뒤집어쓴 것과 같은 강렬한 충격에 모든 움직임을 멈췄다.
사영이 떨고 있었다. 성적 자극으로 고조된 육체적 반응에 감추어진 두려움이 여전히 그곳에 있었다.
과거의 폭력이, 오로지 폭력으로만 물들었던 수많은 밤이, 그 아픔과 공포가 기회를 살피듯 웅크린 채 사영의 깊은 곳에 도사렸다. 유준은 그걸 느꼈다.
유준은 즉시 모든 행위를 중단하고 발가벗은 사영의 몸을 이불로 감싼 채 조심스럽게 품에 끌어안았다.
사영은 영문 모를 얼굴을 했으나 유준이 지금 이 행위는 끝났다는 듯 등을 다독여 주었을 땐 울음을 터트렸다.
갑자기 쏟아지는 눈물에 사영은 당황했다. 울고 싶다는 생각은 전혀 없었다. 멈추고 싶지도 않았고 온통 유준에게 안기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런데 유준이 멈췄다는 걸 깨닫는 순간 안도감이 밀려들었다. 자신이 이 행위를 이토록 두려워하고 있다는 걸 사영도 그때 처음 알았다.
유준이라면 다 괜찮을 줄 알았다. 실제로 관계를 맺었어도 사영은 좋았다고 여겼을 것이다. 몇 번이나 유준에게 안기고, 안아 달라고 졸랐을 거다.
그리고 언제일지 모를, 그러나 그리 멀지는 않았을 순간. 그렇게 억눌러 왔던 공포와 두려움은 사영에게 분명 고통스러운 문제를 불러일으켰을 테다.
그 이후 사영은 바쁘다는 핑계로 제대로 임하지 않았던 정신과 치료를 진지하게 다시 받기 시작했다. 김유준이라는 거대한 애정으로 이미 이겨 낸 상처들을 다시 끄집어냈다.
사랑으로 말미암아 이겨 낸 것과 상처를 온전히 치유하는 게 완전히 같지는 않다는 걸. 망가진 정신의 어떤 부분은 스스로 ‘극복’ 하는 것만으로는 전부 다 아물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
그래서 두 사람은 조심스럽게 시도하고 있었다. 다정하게 입을 맞추고 서로를 어루만지는 것으로 시작했다.
부드러운 살결을 애무하고, 서로의 성기를 쥐어 상대의 몸에 사정했다. 사영은 그 모든 행위에 흥분했고 더 깊은 관계를 원하기도 했으나 아직도 삽입의 순간이 오면 몸이 굳었다.
그러면 유준은 자신이 얼마나 흥분했든, 풀지 못한 욕구에 얼마나 고통스럽든 간에 곧바로 모든 행위를 멈추고 사영을 따스하게 안아 주었다.
좋았다고, 나를 이렇게 받아 줘서 고맙다고 속삭임과 동시에 어처구니없어질 정도로 노골적인 말로 사영을 자극해 속상해할 시간을 주지 않았다.
그런 배려들 속에 두 사람은 지금, 여기에 서 있었다. 오늘 유준이 멈춘 이유도, 사영의 집에 들어가지 않는 이유도 전부 다 거기에 있었다.
섹스는 아무것도 아니다. 유준은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그 날것의 행위가 사영을 불행하게 만든다면 유준은 그깟 섹스, 평생 하지 않아도 상관없었다.
사영은 유준의 그 마음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내 얼굴 잘생긴 건 아는데 내일 또 볼 수 있으니까 그만 집착하고 얼른 들어가요.”
말없이 자신을 바라보고만 있는 사영의 눈빛에서 죄책감을 읽은 유준은 장난스럽게 말을 건네며 문을 향해 턱짓했다.
그러나 사영은 움직이지 않았다. 평소에는 이 정도면 아쉬운 얼굴로 인사를 하고 돌아섰을 텐데 사영은 물끄러미 유준을 쳐다보기만 할 뿐 미동이 없었다.
덜컥 불안해진 유준이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물었다.
“왜 그래요? 하고 싶은 말 있어요? 안 좋은 일 있었어요?”
유준은 늘 그랬다. 사영의 사소하고도 작은 머뭇거림도 놓치지 않았다. 자신이 힘들고 아픈 걸 말하는 게 익숙하지 않은 사영을 위해 늘 민감하고 날카로운 사람이 되어야만 했다.
잠자리도 마찬가지다. 유준이 아니었으면 사영은 제가 그 행위를 여전히 두려워하는 줄도 모르고 그저 참기만 했을 거다.
동시에 유준은 둔하고 무던한 사람이 되어야 하기도 했다. 사영은 자신과의 연애가 얼마나 많은 인내를 필요로 하는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만약 사영이 영영 이 두려움을 극복하지 못한다면 유준은 기꺼이 사영을 위해 제 욕망을 끝까지 참아 낼 사람이었다.
하지만 사영은 문득 궁금했다. 정말로 모든 것이 완벽한 때라는 것이 과연 존재하는가.
만약 정말로 ‘완벽히’ 괜찮아질 때까지 기다리기만 한다면 그것을 과연 ‘극복’이라고 할 수 있을까.
상처를 치유하더라도 마지막 남은 한 걸음은, 제게 남은 미미한 공포에 맞서야 하는 게 아닐까.
유준이 사랑을 위해 예민해지고, 또한 인내하는 것처럼 자신 또한 유준을 위해 용감해져야 하지 않을까.
사영은 유준의 손을 가만히 잡았다. 유준은 걱정과 의아함을 담은 눈동자로 입을 열었다.
“윤사영, 왜 그래. 응?”
그 다정함이 꼭 취기를 불러일으키는 것처럼 사영의 마음을 일렁이게 했다. 마침내 사영이 속삭이듯 말했다.
“유준 씨.”
“응?”
“오늘 자고 갈래요?”
***
유준은 마치 경건한 의식을 치르듯 사영의 옷을 조심스럽게 벗기며 몸을 겹쳐 왔다. 맨살이 닿는 느낌은 아직도 어색했다.
사영이 살짝 몸을 떨자 유준은 그를 안심시키려는 것처럼 부드럽게 입을 맞췄다. 커다란 손이 사영의 허리를 조심스럽게 쥐었다가 천천히 올라오며 매끄러운 살결을 매만졌다.
반사적으로 오므라드는 사영의 두 다리 사이로 유준의 단단한 몸이 맞물렸다. 톡, 하고 꽃봉오리가 터지듯 사영의 향이 퍼졌다. 유준의 목 안쪽에서 그르렁거리는 신음이 흘러나왔다.
사영의 엉덩이와 허벅지를 손으로 쓸어내리며 눈가에 몇 번이나 가벼운 입맞춤을 남긴 유준이 곧 사영과 시선을 마주치며 말했다.
“괜찮지 않아도 돼요.”
“…….”
“괜한 객기를 부렸다고 후회해도 상관없어.”